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조우현 기자]2006년 삼성전자가 '보르도 TV'를 앞세워 당시 디스플레이의 절대 강자였던 일본 소니를 넘어섰을 때, 시장을 흔든 무기는 단순한 '저가 공세'가 아니었다. 소니보다 합리적인 가격에 세련된 디자인과 깐깐한 화질 만족도를 동시에 충족시킨 '가격 대비 압도적 품질'이었다.
지난 20여 년간 글로벌 가전 1위를 지켜온 한국 가전이 20년 만에 정확히 같은 무기를 든 중국 업체들의 공습에 직면했다. 이번에는 공수가 뒤바뀐 처지다.
결국 수백만 원대 초프리미엄 시장을 뚫지 못하는 '브랜드 천장'과 트럼프 2기 행정부 등 서구권의 고율 관세 압박 역시 중국 가전의 핵심 무기인 '가성비'를 가로막는 제약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2025년 10월 30일 대한민국 부산 김해국제공항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미국서 울린 경고음… TV 공동 1위, 백색가전 단독 1위 내줘
25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미국 고객만족도 조사기관 ACSI가 발표한 '가전·전자제품 연구' 결과는 국내 가전업계에 충격을 던졌다. 글로벌 최대 프리미엄 시장인 미국에서 현지 소비자들이 선택한 최상단에 중국 브랜드가 대거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다.
TV 부문에서는 중국 하이센스가 81점을 기록해 삼성전자, 미국 비지오와 나란히 공동 1위에 올랐다. 2년 연속 단독 1위를 지켰던 삼성전자는 전년 대비 2점 하락했고, LG전자 역시 80점으로 2위로 내려앉았다.
생활가전 부문은 더 뼈아프다. 중국 하이얼이 82점으로 단독 1위에 올랐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보쉬·월풀에 밀린 80점으로 공동 3위에 그쳤다. "미국 소비자들은 브랜드 신뢰도 때문에 결국 삼성과 LG를 산다"던 공식이 현지 소비자 만족도 지표에서 깨진 셈이다.
◆ "싸니까 만족도 높다?"… 소니가 범했던 '오만의 함정'
일각에서는 "가격이 저렴해 기대치가 낮으니 만족도 점수가 후하게 나온 것 아니냐", "글로벌 매출 점유율은 여전히 한국이 압도적"이라는 평가절하가 나온다.
하지만 이 같은 반응이야말로 과거 소니가 몰락하던 초입 단계에서 범했던 전형적인 '오만의 함정'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미국 소비자는 단순히 가격이 싸다고 해서 제품 내구성이나 AS, 초기 불량률을 눈감아주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하이얼은 2016년 미국의 대표적인 가전 명가 GE 가전 부문을 통째로 인수한 뒤, 현지 생산 설비와 촘촘한 물류·서비스망을 그대로 흡수했다. '중국산 꼬리표' 대신 '미국인에게 가장 익숙한 서비스 인프라'를 무기로 1위를 차지한 것이다.
TV 시장의 구조는 더 위태롭다. 옴디아에 따르면 북미 TV 시장에서 TCL과 하이센스의 출하량 합산 점유율은 이미 30%를 돌파했다.
거실용 주력 모델인 65~85인치 대화면 미니LED TV 시장에서 중국 업체들은 삼성·LG 프리미엄 라인업 가격의 절반 수준에 90%에 달하는 화질을 구현하고 있다.
여기에 한국 디스플레이 진영이 LCD 사업에서 철수한 사이 BOE·TCL CSOT 등이 글로벌 공급망을 독점하면서, 삼성전자와 LG전자마저 TV 생산을 위해 중국산 패널을 사다 써야 하는 처지다.
부품 원가 통제권을 쥔 중국 세트업체들의 저가 공세 앞에서 한국 제조사의 가격 방어벽은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 '백도어 공포'와 브랜드 천장… 중국 가전의 명확한 한계
다만 중국이 시장 전체를 주도하기엔 구조적 한계가 뚜렷하다는 진단이 나온다.
가장 큰 걸림돌은 스마트홈 시대의 핵심인 '보안 불신과 백도어 공포'다. 카메라·마이크 센서가 집안을 실시간 스캔하는 AI 가전 특성상, 프라이버시에 민감한 서구권 소비자가 중국산 기기에 느끼는 심리적 저항선은 여전히 높다.
특히 중국 정부의 '국가정보법(정부 요청 시 기업 데이터 제공 의무)'과 특유의 국가 주도 통제 경제는 글로벌 소비자의 신뢰를 가로막는 결정적 단점으로 꼽힌다. 하드웨어 제조는 정부 보조금과 물량 공세로 밀어붙일 수 있어도, 글로벌 표준을 이끌 창의적 소프트웨어 생태계와 데이터 신뢰는 국가 통제 시스템 안에서 피우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브랜드 프리미엄의 한계'도 뚜렷하다. 거실 TV나 주방 냉장고는 공간의 품격을 드러내는 과시 소비의 성격을 띤다.
아직까지 중국 브랜드는 "돈을 아끼기 위한 합리적 대안"으로 통할 뿐, 선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300만~400만 원을 훌쩍 넘는 초프리미엄 라인업에서 중국 브랜드의 점유율이 떨어지는 이유다.
결국 수백만 원대 초프리미엄 시장을 뚫지 못하는 '브랜드 천장'과 트럼프 2기 행정부 등 서구권의 고율 관세 압박 역시 중국 가전의 핵심 무기인 '가성비'를 가로막는 제약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 단품 하드웨어 넘어 '보안 생태계·B2B'로 판 바꾼다
결국 한국 가전의 살길은 단품 가격 경쟁을 벗어나 전장을 옮기는 데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전자는 보안 플랫폼 '녹스(Knox)'와 스마트싱스를 결합해 AI 초연결 스마트홈 생태계를 굳히고 있다. LG전자 역시 OLED 리더십을 바탕으로 가전 구독 서비스와 B2B 냉난방공조(HVAC)로 사업 체질을 전환 중이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 소니가 무너진 건 삼성의 추격을 가성비 덤핑으로 폄훼하며 안주했기 때문"이라며 "중국이 넘보지 못할 데이터 보안 신뢰도와 플랫폼 락인(Lock-in), B2B 확장이 소니의 전철을 밟지 않을 유일한 방파제"라고 강조했다.
[미디어펜=조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