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유태경 기자]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확산과 대규모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으로 전 세계적인 전력 수요 폭증이 현실화되면서 생산된 전력을 적기에 전달하는 '전력망(Grid)' 확보가 국가 산업 경쟁력의 핵심 인프라로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송전선로 건설을 둘러싼 낮은 사회적 수용성과 복잡한 인허가 절차로 인해 전력망 확충이 난항을 겪으면서 단순한 설비 증설을 넘어선 종합적인 대응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 세계적으로 전력 수요가 폭증하며 '전력망(Grid)' 확보가 국가 산업 경쟁력의 핵심 인프라로 부상하고 있지만, 전력망 확충이 난항을 겪으면서 단순한 설비 증설을 넘어선 종합적인 대응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사진=KDB미래전략연구소
25일 KDB미래전략연구소가 발간한 '국내외 전력망 병목 대응'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발전·저장 설비 및 데이터센터 등 1500GW 이상의 대규모 전력 수요가 전력망 연결을 기다리는 '접속 대기' 상태에 직면해 있다.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는 신규 건설에 1~5년, 데이터센터는 1~3년, 전기차 충전 인프라는 1~2년이 소요되는 반면, 신규 전력망 완공에는 5~15년이라는 장기간이 걸려 구조적인 병목 현상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국내 전체 전력 수요의 약 45%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수도권 전력 자급률은 25%에 불과해 남부권 등 비수도권에서 생산된 전력을 송전망을 통해 전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조성 중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운영에만 10GW 이상의 전력이 필요하고, 정부가 메가프로젝트로 추진하는 AI 데이터센터에도 총 1GW의 전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전력망 용량 포화로 인해 호남 및 동해안 지역 56개 변전소가 신규 재생에너지 접속이 제한되는 계통관리변전소로 지정됐으며, 오는 2029년까지 신청된 수도권 데이터센터 601개소 중 적기 전력 공급이 가능한 시설은 1.3%인 8개소에 불과한 실정이다. 육지 지역 출력제어량 역시 2023년 0.2GWh에서 올해 상반기 12.3GWh로 급증했다. 이에 더해 북당진~신탕정 송전선로 사업이 당초 계획보다 9년 6개월 지연돼 준공까지 총 19년이 소요되는 등 전력망 건설 장기화가 반복되고 있다.
글로벌 전원별 발전량./사진=KDB미래전략연구소
이 같은 병목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해외 주요국들은 국가 주도의 인허가 간소화와 함께 '비건설적 대안(NWA)'을 전면 도입하고 있다.
미국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FERC)는 20년 단위의 송전망 확충계획 수립을 의무화하고, 주정부가 1년 이상 인허가를 내주지 않을 경우 연방정부가 직접 개입해 인허가를 처리하도록 했다. EU 역시 핵심 전력망 사업(PCI)의 전체 인허가 기간 상한을 3년 6개월로 제한했다. 동시에 캐나다 수력 발전 전력을 뉴욕에 공급하는 CHPE 사업처럼 초고압직류송전(HVDC) 해저·지중화 기술을 활용해 토지 매입비와 주민 갈등 비용을 대폭 줄였다.
나아가 주요국들은 신규 선로 건설 없이 기존 전력망의 수용 능력을 극대화하는 NWA 기술 상용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센서와 데이터 분석으로 실시간 기상 조건에 따라 송전 용량을 유동적으로 늘리는 '동적 송전용량(DLR)'나 변전소 스위칭을 조작해 최적 경로를 찾는 '토폴로지 최적화(TO)', '지능형 조류 제어(APFC)' 등이 대표적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기존 전력망 활용을 극대화할 경우 전 세계적으로 830GW의 전력망 용량을 추가 확보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우리 정부 역시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 시행과 함께 서해안 HVDC 기반의 U자형 에너지 고속도로 구축을 추진하며 전력망 건설 기간을 12년에서 9년으로 단축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한국전력도 증용량 가공선(ACCC) 교체 및 차세대 전선(HVDC-C) 개발, FACTS 설비 도입 등으로 전력망 용량 증대를 추진 중이다.
그러나 신규 전력망 확충이 완료되기까지는 시간적인 한계가 명확한 만큼 단기 병목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국내 역시 NWA 관련 제도와 기술을 대폭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해외 주요국은 유연성 자원(ESS, DR) 시장 활성화 및 민간 인센티브 제도를 통해 NWA 기술 대다수가 상용화 단계에 진입한 반면, 국내는 한전 단일 운영 체제 특성상 책임 소재 문제로 인해 혁신 기술 도입에 보수적이고 현장 적용이 저조한 실정이다.
정준환 산업기술리서치센터 전임연구원은 "신규 전력망 확충만으로는 단기 전력 대란에 신속히 대응하는 데 시간적 한계가 있다"며 "한전이 보유한 통합 계통 데이터와 투자 예산 정보를 활용해 NWA의 경제적 가치를 정량적으로 평가하고, 민간 사업자가 자발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보상 체계와 수익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어 "정부 차원에서 NWA 도입에 따른 리스크 분담 가이드라인을 수립해 한전과 민간의 부담을 완화하고, 인허가 특례 및 정책 자금 지원 등 실증·상용화 장벽을 낮춰주는 적극적인 제도적 지원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미디어펜=유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