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공판도 연기…자수·인권보호 명분에 형량 축소 의지까지
   
▲ 이원우 기자

남자의 표정은 참담했다. 여자는 이미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상태였다.

전라남도 장성군에 위치한 한 식당에서 만난 52세 동갑내기 부부의 눈동자는 그저 끊임없이 절망을 응시하고 있는 듯했다. 비슷한 길이의 인생 속에서 많은 것을 공유해왔지만 이번만큼은 이 비탄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지 눈치조차 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들은 지난 5월 하순 전국을 충격에 빠뜨린 일명 ‘여자친구 시멘트 암매장 살인사건’의 피해자인 故 김선정 씨의 부모다.

사건의 경위는 언론에 수차례 보도된 그대로다. 중학생 시절 유학길에 오른 선정 씨는 미국 사관고등학교와 뉴욕주 올바니 뉴욕주립대(SUNY)를 조기 졸업한 재원이었다. 두 동생의 학비 마련을 위해 귀국해 부산의 영어학원에 강사로 입사한 그녀는 서울에서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려다 실패한 후 부산으로 온 이 모(25)씨를 만나 교제하게 된다.

집착이 심하고 수시로 데이트 폭력을 휘둘렀던 이 씨에게 고통 받던 선정 씨는 결국 2015년 5월 2일 이별을 통보했다. 분노한 이 씨는 이 날 선정 씨를 목 졸라 살해했다. 며칠 동안 시신 처리방안을 고민한 가해자는 결국 ‘시멘트 암매장’이라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인터넷으로 상세한 절차를 알아본 이 씨는 시신을 여행용 캐리어에 넣은 뒤 충북 제천의 한 야산에 암매장했다.

피해자 부모 “대한민국 법, 가해자 인권에 더 관대”

심지어 이 씨는 암매장 이후 선정 씨의 동생과 카카오톡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했다(5월 4일). 평소 즐겨 쓰던 말투나 이모티콘을 똑같이 사용하며 웃음 짓는 선정 씨의 말투가 이상하다고는 가족들조차 눈치를 채지 못했다. 결국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아버지가 선정 씨의 전화로 지속적인 연락을 시도하자 압박을 느낀 범인 이 씨는 5월 18일, 범행 일체를 자수한 뒤 구속됐다.

자수 직전 이 씨는 손목을 그으며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다만 부상 정도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 씨는 119에 “빨리 와 달라”는 신고전화를 한 차례 더 걸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 사망한 故 김선정 씨의 생전 모습

현재 상황에서 피해자 부모들이 가장 통탄하는 것은 가해자의 인권에 오히려 더 섬세한 것 같은 일련의 분위기다. 피해자의 이름과 얼굴은 물론 가족들의 신상까지 전부 밝혀진 것과 대조적으로 가해자와 그 일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피해자의 유족들이 식당 영업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음은 물론이다.

시신을 시멘트로 암매장하는 극악무도한 범죄수법에도 불구하고 재판부가 가해자에 온정적인 형량을 선고할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자수를 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지난 2일은 이 사건의 첫 공판일이었지만 재판은 진행되지 않았다. 범인 이 씨는 국선변호사를 해임하고 법무법인의 변호사를 선임했다. 형량을 줄여보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선정 씨의 동생은 2일 밤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더 건강해 보이는 살인범의 모습을 보니 정말 화가 치밀고 눈물이 흐르더군요. (…) 저희 가족은 다시 한 번 가슴이 찢어지네요”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눈물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일본은 사형 ‘집행’ … 가해자 이 씨의 형량은?

최근 일본에서는 딸을 잃은 한 어머니 이소가이 후미코(63)의 애끓는 사연이 화제가 됐다. 2007년 8월 3인조 강도에게 납치된 31세 여성이 6만 2천 엔의 현금을 빼앗기고 둔기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 발생했다. 딸을 잃은 이소가이 씨는 법원의 사형 판결과 집행을 이끌어내기 위해 모든 공판에 참여하고 최대한 많은 기자회견과 인터뷰를 자처하며 ‘범인들을 강력 처벌해 달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결국 사건 8년 만에 범인 중 1명이 지난 6월 25일 사형 집행됐다. 일본 언론은 물론 한국 언론까지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고 평가했다. 이소가이 여사는 무기징역형을 받은 범인 2명에 대해서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소가이 씨가 8년 동안 그토록 헌신적인 활동을 벌인 것은 다름 아닌 ‘여론’을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전 세계적으로 사형제도에 대해서는 비판론이 우세한 실정이다. 한국의 경우 날이 갈수록 살인사건의 범행수법이 잔인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97년 이후 단 한 번도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있다. 그나마 여론의 관심이라도 받아야 ‘현실적 최고형’인 무기징역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다.

   
▲ 선정 씨의 동생은 2일 밤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더 건강해 보이는 살인범의 모습을 보니 정말 화가 치밀고 눈물이 흐르더군요. 저희 가족은 다시 한 번 가슴이 찢어지네요”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시멘트 암매장 살인사건의 경우 설상가상으로 국민들의 관심마저 충분히 받지 못한 측면이 많다. 메르스 파동은 이 잔악무도한 사건에 대한 관심을 상당부분 희석시켜 버렸다. 그 이후로도 계속 이어지는 충격적인 사건들 속에서 선정 씨의 죽음은 어느덧 과거의 일로 잊힐 조짐을 보이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단 하나밖에 없는 맏딸이고 언니이자 누나였던 선정 씨의 죽음이 이렇게 빨리 묻혀버려도 되는 것일까. 한 여자의 인생은 물론 한 가정의 평화를 산산조각 내버린 범인은 앞으로도 ‘인권의 이름으로’ 계속 건강해져도 되는 것일까. 수많은 물음표들의 나열 속에서 첫 공판 날짜는 오는 23일로 재조정됐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