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소희 기자] 정부가 재생에너지 확대의 최대 걸림돌로 지목돼 온 전력계통 문제를 기존 전력망의 ‘효율적 활용’으로 풀어가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한다.
정부가 송전망·배전망 병목으로 신규 발전사업 접속이 제한됨에 따라 전력망 운영을 유연화·효율화 한다는 정책을 발표하고 전력망 재배치를 구체화했다./자료=제미나이 생성
신규 송전망을 대규모로 건설하는 데만 의존하기보다 유연접속, 자율접속, 에너지저장장치(ESS), 접속권 재배분 등을 통해 현재 전력망에서 추가로 수용할 수 있는 재생에너지 물량을 최대한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를 통해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전력망 수용능력을 송전망 기준 119GW에서 171GW로, 배전망 기준 84GW에서 110GW로 각각 확대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특히 재생에너지 발전설비가 집중된 호남권의 송전 수용능력은 37GW에서 64GW, 배전 수용능력은 18GW에서 30GW로 확대할 계획이다.
문제는 전력망 건설 속도가 재생에너지 확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 자료에 따르면 2038년까지 현재 전력망의 약 70%에 해당하는 수준의 신규 송전선로가 추가로 필요하다. 하지만 345kV급 송전선로를 새로 건설하는 데 9년 이상이 걸리는 데다 주민 수용성 문제까지 겹치면서 단기간에 물리적인 전력망 확충만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에 따라 정부가 꺼내든 해법이 ‘망 효율화’다.
전력망 증설은 한계 봉착…‘있는 망’ 최대한 활용한다
정부는 우선 전력망에 여유 용량이 남아 있음에도 최대 발전량을 기준으로 접속을 제한하는 기존 방식부터 손본다.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시간대별로 크게 달라지는 특성을 활용해 일부 시간대의 출력제어를 전제로 전력망 접속을 허용하는 ‘유연접속’을 확대한다.
현재 배전선로의 재생에너지 접속 기준은 14MW에서 16MW로, 변전소 기준은 50MW에서 60MW로 각각 높인다. 이를 통해 호남지역에서 약 2.6GW의 태양광 수용능력을 추가로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발전사업자가 접속용량보다 큰 설비를 설치하고 실제 계통에 흘려보내는 전력은 출력제어 또는 ESS 등을 통해 관리하는 ‘자율접속’도 추진한다. 정부는 경제성이 확보될 경우 접속용량 대비 2~3배, 최대 6배 수준의 설비용량을 허용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올해 9월부터 전용선로를 대상으로 시범 적용하고, 내년 상반기에는 공용망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ESS를 활용해 전력망 자체의 물리적 확충을 늦추는 방식도 본격화한다. 배전선로와 변압기가 포화된 지역에 ESS를 설치해 태양광 발전량이 많은 낮에는 전력을 저장하고 저녁 시간대에 방전함으로써 기존 설비의 이용률을 높이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2030년까지 배전망에서 3GW 규모의 추가 태양광 수용능력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변전소와 송전망에도 ESS를 투입한다. 호남권의 포화 변전소 41곳에 약 40MW 규모의 ESS를 설치해 총 1.6GW의 수용 능력을 확보하고, 송전망에서도 ESS를 활용해 평소에는 사용하지 못했던 여유 용량을 재생에너지 접속에 활용한다는 구상이다.
‘전력망 알박기’ 정리하고 재생에너지 접속체계 전면 개편
전력망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기존에 배정된 접속권을 정리하는 작업도 병행키로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호남권 해상풍력이다.
정부에 따르면 호남권 해상풍력은 2030년까지 15.8GW의 계통 접속권이 확보돼 있지만 실제 계통에 들어올 것으로 예상되는 물량은 약 3GW 수준이다. 사업 추진이 지연된 프로젝트가 접속용량을 장기간 점유하면서 다른 사업자의 계통 진입을 막는 이른바 ‘전력망 알박기’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정부는 앞으로 환경영향평가가 일정 시점까지 완료되지 않거나 고정가격 경쟁입찰에 참여하지 않은 사업 등에 대해 접속권을 회수하거나 일정을 재조정하는 기준을 마련한다. 이를 통해 호남권에서 2030년까지 10GW 이상의 접속권을 재조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재생에너지 사업의 실제 추진 가능성도 접속자원 배분에 반영한다. 정부는 그동안 발전사업 허가가 난 사업이 모두 실제 추진된다는 전제로 전력망을 배분해 왔지만, 실제 재생에너지 사업의 평균 이행률은 67.2% 수준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2031년부터는 실제 사업 이행률을 반영해 접속용량을 배분할 방침이다.
접속 우선순위도 바뀐다. 현재의 선착순 방식에서 벗어나 전력계통 운영 과정에서 재생에너지를 석탄·LNG 등 화석연료 발전보다 우선적으로 접속할 수 있도록 기준을 개편한다. 정부는 이를 통해 2030년까지 전국적으로 약 20GW의 추가 재생에너지 수용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2027년부터는 재생에너지 보급제도 개편과 연계해 경쟁입찰을 통한 접속권 배분도 추진한다. 경제성뿐 아니라 공공성, 계통 여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사업자를 선정하고, 선정된 사업자에게 고정가격 계약과 계통 접속권을 함께 부여하는 방식이다.
전력망 투자비 부담 방식도 바뀔 가능성이 있다. 현재는 특정 발전사업자가 새로운 배전망 보강 비용을 사실상 선부담하는 구조지만, 정부는 한국전력이 공용 배전망을 우선 투자한 뒤 이후 접속하는 사업자에게 용량에 따라 비용을 분담받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향후 전기사용 관련 요금이나 망 이용료 등에 비용이 반영될 가능성도 있어 구체적인 제도 설계가 주목된다.
이와 함께 전남·전북 등 호남권의 전력망 관리변전소 지정도 10월 1일부터 해제된다. 기존 대기 사업을 우선 처리한 뒤 내년 1월부터 신규 접속 신청을 받을 예정이다.
‘망 효율화’만으로 충분할까…출력제어·비용·계통 안정성 과제
이번 대책의 골자는 신규 전력망 건설을 기다리는 대신 이미 구축된 망의 이용률을 높여 재생에너지 수용 여력을 확보하는 데 있다. 전력망 건설에 수년이 걸리는 현실을 감안하면 단기적으로 재생에너지 확대의 병목을 완화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다만 기존 전력망 효율화가 장기적인 망 확충을 대신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정부 스스로도 2038년까지 현재 전력망의 약 70%에 해당하는 신규 송전선로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때문에 유연접속이나 ESS는 신규 송전망 건설이 완료되기 전까지 한정된 계통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수단이지, 전력망의 물리적 부족 자체를 없애는 해법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유연접속 확대는 ‘접속 허용’과 ‘발전량 전량 수용’이 같은 의미가 아니라는 점에서 주의가 필요하다. 계통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유연접속 대상 발전설비의 출력부터 줄이는 방식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재생에너지 사업자 입장에서는 발전량을 줄여야 하는 시간이 늘어날 경우 사업 수익성이 낮아질 수 있다. 정부 자료에서도 호남·제주지역 일부 발전사업자의 경우 계절적 특성에 따라 과도한 출력제어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ESS 역시 설치 규모를 확대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정부가 제시한 대책 자체도 자율접속 확대 과정에서 ESS의 경제성이 확보되는 경우를 전제로 하고 있다. 대규모 ESS 설치비와 운영비를 누가 부담하고, 이를 통해 확보한 전력망 편익을 어떤 방식으로 비용에 반영할지가 향후 중요한 쟁점이 될 수 있다.
계통 안정성에 대한 검증도 필요하다. 재생에너지는 발전량이 기상 조건 등에 따라 변동하는 반면 기존 전력계통은 대규모 발전소 중심으로 설계돼왔다. 정부 역시 재생에너지 확대에 맞춰 분산형 전력망과 계통 운영체계의 혁신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정부의 이번 전력망 재편은 전력망 부족에 대응하는 방식이 ‘더 많이 짓는 것’에서 ‘이미 있는 망을 더 효율적으로 쓰는 것’으로 확장됐다는 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재생에너지 100GW 시대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효율화와 함께 물리적인 전력망 확충이 병행돼야 한다는 점에서, 단기적인 계통 활용도 제고와 중장기적인 망 건설 사이의 균형이 향후 정책 성과를 가를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