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할 수 없는 국제질서…이승만 리더십으로 문명사적 전환 이뤄
우리나라는 해양 교통로를 활용하여 활발하게 세계 여러나라와 교역하면서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다. 해양문명의 필수조건인 개방과 통상 등 자유시장경제, 외국과의 교류와 민주주의가 한반도에 꽃피운 것이다. 백년 전 이 땅에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젊은 시절부터 한반도의 개방과 통상을 외치던 선각자 이승만이 있었다.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한반도를 대륙문명에서 해양문명으로 전환하기 위한 방향을 제시했던 우남 이승만. 자유경제원은 지난 3일 ‘이승만은 산타였다’ 연속세미나를 열고 대륙문명에서 해양문명으로의 대전환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이날 패널로 나선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는 “불굴의 신념으로 대한민국을 해양세력의 일원으로 끌고 간 사람이 이승만”이라며 “이승만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대한민국을 해양세력으로 견인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적·물적·국제적 기반을 다져 놓았다”고 밝혔다.

배 기자는 “다만 38선 이남에 미군이 진주하고, 미국이 자신의 정치‧경제‧사회체제를 이식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운명은 어느 정도 결정되었다”며 “우리 힘으로 거부할 수 없는 국제질서, 그로 인해 미군정 체제가 존재했다는 배경을 인정하자”고 지적했다. 배 기자는 “이승만의 걸출한 의지와 역량, 리더십이 작용하여 대한민국이 대륙문명에서 해양문명으로의 일대 문명사적 전환을 이룩하게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강조했다. 아래 글은 배진영 기자의 토론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한국의 해양세력 편입을 가능케 한 국제적 조건과 그에 대한 이승만의 인식과 역할

배재학당에서 서양문물을 처음 접한 이래 자주독립, ‘문명개화’,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민주공화국 건설, 그리고 세계 상등국 반열에 드는 것은 이승만의 꿈이었다. 그에게 자주독립은 대륙세력인 중국(청나라), 러시아와의 단절을 의미했다. 문명개화는 구미(歐美)해양문명권으로의 편입을 뜻했다. 기독교는 해양문명으로 들어가기 위한 수단이었다. 민주공화국 건설, 세계 상등국 진입은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이승만은 평생 이 이상(理想)을 추구했고 결국은 그 꿈을 이루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이승만이 그토록 부러워했던 세계 상등국들과 정치‧경제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아마 저 세상에서 이승만은 후손들이 이룩한 성취를 대견해하고 있을 것이다.

발표문의 내용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토론자가 여기서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대륙문명에서 해양문명으로의 문명사적 전환은 한 사람의 노력과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당시의 국제정세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문명전환과 관련해 이승만의 업적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토론자의 문제인식이다.

청년 이승만의 對日 인식

한반도 혹은 대한민국이 대륙문명으로부터 일탈은 두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1894~1910년 청일전쟁-러일전쟁-일제의 한반도 강점으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우리로서는 말하기 껄끄럽지만,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짧게는 500년, 길게는 1300년을 이어져온 중국과의 탯줄이 끊어졌다. 물론 이것은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일본제국주의의 술책이었다. 

일본은 중국과 조선의 탯줄을 끊어 놓은 후, 조선에서 세력을 확장하려 했지만, 대륙세력인 러시아가 치고 들어오는 바람에 일시 기회를 놓쳤다. 그러다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러시아와의 줄도 끊어졌다. 그리고 1910년 조선은 일제에 병탄된다.

   
▲ 국제질서 속에서 하나의 체제 속으로 편입된다고 해서 그것이 100%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지도자, 걸출한 지도자의 의지와 역량이 작용한다. 한국은 이승만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일본은 영국‧미국 등 해양세력과 손을 잡은 신흥제국주의세력이었다. 조선은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해양세력권으로 편입된 것이다. 이후 일본을 통해 조선에는 서구 해양세력이 만들어낸 여러 정치‧경제‧사회 시스템이 이식되었다. 그것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논하는 것이 ‘식민지근대화론’을 둘러싼 논란이다. 

청년 이승만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발표자의 논문은 청년 이승만이 미국 등의 기독교 문명 내지 해양문명을 어떻게 소화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분석하고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일제에 의해 조선이 해양문명으로 강제편입되는 과정을 청년 이승만이 어떻게 인식했는가 하는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청년 이승만의 일본에 대한 인식은 언뜻 보면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 <청일전기>를 비롯한 이승만의 초기 저술이나 논설을 보면, 청나라, 러시아에 대해서는 증오에 가까운 적대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반면에 미국은 물론 일본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시각을 발견할 수 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본격적인 국권침탈을 자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승만은 당시 많은 개화파들처럼 일본을 청나라, 러시아 같은 퇴행적인 대륙세력에 맞서는 해양세력의 대표주자이자 조선이 문명개화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줄 조력자로 인식하고 있었던 듯 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종을 친일정권의 수중에서 빼내려던 춘생문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제국주의가 마각을 드러낸 후 이승만은 서둘러 <독립정신>을 저술해 국민의 각성을 촉구했다. 그리고 한규설-민영환의 뜻에 따라 도미(渡美)항일외교에 나선다. 이후 이승만은 불굴의 의지로 항일투쟁을 전개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근대 한반도가 경험한 제1차 문명사적 전환 시기, 초기 이승만의 열강에 대한 인식, 특히 일본에 대한 인식에 대한 언급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이는 이승만의 사상의 궤적을 추적한다는 의미에서 뿐 아니라, 훗날 이승만의 외교독립노선, 해방 후 대통령 이승만의 대일-대미정책과도 이어진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고 본다.  

   
▲ 이승만은 평생 이 이상(理想)을 추구했고 결국은 그 꿈을 이루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이승만이 그토록 부러워했던 세계 상등국들과 정치‧경제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아마 저 세상에서 이승만은 후손들이 이룩한 성취를 대견해하고 있을 것이다./자료사진=연합뉴스


체제의 선택 - 환경과 개인

한국이 대륙과 두 번째로 인연을 끊게 된 것은 일제 패망 이후 국토분단과 냉전 때문이다. 38선으로 국토가 분단되고 남과 북에 미군정과 소련군정이 들어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냉전이 전개되면서 대한민국은 아시아 대륙 동쪽 끝에 매달린 반도가 아니라 ‘섬’이 되어 버렸다. 한국은 해양세력인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분단과 냉전을 거치면서 대륙문명과 완전히 절연하고 미국과 이어진 해양세력의 일원으로 확고하게 편입되었다. 

대한민국이 오늘날 해양세력의 일원이 된 것은 이러한 국제적 환경 때문인가? 아니면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혜안을 지닌 이승만이라는 불세출의 지도자의 역량 덕분인가? 

이승만으로 인해 대한민국이 대륙문명으로 이어진 줄을 끊어내고, 해양문명으로의 일대 문명사적 전환을 이룩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이 이룩한 정치‧경제발전의 기반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게 100% 이승만 덕분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하는 조심스러운 문제 제기를 해 본다.

38선 이남에 미군이 진주하고, 미국이 자신의 정치‧경제‧사회체제를 이식했다. 거기서 해방 후 남한(대한민국)의 운명은 50% 이상 결정되었다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이승만이나 우리 자신을 폄하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힘으로 거부할 수 없는 국제질서가 존재했다는 사실, 그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자는 것이다.

물론 국제질서 속에서 하나의 체제 속으로 편입된다고 해서 그것이 100%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지도자, 걸출한 지도자의 의지와 역량이 작용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나 버마(미얀마)는 영연방의 일원으로서 서방세계에 자연스럽게 편입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인도의 네루는 정치적으로 의회민주주의를 받아들였으면서도,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 국제정치적으로는 비동맹노선을 선택했다. 이후 1990년대까지 인도는 ‘비동맹’을 표방하면서도 국제정치적으로는 해양세력과 대치하는 입장에 섰다. 버마도 1962년 네윈의 쿠데타 이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와는 멀어졌다.

대표적인 해양세력인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도 서방-해양세력과 손잡을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수카르노 역시 반서구-비동맹노선을 견지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와 멀어졌다. 반면에 인도네시아와 이웃하고 있는 말레이시아는 의회민주주의, 시장경제 노선을 선택했다.

로디지아 백인정권에 맞선 게릴라 투쟁 끝에 정권을 잡은 짐바브웨의 무가베 대통령은 집권 초기만 해도 백인과의 화해노선, 서구와 유화노선을 취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반서방-반자본주의적 과격노선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리고 지금 나라는 엉망이 되었다.

이상의 사례들은 체제를 둘러싼 환경도 중요하지만, 지도자의 역할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 우리의 힘으로 거부할 수 없는 국제질서가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한다는 사실, 그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자료사진=연합뉴스


대한민국의 경우도 해방 후 미국이 해양문명국가의 질서를 이식하기 시작했지만, 무지한 백성들의 70% 이상이 막연하게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수립보다는 통일국가 수립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혼자서 ‘우리는 해양세력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불굴의 신념을 가지고 대한민국의 해양세력의 일원으로 끌고 간 사람이 이승만이었다. 

한번 해양세력으로 편입되었다고 하더라도, 체제를 지키지 못해 그간의 노고가 도루묵이 되는 경우도 있다. 1975년 4월30일 패망한 월남공화국(남베트남)의 경우가 그렇다. 월남공화국의 응오 딘 지엠(고 딘 디엠)은 호치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월맹)에 맞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표방한 월남공화국을 세웠다. 하지만 그는 농지개혁에 실패했고, 부정과 비리, 독재로 민심을 잃었으며, 미국과의 견고한 동맹을 만들어놓지 못했다. 결국 월남공화국은 건국 20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문명전환’과 관련해 이승만의 진정한 공로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이 해양세력의 일원이 된 것은 전적으로 대한민국의 자주적 선택의 결과는 아니었다. 다분히 분단과 냉전의 소산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한민국이 완전하게 해양세력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국가지도자가 다른 사람이었고, 그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혹은 그 이후의 지도자들이 체제를 지켜내지 못했다면, 대한민국은 해양세력으로부터 일탈해 다른 길을 걸을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오늘날 우리의 운명은 지금과는 크게 달라져 있을 것이다. 세계 자본주의 변방의 가난한 나라로 근근이 살아가거나, 북한에 흡수되어 김씨왕조의 신민으로 살아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승만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대한민국을 해양세력으로 견인하고, 대한민국이 해양세력의 일원으로 남을 수 있도록 제도적‧인적‧물적‧국제적 기반을 다져 놓았다. 그게 이승만의 업적이다.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러한 이승만의 업적은 십분 인정하되, 체제 선택의 과정에서 분단과 냉전이라는 국제적 조건이 미친 영향, 해외의 사례 등도 조금 살펴준다면 좀 더 좋은 논문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 결과적으로 우남 이승만은 한반도에서 한국과 미국간의 견고한 동맹을 만들어놓았다. 이는 주한미군-한미연합사-한미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존속되고 있다./자료사진=연합뉴스

[배진영]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