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 변화요구 무참히 탄압…세도정치 질곡 바꾸지 않고 왕조 유지에만 몰두
식민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넘어

1. 구한말 유럽의 동아시아 진출과 조일관계(朝日關係)

19세기말 일본의 제국주의는 대륙진출을 위해 첫 단계로 정한론을 제기했다. 그 과정에서 유럽열강들과 연합하여 개항을 이룬 후 1894년 청일전쟁을 도발하고 동학농민군 토벌에 나섰다. 일본은 이 두 사건을 목적대로 이룬 뒤 한반도 내의 일본의 견제세력인 러시아를 밀어내기 위해 1904년 영국과 미국의 선박과 군함을 수입하고 영일외교를 활용하여 발틱함대를 선제공격해 첫번째 승리를 이룩했다. 

러시아와 강화조약을 맺기 직전인 1905년 7월에 일본 수상 가쓰라 타로(桂太郞)는 미국 육군장관 테프트를 도쿄에 초청해 이른 바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맺었다. 이 밀약의 내용은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들고, 일본은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어 영국과 동맹을 맺고, 일본은 영국의 인도 경영을 동의해 주는 대신 영국은 일본의 한국 식민지 경영을 묵인한다는 것이었다. 

이 밀약과 영일동맹은 비밀에 붙여져 당시 조선은 고종을 포함해 아무도 몰랐다. 이토 히로부미는 즉각 한국으로 건너와서 공작을 벌였다. 이토는 ‘동양평화와 한국의 안전을 위해 한일 두 나라는 친선과 협조를 강화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일본이 한국을 보호해야 하며 황실의 안녕과 존엄은 조금도 훼손하지 않는다’는 말로 고종과 대신들을 설득했다. 

이토는 대신들을 불러다 놓고 회유와 협박을 거듭해 마침내 ‘보호조약'을 체결했다. 우리 역사에서는 이를 강제로 체결되어 ’을사늑약‘이라 부른다. 이 조약에 따라 미국 공사관은 1주일 뒤 제일 먼저 서울주재공사관을 폐쇄했고 이어 다른 공사관도 문을 닫았으며 한편 한국의 해외 공사관도 철수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오백년 독립국은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한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났으며 애국지사들은 순국을 결행했다. 하지만 일제는 한국통감부를 설립해 외교권을 접수하고 난 뒤 연달아 행정을 맡아보고 경찰과 군대를 해산하고 헤이그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켰다. 

   
▲ 사진은 일제강점기(1910~1945) 대한제국 황실을 촬영한 것이다. 사진은 고종(高宗)의 둘째 아들이었던 영친왕(榮親王) 이은(李垠)과 그 부인인 이방자(李方子)를 중심으로 고종과 순종(純宗) 내외가 배치되어 있다. 고종은 오른쪽 상단에 위치해 있다./사진=대한민국 역사박물관 현대사아카이브


2. 신중해야 하는 고종과 민자영(민비)의 재평가 

간과하면 안 되는 사실은 구한말 조선의 정치지도자들의 “외교적 오판”이다. 당시의 조선왕조는 세도정치의 질곡을 바꾸기는커녕 왕조를 유지하는 정책에만 몰두했으며 국제사회의 변화와 태동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종과 민자영(민비)은 2가지 측면에서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를 저해한 인물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첫째, 고종은 내적 역량 강화보다 외교적 방법 (이이제이)로 위기를 피하려 했다. 이러한 고종의 대외정책이 초래한 것은 갑신정변-청일전쟁-을미사변 등의 외환뿐이었다. 둘째, 고종은 외세(일본군)의 힘을 빌려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반란)을 탄압함으로써 민중들의 자주적 근대화를 소멸시킨 인물이다.

당시의 갑오농민군은 조선사회를 변화시키는데 필요한 일정부분의 역량을 보유한 집단이었지만 내부의 변화요구를 무참하게 탄압한 인물이 바로 고종이었다. 그것도 청나라와 일본군의 힘을 빌려 내부의 도전을 진압했지만 자신들의 정권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 중에서 식민지정책의 모델로 영국형과 프랑스형이 있다. 영국형은 세계 여러 지역에 식민지를 두고는 현지에 영국현지에서 보낸 총독을 설치함으로써 총독은 현지의 종교적  문화를 훼손하지는 않았다. 또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토착엘리트 들에게 할양함으로써 영국의 식민지 경영은 경제적 제화획득의 수단이 컸으므로 정치-문화적 지배까지를 포함하는 프랑스와는 상당히 대조적 이였다. 

반면 프랑스는 북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베트남 등을 식민지로 경영하면서 식민지 대표를 프랑스 의회에 진출케 하고 프랑스의 언어와 풍속을 대입했다. 프랑스형은 영국형보다 자국화를 추구했던 것이다. 일본형 모델을 식민지 지배를 직접 겪은 한국인들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표면적으로는 자국화를 추구하며 “황국신민”을 만들었던 프랑스 모델과 비슷하지만 생산력이 전무 하다시피 했던 당시의 조선입장에서 부정적관계로만 보아야 할지 재평가가 필요한 시기로 보인다.

   
▲ 고종은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관찰사 자리는 10~20만냥이었고 수령 자리는 5만냥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다. 고종 어진./사진=국립중앙박물관

3. 식민지이후의 통치방식 (영-프-모델)

정치 · 경제사를 공부하다 보면 항상 궁금한 것이 인도(무굴제국) 같은 큰 나라가 어떻게 13/1 크기에도 못 미치는 영국에게 지배를 받았느냐 이다. 인구로 따져도 18세기말 무굴제국의 인구를 3억으로 가정했을 때 2천만도 안 되던 영국의 지배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 최소한 내 개인의 학창시절에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다. 그러면서 부연설명도 없이 서구의 착취문화로 곧바로 귀결된다. 참 이상하다. 그렇다면 그것을 시작부터 막지 못한 피지배자들은 얼마나 바보였을까? 역사는 망원경이 아닌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할 때가 있다.

무굴제국은 오늘날의 인도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네팔 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와 인적자원을 가진 나라였지만 사실상 지역별로 왕과 군벌, 독립된 행정조직, 지역별 토호들이 서로를 견제하며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사실상의 봉건체제였다. 제국의 명맥을 가지고 있던 시절에도 무굴제국은 끊임없는 내전과 각지의 반란을 제압해야 하는 부담을 감수해야했고 모양세만 제국 이었을 뿐 중앙왕조가 완벽한 통치시스템을 구축했던 시기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 표 1-1.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경영모델. 피지배 입장인 조선은 어느 쪽에 속할까? 학술적으로 명확한 정의가 가능한 문제일까?

내전과 반란을 거듭하다보면 지역의 영주와 왕들은 강한 연대세력을 찾기 마련이고, 이시기에 맞춰 유럽의 인도 진출이 본격화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쉽게 말해 유럽의 상사(商社)들은 인도의 내전에 적극 참여했고, 인도의 군벌과 왕들 역시 “경쟁적으로” 유럽세력과 연합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쟁사에서 한번쯤은 들어봤을 영국과 프랑스가 인도에서 맞붙었던 “플라시 전투 (1757)”가 그것이다. 

   
▲ 그림 5-4. 무굴제국 최대범위 : 오늘날의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네팔까지 포함되는 거대한 영토였으며, 여러 왕조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사실상의 봉건체제였다.

이러한 정세에 경제적 시각을 대입한다면 영국의 동인도회사와 다른 유럽 상사(商社)들 역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세력과 이합집산을 거듭했고, 군벌들과 왕들 또한 통상무역을 하고 있는 유럽과 손을 잡는 것이 자본축적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세력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잦은 내전의 결과는 마침내 1739년 페르시아-압샤르 왕조의 나디르 샤(칸)의 침공을 받은 후부터 사실상 제국의 위상은 사라지고 1785~1858년까지 “공식적으로” 동인도회사의 지배시기가 온다. 통치력을 상실한 무굴제국을 지켜봤던 지방의 실력자들은 동인도회사의 통치에 딱히 반감을 갖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동인도회사를 침략기지의 첨병으로 규정하기 이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역사적 사실들은 너무나도 많다. 무굴제국의 붕괴는 서구의 침탈보다 지역정세의 문제가 더 컸다. /임종화 경기대 무역학과 객원교수


(이 글은 자유경제원이 29일 주최한 '조선 망국, 교훈을 얻자' 토론회에서 패널로 나선 임종화 경기대 무역학과 객원교수가 발표한 토론문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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