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조우현 기자]최태원 SK그룹 회장 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일본 아사히신문 인터뷰를 통해 ‘한일 경제공동체’ 구상을 제안했다. 미·중 패권 갈등 심화와 글로벌 보호무역주의 확산 속에서 정치가 쳐놓은 경계를 넘어 산업적 실리와 국가 생존을 도모하자는 취지다.
9일 업계에 따르면 최 회장은 이번 인터뷰에서 유럽의 솅겐 조약에 빗댄 국경 간 자유 왕래, 양국 간 송전선과 가스 파이프라인을 잇는 에너지망 연결, 그리고 두 나라가 결합해 형성할 6조 달러 규모의 세계 4위 단일 경제권 구축 등을 제시했다.
최태원 SK회장이 지난 6월 5일 오후 서울 서교동의 한 고깃집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와의 삼겹살 회동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단순한 민간 교류 차원을 넘어 국경 개방과 국가 기간망 연결까지 거론한 제안인 만큼, 발언의 배경과 현실성을 두고 안팎에서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 분절되는 글로벌 시장…"규모의 경제 없인 협상력 한계"
시장에서는 이번 구상이 나온 배경으로 글로벌 무역 환경의 급변을 꼽는다.
과거 다자간 무역 체제 아래에서는 국경의 제약이 낮아 분업 중심의 효율화만으로 성장이 가능했지만, 공급망 분절과 자국 우선주의가 팽배한 현 상황에서는 ‘내수 시장의 크기’가 곧 협상력의 척도가 된다는 이유에서다.
전문가들은 인구 5000만 명 수준인 한국 내수 시장만으로는 미·중 등 패권국이 주도하는 보조금 경쟁과 통상 압박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세계 4위 규모의 경제 대국인 일본 역시 장기 저성장과 인구 감소 국면에서 겪고 있는 구조적 위기라는 설명이다.
최 회장이 한국과 일본의 결합을 통해 6조 달러 규모의 거대 시장 형성을 제시한 것 역시 이러한 체급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 인프라 공유와 거래 비용 절감…저출생·고령화 부담 완화 목적
양국이 직면한 저출생과 고령화 위기 역시 경제공동체 구상을 뒷받침하는 핵심 배경으로 지목된다.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들고 복지 및 재정 부담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사회적 기초 운영 비용을 대폭 낮추지 않고서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관측이다.
최 회장이 우선 협력 분야로 에너지 문제를 꼽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한국과 일본은 천연자원이 부족해 세계 최대 수준의 액화천연가스(LNG)와 원유를 수입하는 국가들이다.
에너지 업계에 따르면 양국이 에너지 구매부터 비축, 사용까지 공동 조달 체계를 구축해 단가를 3~5%만 낮춰도 매년 절감할 수 있는 국부 유출 규모는 조 단위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나아가 해저 송전선과 가스관을 잇는 인프라 통합이 실현될 경우, 전력 피크 시간대의 상호 융통을 통해 대규모 발전 설비의 중복 투자를 방지하고 산업 전반의 기초 생산 원가를 방어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또한 솅겐 협정 모델을 원용한 인적 이동 장벽 완화와 금융·보험 등 서비스 시장의 규제 일원화 제안 역시 국경 간 발생하는 제도적 거래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평가받고 있다.
◆ 기술 종속·공동화 우려엔…"과거와 다른 수평 분업", "인프라 한계 분산" 반론
일각에서는 과거사 갈등에 따른 국민 감정과 함께 기술 종속, 국내 산업 공동화 가능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제기된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현재의 글로벌 공급망 구조를 고려할 때 이러한 우려가 현실화할 가능성은 낮다는 반론이 나온다.
우선 기술 종속 우려에 대해 전문가들은 양국 산업 지형이 이미 ‘수평적 분업 체제’로 재편됐다는 점을 짚고 있다. 일본이 기초 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강점을 지닌 반면,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바이오, 이차전지 등 첨단 제조 및 상용화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고 있어 상호 보완이 강하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지난 2019년 아베 정권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당시, 일본 소재 기업들 역시 매출 타격과 고객사 상실을 겪은 바 있다. 양국 산업이 이미 긴밀히 얽혀 있어 대립보다는 제도적 안정성을 구축하는 편이 양국의 공급망 리스크를 낮추는 길이라는 인식이 깔리게 된 것이다.
최 회장이 일본 내 반도체 공장 건설 가능성을 열어둔 데 따른 '국내 투자 위축' 우려에 대해서도 반도체 업계는 구조적인 맥락을 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용인 메가 클러스터 등 국내 투자는 이미 대규모로 진행 중이며, SK하이닉스 등이 겪는 병목 현상은 자금 부족이 아닌 국내 전력망 확충 지연 및 용수 공급 등 물리적 인프라의 한계에서 기인한다는 분석이다.
◆ 정치적 민감성 넘은 '실용주의적 셈법'…실현 가능성은 과제
재계에서는 이번 발언을 두고 과거사나 정치적 리스크로 인해 기업인들이 언급을 꺼려온 민감한 의제를 정면으로 꺼내 들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정치가 그어놓은 경계에 갇혀 각개격파당하기보다는 산업의 효율과 연대의 힘을 모아야 한다는 위기감이 반영됐다는 평가다.
다만 이 같은 구상이 현실화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양국의 복잡한 정치 지형과 과거사 문제, 국내 여론의 반발, 그리고 에너지망 연결과 같은 대규모 인프라 사업에 수반되는 천문학적 비용과 제도적 조율 등이 대표적인 난제로 꼽힌다.
현진권 자유분권포럼 대표는 "최 회장의 구상은 단순한 메시지가 아니라 현실적인 산업 생존 전략을 제시한 것"이라며 "양국 정부의 정책적 뒷받침과 국민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한 경제공동체 구축은 급변하는 국제시대에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말했다.
[미디어펜=조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