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연지 기자]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로 에너지 공급망 불안이 장기화하면서 수소가 에너지 안보를 강화할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주요국이 수소 산업 육성을 위한 제도와 재정 지원을 확대하고 글로벌 투자도 실제 사업화 단계로 접어드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관련 예산과 세제 혜택, 발전 입찰 물량 등이 축소되고 있다. 장기간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수소 산업의 특성상 일관되고 예측 가능한 정책 환경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28일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24년 기준 한국의 에너지 수입 의존도는 93.7%에 달한다. 30년 넘게 90%대의 높은 수준을 이어갈 만큼 국내 에너지 수급은 해외 의존도가 높은 구조다.
최근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리스크는 이 같은 에너지 구조의 취약성을 다시 부각시키고 있다. 정부는 지난 18일 석유 최고가격제를 다시 연장했다. 지난 3월 13일 시행 이후 열 번째 최고가격 결정으로, 1997년 유가 자유화 이후 29년 만에 도입된 비상조치가 반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현대차그룹, 청정 수소 생산시설 준공./사진=현대차그룹 제공
석유 최고가격제 장기화에 따른 재정 부담도 커지고 있다. 정유업계가 추산한 누적 손실은 지난 6월 중순 이미 5조 원 규모로 정부가 당초 확보한 4조2000억 원의 예비비를 넘어섰다. 정부와 정유업계 간 이견으로 지난 3월 13일부터 6월 30일까지 발생한 1차 손실에 대한 정산도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이런 가운데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수소를 에너지 공급망을 다변화할 수 있는 수단으로 주목하고 있다. IEA는 지난 6월 발간한 '글로벌 하이드로젠 리뷰 2026'에서 중동 전쟁으로 드러난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의 취약성을 짚으며 수소가 화석연료 수입 의존도를 낮춰 에너지 안보 강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석유와 천연가스 등 화석연료가 특정 지역에 매장량이 집중돼 있는 것과 달리 수소는 각국에서 직접 생산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으로 꼽힌다. 재생에너지나 원자력으로 생산한 전력을 활용해 물을 전기분해하거나 음식물 폐기물과 하수 슬러지, 가축 분뇨 등 유기성 폐기물을 원료로 활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IEA는 특히 에너지의 70% 이상을 해외에서 조달하고 특정 국가에 대한 수입 비중이 25%를 넘는 한국과 독일, 일본의 경우 재생에너지 기반 수소가 에너지 수입 일부를 대체하고 공급망 다변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세계 각국의 수소 정책도 선언적인 목표 제시를 넘어 법·제도 정비와 재정 투입을 통한 실행 단계로 옮겨가고 있다. 국가 차원의 수소전략을 보유한 국가는 2021년 23개국에서 올해 66개국으로 5년 만에 3배 가까이 늘었다.
중국은 수소 산업 전반을 대상으로 5개 도시군에 4년간 최대 80억 위안을 지원하는 2차 시범사업에 착수했다. 일본은 3조 엔 규모의 재원을 투입해 저탄소수소와 화석연료 간 가격 차이를 최장 15년 동안 보전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유럽수소은행을 통해 재생수소 생산자에게 최장 10년간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지난 7월에는 5억 유로 규모의 4차 경매 초안을 발표했다.
글로벌 수소 산업의 투자도 실제 집행 단계로 이동하고 있다. 글로벌 수소 기업 협의체인 수소위원회가 이달 발간한 '글로벌 하이드로젠 컴퍼스 2026'에 따르면 전 세계 청정수소 관련 누적 확정 투자 규모는 13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사업성 검증을 거쳐 최종투자결정(FID)을 통과한 프로젝트는 570개 이상으로 늘었다. 가동 중인 청정수소 생산능력도 연간 약 170만 톤으로 전년 대비 70% 증가했다. 계획과 실증을 중심으로 진행됐던 수소 프로젝트가 실제 투자와 운영 단계로 확대되고 있다는 의미다.
수소위원회는 수소 산업이 생태계 기반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존 정책의 안정적이고 일관된 실행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생산뿐 아니라 운송과 저장, 활용까지 장기간 투자가 필요한 만큼 기업들이 중장기 사업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정책 환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 역시 수소 산업 육성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비교적 빠르게 마련해왔다. 2020년 2월 세계 최초로 수소법을 제정했고 2024년 5월에는 청정수소발전 입찰시장을 개설했다. 연료전지와 수전해 등 핵심 분야에서도 관련 기술과 산업 기반을 구축해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수소 산업 관련 지원이 줄어드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2027년 정부 예산안 지출구조조정 내역에 따르면 수소전기차 보조금은 5762억 원에서 4457억 원으로 23% 줄었고, 수소충전소 보조금은 1897억 원에서 1197억 원으로 37% 감소했다.
세제 혜택도 축소를 앞두고 있다. 승용 수소전기차 개별소비세 감면은 내년부터 단계적으로 줄어 2028년 말 종료될 예정이며 취득세 감면은 내년 말 일몰을 앞두고 있다. 시내·마을·농어촌버스에 적용되던 수소전기버스 부가가치세 면세도 당초보다 2년 앞당겨 올해 말 종료될 예정이다.
수소발전 시장에서도 규모와 향후 사업의 예측 가능성을 둘러싼 우려가 나온다. 일반수소발전 개설물량은 1300GWh에서 930GWh로 줄었고 청정수소발전 입찰물량은 500GWh로 정해졌다. 과거 수년치 입찰물량을 사전에 공개했던 것과 달리 올해는 2026년 물량만 확정하고 2027년 물량은 내년에 결정하기로 하면서 기업 입장에서는 향후 시장 규모를 가늠하기 어려워졌다는 지적이다.
정부의 수소 정책 컨트롤타워인 수소경제위원회도 2024년 11월 열린 7차 회의를 마지막으로 약 2년 동안 추가 회의 개최 소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국내 산업계에서는 글로벌 수소 산업이 실제 투자와 사업화 단계로 이동하는 시점인 만큼 국내에서도 정책의 일관성과 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특히 주요국이 에너지 안보와 산업 경쟁력 차원에서 장기적인 수소 생태계 구축에 나서는 상황에서 정책 변화가 잦아질 경우 이미 투자를 진행해 온 기업들의 중장기 사업 계획에도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수소 산업이 생산부터 운송·저장, 활용까지 대규모 인프라와 장기 투자가 필요한 분야인 만큼 안정적인 수요를 뒷받침할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청정수소 투자가 늘고 실제 가동 프로젝트가 확대되는 가운데 국내에서도 기업들이 중장기 투자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일관되고 예측 가능한 정책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미디어펜=김연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