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패권 경쟁의 다음 전장은 ‘돈’이다. GPU와 데이터센터, 전력망과 발전소까지 AI 인프라 구축에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다. 현금부자 빅테크는 자체 자금으로 투자하지만 신생 AI 기업들은 회사채·사모대출·프로젝트금융을 통해 천문학적인 돈을 끌어오고 있다. 이제 GPU와 데이터센터, 미래 컴퓨팅 계약까지 금융자산으로 변하는 시대다. 하지만 고금리가 길어질수록 누가 더 싸게, 더 오래 자본을 조달하느냐가 AI 산업의 승패를 가를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미디어펜은 [AI 자본전쟁]을 통해 AI가 만들어낸 새로운 자본시장의 구조와 월가의 돈 흐름, 그 위험과 기회, 한국 반도체 산업에 미칠 영향을 추적한다. [편집자주]
[미디어펜=이원우 기자] AI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돈을 끌어당기는 산업 가운데 하나다. 엔비디아의 GPU를 사고 데이터센터를 짓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수만~수십만개의 AI 가속기를 돌리기 위해서는 발전소와 송전망, 변전소, 냉각설비, 광통신망, 토지까지 함께 확보해야 한다.
문제는 이 모든 투자가 거의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아마존, 알파벳, 메타 등 글로벌 빅테크뿐 아니라 AI 클라우드 업체와 데이터센터 개발사, 전력회사까지 앞다퉈 자본을 끌어오고 있다. 여기에 각국 정부도 국방·에너지·산업정책을 위해 대규모 국채를 발행하고 있다.
AI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돈을 끌어당기는 산업 가운데 하나다. 엔비디아의 GPU를 사고 데이터센터를 짓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수만~수십만개의 AI 가속기를 돌리기 위해서는 발전소와 송전망, 변전소, 냉각설비, 광통신망, 토지까지 함께 확보해야 한다./이미지 생성=ChapGPT
AI가 생산성을 높여 장기적으로 물가와 비용을 낮춰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AI 투자가 폭발하는 과정에서는 오히려 돈을 빌리려는 수요가 급증하면서 금리를 높은 수준에 붙잡아두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중앙은행들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 연차총회에 참석한 주요 중앙은행 관계자들은 AI 투자가 생산성 향상의 효과를 내기 전에 투자와 자금 수요를 먼저 크게 늘리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ECB와 영국·일본 중앙은행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AI 투자와 정부 차입 확대가 중립금리와 장기금리를 높일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다.
▲AI데이터센터는 ‘GPU 공장’이 아니다…전력·냉각·송전망까지 돈 먹는 하마
AI투자라고 하면 가장 먼저 엔비디아 GPU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실제 데이터센터 투자비에서 GPU는 시작일 뿐이다.
수만개의 고성능 GPU를 설치하면 이를 담을 데이터센터가 필요하다. 서버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열을 식힐 냉각설비를 깔고, 전기를 공급할 변전소와 송전선도 확보해야 한다. 전력망 접속이 어렵다면 발전설비나 장기 전력구매계약(PPA)까지 필요하다.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반도체 산업 하나에서 끝나지 않고 전력·건설·부동산·통신·금융 산업 전체로 번지는 이유다.
최근 영국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가 AI 데이터센터 업체 엔스케일(Nscale)과 추진하던 일부 컴퓨팅 임대 계획에서 빠진 것으로 전해졌다. 예정 부지가 충분한 전력을 공급받는 시점이 2030년 이후로 늦어질 가능성이 핵심 배경 가운데 하나로 거론됐다.
돈만 있다고 데이터센터를 지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전력·부지·반도체를 모두 확보하려면 결국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AI 인프라 경쟁은 기술 경쟁에서 ‘누가 더 많은 자본을 더 오랫동안 확보하느냐’는 자본전쟁으로 성격이 바뀌고 있다.
▲기업도 정부도 돈이 필요하다…AI가 불붙인 ‘글로벌 자금 쟁탈전’
AI 기업만 돈을 빌리는 것도 아니다. 미국과 유럽 각국은 국방비와 에너지 안보, 첨단 제조업 육성을 위해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고 있다. 중동과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에너지·방산 투자도 확대됐다.
한쪽에서는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AI·전력·데이터센터 기업들이 회사채와 대출, 사모신용을 통해 돈을 끌어모으는 상황이다.
결국 금융시장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단순하다. 돈을 빌리려는 수요가 돈을 빌려주려는 공급보다 빠르게 증가하면 돈의 가격, 즉 금리에 상승 압력이 생긴다.
ECB 정책위원인 마르틴스 카작스 라트비아 중앙은행 총재는 최근 이런 상황을 사실상 세계적인 ‘자금을 둘러싼 경쟁’으로 설명했다. 중앙은행 관계자들이 AI를 단순한 생산성 혁신만이 아니라 앞으로 금리 수준을 좌우할 변수로 보기 시작한 이유다.
과거 AI 논쟁의 중심은 “AI가 얼마나 많은 일자리를 대체할 것인가” 또는 “생산성을 얼마나 높일 것인가”였다.
그러나 자본시장에서는 다른 질문이 등장하고 있다. AI 투자로 필요한 돈이 너무 많아지면 장기적으로 금리 자체가 과거보다 높은 수준에서 유지되는 것 아닌가.
AI가 만들어낼 생산성 향상은 몇 년 뒤 나타날 수 있지만,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에 들어가는 투자비는 지금 당장 조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AI가 AI의 금리를 올린다…‘성공의 역설’ 시작됐나
여기에 AI 산업의 역설이 있다. AI 투자가 빠르게 늘어날수록 더 많은 GPU와 데이터센터, 전력망이 필요하다. 그러면 기업이 조달해야 할 자금도 커진다.
AI 투자 확대→자금 수요 증가→채권·대출 확대→자본비용 상승→AI 프로젝트 수익성 악화라는 고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AI 관련 기업의 회사채와 데이터센터 금융이 주목받는 이유다.
특히 모든 AI 기업이 같은 조건으로 돈을 빌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알파벳·아마존·메타처럼 막대한 영업현금흐름을 보유한 기업은 높은 금리를 상대적으로 견디기 쉽다.
반면 자체 현금보다 차입에 크게 의존해 데이터센터를 확장하는 AI 클라우드 기업에게 금리 상승은 곧 사업비용 상승이다.
로이터는 골드만삭스 자료를 인용해 올해 미국 레버리지 금융시장에서 AI 관련 차입 규모가 이미 880억달러에 달했다고 전했다. 투자자들은 신용등급이 높은 기업의 채권은 여전히 받아들이지만, 미래 수익성이 충분히 증명되지 않은 AI 차입자에게는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고 있다.
최근 AI 데이터센터 기업들의 자금조달 일정이 연기되거나 더 높은 금융비용을 감수해야 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시장금리 상승과 신용스프레드 확대가 AI 투자 붐의 새로운 시험대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따라 AI 산업의 다음 병목은 GPU 생산량만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돈을 얼마에 빌릴 수 있느냐’가 새로운 병목이 될 수 있다. AI가 성공해 투자가 늘어날수록 돈이 더 필요하고, 돈을 더 많이 필요로 할수록 자본비용이 올라가 다시 AI 투자를 압박하는 ‘성공의 역설’이다. AI 패권 경쟁의 다음 승부처가 기술에서 자본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