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해외건설은 건설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건설사가 현장에 들어가기 전 도로의 노선을 정하고 교량을 설계하며 사업비를 계산하는 한국 기업들이 있다. 공사가 시작되면 제대로 짓고 있는지 감독하고 때로는 발주처를 대신해 프로젝트 전체를 관리한다. 홍익기술단·동명기술공단·삼안·경동엔지니어링·동성엔지니어링·한국해외기술공사(KCI) 등이다. 이들의 이름은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시아·아프리카·남태평양의 도로와 교량, 도시 인프라 곳곳에 한국 엔지니어들의 설계도가 들어가고 있다. 미디어펜은 ‘K-엔지니어링, 세계를 설계하다’를 통해 세계 인프라 시장의 앞단을 개척하고 있는 한국 엔지니어링 기업을 추적한다. [편집자주]
필리핀 민다나오섬의 고규격 고속도로 건설을 준비하는 상세설계 사업에 유신이 참여한다. ADB가 기록한 계약일은 2026년 7월 6일이다./이미지 생성=챗GPT
[미디어펜=박소윤 기자]필리핀 민다나오섬의 고규격 고속도로 건설을 준비하는 상세설계 사업에 한국 엔지니어링 기업 유신이 참여한 것으로 확인됐다. 도로를 직접 건설하는 공사가 아니라 실제 시공에 앞서 기술적 기반을 마련하는 엔지니어링 계약이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의 공식 계약자료에 따르면 유신은 일본 오리엔탈컨설턴츠글로벌, 호주 SMEC인터내셔널과 함께 '중부 민다나오 고규격 고속도로 건설사업 상세설계' 컨소시엄에 참여했다. 계약금액은 2027만9130.55달러로 약 2028만 달러다.
ADB가 기록한 계약일은 2026년 7월 6일이다. 이번 계약은 한국 엔지니어링 기업이 일본과 호주의 전문기업들과 함께 동남아시아의 도로 인프라 개발을 위한 설계시장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유신, 민다나오 고속도로 상세설계 참여…2028만 달러 계약
필리핀 정부는 교통 인프라 개선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가운데 중부 민다나오 고규격 고속도로 건설사업은 도로 인프라 개발을 위한 상세설계 단계에 들어선 사업이다.
ADB가 공개한 '인프라 준비 및 혁신 지원시설(Infrastructure Preparation and Innovation Facility)' 계약자료에 따르면 중부 민다나오 고규격 고속도로 건설사업의 상세설계 용역 계약이 2026년 7월 6일 체결됐다.
계약에 참여한 기업은 일본 오리엔탈컨설턴츠글로벌, 한국 유신, 호주 SMEC인터내셔널이다. ADB에 등록된 전체 계약금액은 2027만9130.55달러이며, ADB 금융지원 대상 계약금액도 동일하다.
다만 이 금액은 세 기업이 참여한 컨소시엄 전체 계약금액이다. 유신이 개별적으로 확보한 계약금액이나 지분율은 별도 확인이 필요하다.
상세설계는 도로 건설사업의 핵심 준비 단계다. 기본적인 사업 구상이 실제 공사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도로의 선형과 구조물, 지반 조건, 배수체계 등 다양한 기술적 요소를 검토하고 구체적인 설계에 반영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마련된 설계 결과는 이후 공사 발주와 시공을 위한 중요한 기초자료로 활용된다. 따라서 상세설계 용역은 공사 규모에 비해 계약금액이 작더라도 전체 인프라 사업의 추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유신의 이번 참여는 한국 엔지니어링 기업이 해외 도로사업의 시공 이전 단계에서 기술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일본·호주 기업과 공동 참여…국제 엔지니어링 시장의 경쟁 구조
이번 계약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컨소시엄 구성이다.
유신은 일본 오리엔탈컨설턴츠글로벌, 호주 SMEC인터내셔널과 함께 사업에 참여한다. 세 기업은 각국을 기반으로 교통·토목 분야의 엔지니어링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들이다.
해외 대형 인프라 사업에서는 여러 국가의 전문기업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입찰에 참여하는 경우가 있다. 발주기관이 요구하는 기술적 역량과 인력, 사업 수행 경험 등을 공동으로 확보하기 위한 방식이다.
한국 기업 입장에서는 이러한 국제 컨소시엄 참여가 해외시장 진출의 통로가 될 수 있다. 개별 기업이 단독으로 수행하기 어려운 규모의 사업에서도 해외 파트너와 함께 전문성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국제 컨소시엄의 계약금액을 한국 기업 한 곳의 수주액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전체 계약금액과 개별 참여기업의 지분 및 실제 수행 범위는 구분해야 한다.
유신의 민다나오 고속도로 설계 참여 역시 국제 컨소시엄을 통한 사업 수행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구체적인 업무 분담과 유신의 계약 지분은 추가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번 사업은 한국 엔지니어링 기업의 해외 진출을 평가할 때 단순히 계약금액뿐 아니라 어떤 단계의 사업에 참여하고 어떤 기술적 역할을 수행하는지도 살펴봐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공사 전에 먼저 진출하는 엔지니어링…해외 인프라 시장의 또 다른 경쟁
한국의 해외건설은 주로 대형 건설사의 시공계약을 중심으로 주목받아 왔다. 그러나 도로와 철도, 교량 등 인프라 사업이 실제 공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전 조사와 타당성 검토, 설계, 사업관리 등 여러 단계가 필요하다.
특히 상세설계는 사업 구상을 실제 시공 가능한 기술문서로 구체화하는 과정이다. 설계의 완성도는 이후 공사의 품질과 사업비 관리, 유지관리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국제금융기구가 지원하는 사업에서는 이러한 준비 단계의 엔지니어링 용역도 별도 계약으로 발주된다. 한국 기업들은 이 시장에서 외국 전문기업과 경쟁하거나 협력하면서 사업 참여 기회를 확보하고 있다.
민다나오 고속도로 설계에 참여한 유신의 사례는 해외 인프라 시장에서 한국 기업이 맡는 역할이 건설공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만 상세설계 계약을 확보했다고 해서 해당 고속도로의 전체 건설공사 수주까지 확정된 것은 아니다. 설계 용역과 실제 시공계약은 사업 단계와 계약 주체가 다른 별개의 영역이다.
향후 한국 엔지니어링 기업의 경쟁력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해외 설계 실적이 후속 사업과 장기적인 현지 시장 진출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로를 건설하는 기업이 현장에 들어가기 전, 그 도로가 어떤 형태로 건설돼야 하는지를 구체화하는 기업들이 있다. 필리핀 민다나오의 고속도로 설계에 참여한 유신은 한국 엔지니어링 기업들이 세계 인프라 시장에서 수행하는 또 하나의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
[미디어펜=박소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