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해외건설은 건설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건설사가 현장에 들어가기 전 도로의 노선을 정하고 교량을 설계하며 사업비를 계산하는 한국 기업들이 있다. 공사가 시작되면 제대로 짓고 있는지 감독하고 때로는 발주처를 대신해 프로젝트 전체를 관리한다. 홍익기술단·동명기술공단·삼안·경동엔지니어링·동성엔지니어링·한국해외기술공사(KCI) 등이다. 이들의 이름은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시아·아프리카·남태평양의 도로와 교량, 도시 인프라 곳곳에 한국 엔지니어들의 설계도가 들어가고 있다. 미디어펜은 ‘K-엔지니어링, 세계를 설계하다’를 통해 세계 인프라 시장의 앞단을 개척하고 있는 한국 엔지니어링 기업을 추적한다. [편집자주]
한국 엔지니어링 기업들이 해외에서 기존 도로와 교량을 넘어 수자원관리와 도시 상하수도 인프라로 수주 범위를 넓히고 있다./사진=AI 이미지 생성
[미디어펜=서동영 기자]한국 엔지니어링 기업들의 해외 진출 영역이 도로와 교량을 넘어 수자원관리와 도시 상하수도 인프라로 확대되고 있다. 대형 건설사의 해외 수주에 가려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국내 엔지니어링 기업이 아시아 개발도상국의 물관리 사업에서 기술력을 발휘하고 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의 계약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건화와 한국수자원공사가 참여한 컨소시엄은 캄보디아 통합수자원관리 사업에서 약 554만 달러 규모의 사업관리·이행 컨설팅 계약을 체결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도화엔지니어링이 참여한 컨소시엄이 약 284만 달러 규모의 도시 상하수도 상세설계 계약을 확보했다.
두 계약 모두 2025년 체결된 것으로, 한국 기업이 해외에서 시설을 직접 건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업관리와 설계 등 인프라 개발의 앞단에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기후변화에 따른 가뭄과 홍수, 도시화에 따른 물 수요 증가가 맞물리면서 물 인프라 엔지니어링이 새로운 해외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캄보디아 물관리 사업에 한국 기업 참여…554만 달러 컨설팅 계약
캄보디아 정부가 추진하는 통합수자원관리 사업에 한국 기업들이 참여하고 있다.
ADB가 공개한 계약자료에 따르면 한국수자원공사와 건화의 합작 컨소시엄은 현지 SBK 리서치앤드디벨롭먼트와 협력하는 형태로 2025년 9월 4일 사업관리 및 이행 컨설팅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금액은 553만7752달러다.
발주기관은 캄보디아 수자원기상부다. 해당 계약은 건설공사가 아닌 프로젝트관리 및 사업 이행을 지원하는 엔지니어링 서비스 계약이다. 계약금액은 컨소시엄 전체 기준이며, 개별 기업의 수주액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업 대상지는 캄보디아 톤레삽 호수 남서쪽의 푸르사트주와 바탐방주 일대다. 이 지역에는 몽루세이강, 푸르사트강, 상커강, 스바이돈케오강 등 주요 하천 유역이 포함된다.
ADB는 해당 지역이 기후변화에 따른 건기 물 부족과 기온 상승, 강수 패턴 변화에 취약하다고 평가했다. 사업은 하천 유역의 통합적인 물관리 체계를 강화하고 농업용수 확보와 홍수 대응 능력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도 이 사업에 8000만 달러의 금융 지원을 승인했다. AIIB에 따르면 사업에는 관개시설의 신설·개보수, 배수 및 홍수방지시설 개선, 하천유역 관리 역량 강화 등이 포함된다.
이번 계약은 한국 엔지니어링 기업이 개별 시설의 설계·시공을 넘어 국가 단위 수자원관리 사업의 이행을 지원하는 역할까지 수행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방글라데시 도화엔지니어링, 도시 상하수도 상세설계 주도
한국 엔지니어링 기업의 물 인프라 진출은 방글라데시에서도 확인된다.
ADB 계약자료에 따르면 도화엔지니어링이 참여한 컨소시엄은 2025년 5월 25일 283만6395달러 규모의 상하수도 상세설계 계약을 체결했다.
사업은 방글라데시의 쿠밀라와 이슈와르디 지역 도시군 및 경제구역, 카그라차리 지역의 상수도·위생시설 상세설계를 대상으로 한다.
컨소시엄에는 도화엔지니어링을 비롯해 방글라데시 DEV컨설턴트, 수자원모델링연구소(IWM), 도화인디아, 비저너리컨소시엄 등이 참여한다.
방글라데시 공공조달청 자료에는 도화엔지니어링이 컨소시엄의 대표사로 명시돼 있다. 현지 조달자료에 따르면 컨설팅 업무에는 타당성조사 검토와 검증, 세부 설계, 입찰서류 작성 지원, 발주기관의 제도적 역량 강화 등이 포함된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상하수도 공사가 시작되기 전 단계에서 한국 기업이 사업의 기술적 기반을 마련한다는 점이다.
상수도 시설은 취수와 정수, 송수와 배수, 가정 연결에 이르는 복합적인 시스템으로 구성된다. 사업의 타당성과 기술적 설계가 적절하게 마련돼야 이후 시설 투자와 운영도 안정적으로 추진될 수 있다.
도화엔지니어링의 사례는 한국 기업이 해외 도시 인프라 사업에서 시공 이전의 핵심 기술서비스 시장을 공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후변화가 바꾸는 해외 인프라 시장…한국 엔지니어링의 기회
캄보디아와 방글라데시의 사례는 한국 엔지니어링 기업들이 해외에서 확보할 수 있는 사업 영역이 다양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 해외 인프라 시장에서는 대형 건설사가 수주한 도로와 교량, 발전소, 플랜트 사업이 주목받았다. 그러나 실제 인프라 사업은 타당성조사와 기본계획, 상세설계, 발주 지원, 사업관리, 시공감리 등 여러 단계로 구성된다.
특히 수자원과 상하수도 사업은 지역의 기후와 지형, 인구, 산업구조, 장기적인 물 수요를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단순히 시설을 건설하는 것만으로는 사업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캄보디아의 경우 건기 물 부족과 우기 홍수에 동시에 대응해야 하며, 방글라데시는 도시와 경제구역의 물 공급 및 위생시설 확충이 중요한 과제다.
이처럼 서로 다른 지역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수자원공학과 환경공학, 도시계획, 사업관리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기술이 필요하다.
국제금융기구가 지원하는 인프라 사업은 한국 중견 엔지니어링 기업에 해외시장 진출의 통로가 될 수 있다. 다만 실제 경쟁력 확대 여부는 개별 계약 실적뿐 아니라 후속 사업 수주, 현지 기술인력과의 협력, 장기적인 사업 수행 성과 등을 통해 평가해야 한다.
건설사가 해외에서 도로와 교량을 세우는 동안, 또 다른 한국 기업들은 물길을 관리하고 도시의 상하수도 시스템을 설계하고 있다.
한국의 인프라 수출이 완성된 시설뿐 아니라 그 시설을 계획하고 설계하며 관리하는 기술서비스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한 엔지니어링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해외 인프라 시장에서 도로·교량 설계가 한국 엔지니어링 기업의 주력이었다면, 최근에는 기후변화 대응과 도시화 수요가 맞물리며 수자원관리와 상하수도 분야의 발주가 꾸준히 늘고 있다"며 "특히 ADB·AIIB 등 국제금융기구 사업은 발주 절차가 투명하고 실적이 다음 수주로 이어지는 구조여서, 중견 엔지니어링사가 해외 레퍼런스를 쌓기에 좋은 시장"이라고 말했다.
이어 "다만 물 인프라 사업은 현지 기후와 지형, 제도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인 만큼 현지 업체·기관과의 협력 체계를 얼마나 탄탄하게 구축하느냐가 장기적인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디어펜=서동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