[미디어펜=이용현 기자]글로벌 해운업의 경쟁 질서가 ‘운임’에서 ‘정시성·가시성·리스크 통제력’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운임 하락 압력이 지속되는 가운데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확대되면서 해운업이 단순 가격 경쟁 산업에서 공급망 안정성을 제공하는 ‘신뢰 산업’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10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해운시장은 공급과잉과 지정학적 리스크가 동시에 작용하는 복합 국면에 진입했다. 해운 분석기관 ‘Tradlinx’는 글로벌 컨테이너 선복량은 2025~2026년 연평균 6~8% 증가하는 반면 물동량 증가율은 이를 하회할 것으로 전망했으며, 구조적 운임 하락 압력이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여기에 중동 전쟁으로 인한 호르무즈 해협 불안정화와 더불어 수에즈 운하 회피 운항 재개, 항로 불확실성, 항만 혼잡 등이 겹치면서 해운업은 ‘운임 하락기’이자 ‘불확실성 확대기’라는 이중 구조에 들어선 상황이다.
◆운임보다 중요한 건 ‘확실성’…화주 선택 기준 변화
실제 최근 중동 지역 긴장은 해운업의 전략 변화를 더욱 뚜렷하게 보여준다. 로이터 등 외신에 따르면 홍해 및 중동 리스크로 글로벌 선사들은 주당 5000만~6000만 달러의 추가 비용을 부담하고 있으며, 약 1000척 이상의 선박이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사들은 수에즈 운하 대신 희망봉 우회 항로를 선택하는 등 비용 증가를 감수하면서 공급망 안정성을 유지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이는 ‘비용 최소화’보다 ‘운송 확실성’을 우선하는 구조적 변화로 해석된다.
이 같은 변화는 화주들의 의사결정 기준에서도 확인된다. 과거에는 운임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면, 최근에는 정시성(schedule reliability), 가시성(visibility), 리스크 대응 능력이 핵심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차질이 반복되면서 기업들은 물류 지연으로 인한 생산 차질을 경험했고 이에 따라 ‘최저가’보다 ‘예측 가능한 운송’을 선택하는 경향이 뚜렷해지면서다.
실제 해운 데이터 분석기관 시인텔리전스(Sea-Intelligence)에 따르면 2026년 초 글로벌 컨테이너선 정시성은 약 62.4% 수준에 머물고 있다. 여전히 화물 3건 중 1건 이상이 예정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는 셈이다.
◆정시성 70%가 경쟁력…선사들 ‘신뢰 서비스’로 진화
반면 글로벌 상위 선사들은 정시성 경쟁에서 앞서갔다. 머스크와 하팍로이드는 70% 이상의 정시성을 기록하며 시장 평균을 크게 상회했으며, 일부 노선에서는 80% 수준까지 도달한 사례도 확인됐다. 이는 단순한 운영 효율 개선이 아니라 정시성 자체가 핵심 상품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어 양사는 선대를 통합 운영하는 ‘Gemini 협력’을 통해 정시성을 80~90%까지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동시에 실시간 위치·도착 정보 제공 등 디지털 서비스를 강화하며 ‘예측 가능한 물류’ 구축에 집중하고 있다. 이는 단순 운송을 넘어 리스크를 관리하는 서비스로의 확장을 의미한다.
국내 해운사 역시 이러한 흐름에 맞춰 전략을 조정하고 있다. HMM은 미주·유럽 핵심 노선 중심으로 선대를 재배치하고, 스케줄 완충시간 확보, 항만 체류시간 단축, 디지털 기반 ETA 관리 등을 통해 정시성 개선에 나서고 있다.
또한 팬오션의 경우 벌크선 중심 사업 구조 특성상 컨테이너선과 같은 정시성 지표 적용은 제한적이지만, 장기 운송계약 비중 확대와 운항 효율 개선을 통해 운송 안정성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화주와의 장기 계약을 기반으로 운송 일정을 사전에 고정하고, 선대 운영 최적화를 통해 지연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항로 효율화와 터미널 협력 강화를 통해 ‘예측 가능한 운송 체계’ 구축에 집중한다는 방침이다.
결국 업계에서는 해운업의 경쟁 구도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과거에는 운임 수준이 시장을 좌우했다면, 이제는 정시성·가시성·리스크 통제력 등 ‘신뢰 기반 경쟁력’이 기업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한 해운업계 관계자는 “이제 화주들은 가장 싼 운임이 아니라 가장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운송을 선택한다”며 “얼마나 안정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느냐에 경쟁력이 달려 있다”고 말했다.
[미디어펜=이용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