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가진 양반 7% 불과·500년 경제성장률 0%...위인 많아도 백성은 피폐
   
▲ 김규태 재산권센터 간사

우리가 지금 발붙이고 사는 나라는 대한민국이다. 독립정신을 이어받은 한민족은 1945년 광복 후 1948년 나라를 세웠다. 그 나라는 민주공화국이며,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대한민국 이전의 나라는 조선이다. 조선은 1392년 건국되어 1897년까지 505년간 존속했다. 이후는 약소국으로 전락해 열강의 침탈을 받았던 대한제국의 시대다.

조선은 500년이 넘는 역사만큼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조선시대의 위인 중, 필자가 개인적으로 최고라 치는 인물은 다섯이다. 이들은 조선의 빛이요, 조선을 대표했던 얼굴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빛, 왕과 신하들

(1) 먼저 태종 이방원이다. 정몽주를 죽이고 고비마다 무력과 지혜로 아버지를 도와 조선을 창건하는데 힘을 쓴 일등공신이다. 외척을 일소하고 신료들의 사병을 혁파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국방의 기틀을 잡음으로써 나라 안의 우환을 없앴다. 나라 밖으로도 매우 실리적인 입장을 견지하여 후일 명나라와의 외교로 상당한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

태종 이방원은 이 외에도 많은 업적이 있지만, 후일 사가들이 평하는 이방원 ‘최고의 업적’은 양녕이 아닌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은 것이다. 이방원은 세종대왕이 내치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모든 오욕과 악평을 뒤집어쓰고 피웅덩이를 저벅저벅 걸어간 인물이었다. 가히 조선 최고의 ‘강철 멘탈’ 보유자라고 칭할 수 있다.

   
▲ 태종 이방원 

(2) 두 번째는 우리나라 지폐 1만원권의 주인공, 세종 이도다. 원래 충년대군 이도는 큰형이었던 양녕대군 보다 여러모로 부족했다. 하지만 끈기와 인내, 노력과 성정을 다하여 한반도 최고의 성군으로 거듭났다.

국방, 조세, 토지, 문화, 기술 등 손을 댄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제위 32년간 무수히 많은 업적을 쌓았다. 그 중에서도 훈민정음 한글의 창제와 반포는 5백년 뒤에서야 빛을 발한 세종 이도 최고의 역작이다. 21세기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대왕’이라 불리우는 2인 중 한명이다(또 다른 이는 광개토대왕).

(3) 세 번째는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다. 이성계는 고려말기 최고의 장수다. 고구려 주몽 이후 최고의 명궁으로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성계는 동북방면 자그마한 군벌로 시작했지만, 거듭된 승전으로 전공을 쌓아 고려시대 말기 최고의 무장으로 올라섰다. 이성계는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 세력을 받아들여 역성혁명을 이루고 조선을 세웠다. 수도를 개성에서 지금의 서울(한양)로 옮겼다.

(4) 조선의 빛을 대변하는 네 번째 인물은 정도전이다. 정도전은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이자 최고권력자다. 조선 성리학 이념과 모든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왕조 사상/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대정치가다. ‘경국대전’을 편찬해 조선 법제도의 틀까지 일구어낸 최고의 법률가이기도 하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지시를 받아 서울(한양) 천도를 주도했다. 한양 시내(지금의 서울 사대문 안) 전각과 거리의 이름은 물론이거니와 궁궐과 종묘의 위치, 궁전 궁문 칭호까지 정한 인물이다.

   
▲ 여의도공원 한복판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조선시대 위인이다. /사진=미디어펜 

(5) 왜 안 나오나 했다. 2014년 최고의 흥행성적을 기록한 영화 <명량>의 주인공, 이순신이다. 이순신 장군은 아직도 세계 해군사에 길이 남는 명장이다. 지피지기-백전백승-거북선-백의종군-임전무퇴의 상징이다. 이순신을 만나기 전까지 승리만을 거듭했던 왜군 장수들 모두에게 제대로 물을 먹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전공이 너무나 높았던 나머지 선조의 질투, 미움을 샀다. 이로 인해 오히려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설까지 나도는 희대의 영웅이다. 이순신이 없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임진왜란 당대에 끝났을지도 모른다.

조선의 그림자, 빛에 가려진 현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성씨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600년 전 조선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성씨는 양반만이 갖고 있었다. 조선 전기에 성씨를 가진 양반은 전체 백성 중 7%였다. 나머지 남녀노소는 모두 갑돌이, 방자, 꽃순이 등 이름으로만 불렸다.

후일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급속도로 늘어나게 된 것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군역을 피하기 위한 양반첩의 남발과 돈을 주고 양반 성씨 및 족보를 샀던 백성들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경제성장률은 0%였다. 지구상에서 가장 못 살고, 거지가 많았으며, 부패한 관료 아전들의 횡포가 극심했던 봉건왕조였다. 중인이든 상인이든 백성들은 재산을 제대로 모을 수 없었다. 재산을 모을라치면 아전들이 이유도 모른 채 잡아가둬 놓고 주리를 틀며 곤장을 때리기도 했다.

사극드라마에서 “니 죄를 니가 알렸다” 라는 대사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모아놓은 재산 전부나 일부를 사또나 아전에게 바쳐야 비로소 풀려나곤 했다. 조선은 재산권이 제대로 보장되어 있지 않은 나라였다.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왕과 양반들은 공허한 성리학, 주자학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소중화주의에 매몰돼 실사구시와 서양문물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결국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어도 일본 청나라 러시아 등 주변국 열강 모두에게 숱한 굴욕을 당했고, 서양문물을 일찍이 받아들여 나라 발전에 힘쓴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 조선의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못난 왕조로 맺었다.

사실 세종대왕도 최고의 성군 운운하지만, 당시 노비를 전체 백성의 절반으로 확대했다. 자유, 인권, 민주주의라는 지금의 기준으로 세종대왕을 바라본다면 성군이 아닌 암군이었다 말할 수도 있다.

   
▲ 정약용. /사진=문화체육관광부 표준영정 전시실 

조선 후기의 위인으로 손꼽히는 정약용은 조선 최고의 실학자로 평가받는다. 정약용은 목민심서라는 책으로 더욱 유명하다. 그런데 목민심서의 기본적인 인식은 백성을 가축처럼 여긴다는 점이다. 가축을 기르듯 백성을 기른다는 의미다. 조선의 성리학 물결 속에서 작게나마 실사구시를 추구했던 정약용 조차도 양반이 아닌 백성을 가축으로 여겼다.

베트남의 국부, 베트남 공산주의의 대부인 호치민이 목민심서를 품에 안고서 즐겨 봤다는 것은 농담이 아니다. 백성을 가축으로 생각하는 것은 공산주의 지배계층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이다.

정약용이 살던 조선시대, 유럽은 이미 천부인권설에 입각하여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이 보호받기 시작했다.

이제는 조선에 대한 맹목적인 평가를 버려야 한다. 조선의 빛인 위인들에 대한 박수는 보내되, 조선의 그림자였던 과거의 현실에 대해 보다 차갑게 실사구시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조선시대 500년간 백성의 인권과 자유는 얼마나 신장되었는가, 백성의 재산권은 어떻게 보장되었는가, 조선시대의 시장경제는 어떠했는가, 백성들의 인구와 수명은 얼마나 늘었을까, 백성들 삶의 질은 어땠을까.

앞으로 우리가 조선시대에 대해 유념하고 바라보아야 할 새로운 시각이다. /김규태 재산권센터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