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전체에 대한 폄하…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의 항구적 위기
수많은 사회문제와 논쟁들은 처음부터 잘못된 용어의 사용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의도적인 부정적 프레임 씌우기, 용어의 정치화, 혹은 잘못된 것을 좋은 것으로 포장하는 용어들은 대중 선동을 위한 프로파간다로 악용되어 온지 오래다. 이에 자유경제원에서는 『용어전쟁』을 출판하고 ‘정명운동’을 제안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세금, 복지 분야에 이르기 까지 언어를 이용한 포퓰리즘 정치의 횡행을 막기 위해서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설명할 수 있는 바른 용어의 사용이 시급하다는 판단에서다. 자유경제원은 17일 리버티홀에서 도서 『용어전쟁』 출판기념 세미나를 열고 정명운동에 대한 취지를 밝혔다.

이날 열린 ‘『용어전쟁』 정명(正名)으로부터 정도(正道)가 시작된다’ 세미나에서 발제자로 나선 조우석 주필은 “한국사회 갈등은 이념, 지역, 세대 등 각 부문에서 심각한 수준”이라며 “이로 인해 헌법적 가치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항구적 위기 국면”이라고 지적했다. 조 주필은 “올바른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데서 오는 혼란이 구조적 요인의 하나로 지적돼왔다”며 “문화권력-지식권력을 구축한 좌파가 문화의 옷을 걸친 정치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조 주필은 “대안문화, 문화연구, 물질만능, 문화융성, 소외 등의 용어가 국내 좌파가 사용하는 단골용어”라며 “이러한 용어 대부분이 한국사회 전체를 폄하하거나 깎아 내리는 악마의 용어”라고 강조했다. 아래 글은 조우석 주필의 발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조우석 주필
문화의 옷을 입은 정치투쟁

국내외 좌파가 사용하는 단골용어 5 비판

재확인하는 바이지만 한국사회의 갈등은 이념, 지역, 세대 등 각 부문에서 심각한 수준이다. 헌법적 가치인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시장경제는 그래서 항구적 위기 국면인데, 올바른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데서 오는 혼란이 구조적 요인의 하나로 지적돼왔다. 문화예술 영역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이 부문에서만은 상황 자체가 은폐-엄폐돼왔다. 그러나 전복적 성찰 내지 전면적 반성을 이유로 문화예술 그리고 이웃 인문학은 좌파의 가치관과 용어를 서슴없이 받아들여 왔다. 게다가 좌파는 문화를 나름 잘 안다. 

그에 비해 우파는 문화를 정치-경제-사회영역의 옆 부문의 하나로 보는 산술적 접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건 탈코트 파슨즈 식의 구조기능주의적 접근은 시효만기가 된 지 오래다. 문화야말로 사회 모든 부문을 감싸 안는 전략적 요충지로 등장했는데, 이런 변화 기미를 선점해온 게 좌파다. 문화권력-지식권력을 구축한 것도 저들이다. 즉 문화의 옷을 걸친 정치투쟁이다. 

발제문에서는 사회혼란을 부르거나 문화예술 전체를 황폐화시키는 핵심 키워드 몇 몇 개를 추려 그게 과연 올바른 것인가를 점검해볼 것이다. 왜 그 중의 대부분이 한국사회 전체를 폄하하거나 깍아 내리는 악마의 용어인지도 규명하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 글은 시험 삼아 다섯 개의 용어를 골랐다.  '대안문화', '문화연구', '인간소외', '물신주의' 혹은 '물질만능주의' 그리고 '문화융성'이 그것이다. 1980년대 이후 세력을 얻어온 수상쩍은 용어 '민중', '민중문화운동', '리얼리즘', '창작의 자유', '보헤미아니즘(Bohemianism, 낭만주의)', ‘작가주의’, '생태주의' 등에 대한 정리는 훗날을 기약한다. 

1. 대안문화(alternative culture) → 반(反)자본주의 문화투쟁

지난 세기 중후반 이후 국내외 문화적 좌파를 사로잡았던 가장 대표적인 용어는 대안문화(alternative culture) 혹은 대항문화(counter culture)가 아닐까? 대항문화는 반문화(contra culture)와 동일한 개념이다. 후기 산업사회가 파괴한 인간성의 회복을 주안점으로 하는 제3의 문화라는 게 저들의 설명이다. 대안문화는 환경운동, 인권운동, 평화운동 혹은 여성운동 등으로 빠르게 가지를 치고 있다.

대안문화-대항문화는 문학의 비트(Beat)세대, 록 음악, 히피문화 등에서 보듯 사회 주류에 편입되는 걸 거부하는 가치체계와 라이프스타일을  통칭하기도 한다. 이런 변화된 상황에서 우파는 저들의 복선(伏線)을 채 파악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일테면 반(反)도시 혹은 도시파괴의 철학을 바탕에 깐 서울시장 박원순의 성미산 마을공동체운동 같은 것도 대안문화의 하나다. 대안문화를 표방한 움직임은 그만큼 현실적 문제다.

현대사에서 대안문화는 뿌리가 깊다. 1970년대 통기타에 청바지를 상징으로 했던 청년문화도 박정희의 개발연대에 대한 심정적 저항을 전제로 한 대항문화 혹은 하위문화의 하나였다. 그게 문화계로 번지면서 민중문화운동으로 발전했다. 1980년대 중반 역사학-정치학-철학-사회학을 포함한 거의 모든 인문사회과학이 이른바 '학술운동'이란 이름 아래 좌파 패러다임을 도입했던 것도 기존의 지식정보 구조를 바꾸려는 대안문화의 하나다. 그런 구조는 지금도 문학판과 영화판에서 은밀하게, 노골적으로 작동 중이다.

   
▲ 반(反)대한민국-친북 성향을 포함한 좌파적 가치는 지식정보는 물론 문화 영역에서도 이미 헤게모니를 구축했다. 사진은 지난 1월 17일 성공회대 피츠버그홀에서 열린 ‘고(故) 신영복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 추모의 밤’ 행사./자료사진=연합뉴스


2. 문화연구(Cultural Studies) → 문화적 정치투쟁

이 용어는 국내에서는 영문학자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당초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는 1960년대 초 영국 신좌파인 레이몬드 윌리엄스가 문화를 보는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자는 뜻으로 제창했다. 즉 문화를 하부구조를 반영하는 상부구조로 간주하지 않고 일상을 포함한 총체적 삶의 방식을 문화로 보자는 제안이었다.(한국에서 레이몬드 윌리엄스를 소개한 것은 영문학자 백낙청이었다는 걸 기억해두자.) 

‘일상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는 명제는 이런 맥락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걸 계기로 문화가 고상한 예술이나 지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판단 아래 훨씬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영역인 광고산업 분석, 문화산업론, 대중사회론으로 뻗어갔다. 일테면 강내희(중앙대 교수)는 '리틀 백낙청'의 한 명인데, 그는 20년 넘게 좌파 문화잡지인 계간 <문화/과학>을 만들어오고 있으며, 문화연대 공동대표, 맑스코뮤날레 공동대표로 활동하며 그 방면을 탐구했다. 

그가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지하철에 대한 분석이다. 그의 눈에 지하철이라는 공공의 시설이 자본과 결탁한 나쁜 공간이 롯데월드였다. 대중이 편리하다고 느끼고 있지만, 음험한 대자본의 논리가 우리네 일상 속에서 무시로 관철되고 있다는 식의 반자본, 반도시의 좌파철학이다. 그럼 문화연구란 용어를 어떻게 바꿔야 할까? 그 용어는 학문 분과의 하나로 고착됐고, 일상의 용어로도 쓰인다. 이미 언어세계에서 시민권을 얻은 상태이지만, 상황과 문맥에 따라 ‘문화적 정치투쟁’이라는 말을 병기할 것을 제안한다. 

3. 소외 → 소외라는 가짜 신화

소외는 이미 너무도 일상용어가 됐지만, 결코 중립적 용어는 아니다. 마르크시즘의 경우도 물신주의와 소외론을 무기로 해서 계급투쟁론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 지적을 비판이론의 철학자 마르쿠제나 에리히 프롬이 번갈아가며 했다. 대중을 소외의 늪으로 내몬 것은 자본주의의 악덕 때문이라는 추상같은 언명이었다. 그러면 소외란 용어를 어떻게 대체할까? 문학을 포함한 미술, 영화 등에서 빈번하게 쓰이는 용어라서 대체용어를 제시하긴 거의 불가능하다. 임시방편으로 '이른바 소외'라는 식으로 접두사를 붙이는 것도 방법이다. 아니면 '소외라는 가짜 신화'라고 풀어서 써주는 것도 제안한다.

4. 물신(物神)주의 혹은 물질만능 → 재산증식 노력
 
'대안문화', '문화연구', '인간소외' 등의 용어에서 보이는 반문화의 충동은 서구 못지 않게 한국사회에서 널리 퍼져있다. 압축성장 과정을 거쳤던 한국사회이기 때문에 서구 못지않게 반자본주의 심리가 존재한다. 전형적인 사례가 작고한 개신교 지도자인 고(故) 강원용 목사의 다음 발언이다. 그의 자서전인 <빈 들에서:나의 삶, 한국현대사의 소용돌이>(1993년) 서문에 내비치는 말이다. 

“내가 살아온 한국의 80년은 계속 ‘빈 들’이었다. 이 빈 들은 성서에도 나오듯 ‘돌로 떡을 만들라’는 물질만능과 경제제일주의, 악마에 절하고라도 권력만 잡으면 된다는 권력숭배 사조,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비합리적이고 광신적인 기복종교에 의해 지배되는 공간이었다.”

요즘 유행어인 ‘헬조선’의 원조 쯤이 되는 증언이다. 한국사회를 악마의 집단으로 모는 극단의 언어 양산에 귀화 러시아인 박노자도 한 축을 맡고 있다. 박노자가 보기에 한국사회는 “서로를 잡아먹기를 탐하는 자본주의 지옥”에 다름 아니다.(박노자 지음 <당신들의 대한민국>) 한국사회의 발전을 백안시하거나 사시의 눈으로 보는 태도 역시 현실과 어긋난다. 하지만 지금도 대학가 논술고사에 물신주의 비판 어쩌구가 단골로 출제되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 임시방편으로 필자는 물신(物神)주의 혹은 물질만능이란 용어를  ‘재산증식 노력’으로 바꿔 쓸 것을 일단 제안한다.

   
▲ 한국에서 좌파식 사고는 편향이 아니지만 우파식 사고는 편향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림은 한겨레신문이 P&C정책개발원과 공동으로 한국의 여론주도층 52명을 상대로 정치적 성향을 조사해서 좌표에 표시한 결과다. 대부분의 국내 인사들(빨간색)이 좌파-자유주의로 쏠려 있다. 헌법적 가치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항구적 위기 국면이 맞다.


5. 문화융성 → 문화정상화
  
앞에서 따져본 네 개의 용어가 다분히 철학적인데 비해 마지막으로 다루는 문화융성이야말로 관변(官邊)에서 즐겨 쓰는 말이다. 이 말이 수상쩍은 이유는 좌파 문화권력에 대한 경계를 전혀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 3개의 하나인 문화융성이 그 대표적인데, 문화예술 영역에서 두드러지는 좌편향 현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읽어낼 수 없다. 2013년 출범한 대통령 직속 문화융성위원회가 존재감이 없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도 마찬가지다. 문화예술 스포츠 관광 등 소프트파워 전체를 관장하는 전략부처라서 이 정부 성공의 열쇠를 쥐고 있으면서도 지난 몇 년 동안 고식적인 상황 관리에 그치고 있다. 즉 문화융성이라는 용어에는 현 상황을 타개해야 할 의무가 있는 우파 정부가 제도권으로 자리 잡은 좌파 문화권력과 엉거주춤하게 타협 혹은 굴종을 하겠다는 태도가 어렵지 않게 읽힌다.  이에 필자는 ‘문화 융성’ 대신 ‘문화 정상화’로 바꿔 쓸 것을 제안한다. 이렇게 바꿀 경우 지금 문화권력과 지식권력에 무언가 문제가 있으며, 예산과 인적 자원을 가진 정부가 손을 대겠다는 의지를 확인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조우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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