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골적 반일·반미 정서에 스민 친중 정서…대한민국 정통성 부인
   
▲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덕혜옹주도 웃을 덕혜옹주 이야기

영화는 시작하기 전 친절하게 설명부터 해 준다. ‘이 영화는 사실에 기반 하여 만들어 졌습니다.’ 그러나 영화에서 ‘사실’은 덕혜옹주라는 ‘존재’ 하나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두려웠다. 혹시라도 덕혜옹주가 만주로 가서 말 타고 총 들고 싸우는 장면이 나올까봐.   

1. 사실史實 왜곡

고종은 흥선 대원군 하응의 2남으로 아명은 명복, 이름은 희(熙)다. 민치록의 딸 자영을 아내로 맞았지만 1895년 일본인들에게 잃고 적적하던 중 소주방 나인 복녕당(福寧堂 )양씨로부터 조선의 마지막 옹주인 덕혜를 얻었다. 그의 나이 환갑 때 벌어진 경사로 고종의 9남 4녀 중 성년이 될 때까지 생존한 3남 1녀 중 막내다. 

‘고종의 자녀 중 어른으로 성장한 이는 순종, 영친왕, 의친왕, 덕혜옹주 등 3남 1녀뿐이었다. 특히 덕혜옹주는 고종이 환갑이 되던 해에 얻은 고명딸로 고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영화에선 덕혜옹주가 기모노 입기를 거부했다고 나오지만 사실 어린 그녀는 일본에 반감이 없었다.

만 네 살 때부터 덕수궁에 설립한 유치원에서 일본인 교사에게서 배웠고, 일본인 가정교사가 있었으며, 소학교 2학년부터는 일본인 귀족 자제들이 다니는 일출소학교(日出小學校)로 편입했다. 상궁 김명길이 쓴 책 '낙선재 주변'에 이런 기록이 있다.

"덕혜옹주는 '게다'를 신고 '하오리(일본 의상)'를 걸치고 통학하셨다. 집에 돌아오셔선 학교에서 배운 노래라며 '호타루 찬가' 등을 부르시곤 했는데 그 모습이 일본 아이들과 똑같아 섬뜩했던 기억이 난다." 고종시대 연구자인 장영숙 상명대 교수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독립적이거나 주체적 자각이 발달할 수 없었던 상태였을 것"이라고 했다. - 조선일보/2016. 8. 19 -

이랬던 덕혜옹주가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을 시도하고 일본의 조선 어린이들을 위해 한글학교를 세우고 일본에 강제 징용된 조선 노동자들 앞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옵니다” 연설을 한다?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조현병이라는 정신적 종양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1)

아버지인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확신으로 일제에 반감을 품고 일본에서 반일 운동을 펼치는 것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녀의 발병은 그보다 한참  뒤의 일로 1931년 대마도 번주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결혼하기 직전이다(진단받은 병명은 조발성 치매증). 몰락한 번주와 멸망한 나라의 황녀는 외형상 궁합이 맞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던 부부였다. 열 넷이라는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끌려와 겪었던 스트레스 등으로 덕혜옹주의 정신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말을 잃었다. 말을 잃는 것은 강렬한 현실부정의 증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그녀를 나락으로 매다 꽂았다. 동경대 영문학과를 나온 당대의 엘리트이자 시인이기도 했던 다케유키는 그들의 결혼생활을 한 편의 시(詩)로 결산했다.    

(전략)
미쳤다 해도 성스러운 신의 딸이므로
그 안쓰러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혼을 잃어버린 사람의 병구완으로
잠시 잠깐에 불과한 내 삶도 이제 끝나가려 한다.

(중략)
빛바랠 줄 모르는 검은 눈동자.
언제나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것은 환상 속의 그림자.
현실 속의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네.
물어도 대답 없는 사람이여.

(중략)
아아, 신이여, 그리움의 처음과 끝을
그 손으로 주무르실 터인 바.
수많은 여자 가운데서
이 한사람을 안쓰럽게 여겨주실 수 없는지요.

내 아내는 말하지 않는 아내.
먹지도 않고 배설도 안 하는 아내.
밥도 짓지 않고 빨래도 안 하지만.
거역할 줄 모르는 마음이 착한 아내.

이 세상에 여자가 있을 만큼 있지만
그대가 아니면 사람도 없는 것처럼.
남편도 아이도 있을 텐데
현실에서도 꿈속에서도 나는 계속 찾아 헤맨다.
(하략)

   
▲ 영화 덕혜옹주는 실존인물 이름만을 내세운 가상의 역사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로는 2016년의 현실을 그들만의 주장(친중-반일-반미)으로 담았다./사진=영화 '덕혜옹주' 스틸컷


나중에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와의 결혼생활 25년을 “내 인생의 공백기”라고 표현했다. 아무런 의미 없이 무심한 세월 25년이 흘러가버렸다는 얘기다. 유일한 딸인 마사에(한국 이름 정혜)는 자살을 암시하는 유서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한 남자의 인생은 잘못된 결혼으로 엉망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몰락한 번주는 구(舊)체제청산으로 한 번 더 몰락하여 경제적으로까지 쪼들리게 된다. 결국 다케유키는 영친왕, 이방자 여사의 동의하에 아내와의 이혼을 결정한다. 

덕혜옹주는 정신병원에 들어가고 서울신문 김을한 기자의 도움을 받아 도일 50년 만인 1962년 귀국한다. 돌아왔을 때 순종효황후에게 큰절을 올렸다. 그러나 항렬 상 아랫사람들에게는 편안하게 절을 받았다. 그녀의 기억 아주 깊은 곳에는 공주로서의 자신이 남아있었던 것 같다. 한국을 방문한 다케유키는 덕혜옹주를 만나고 싶어 했다. 어쨌거나 부부였다. 그의 마음속에는 여자이고 아내이기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의 덕혜옹주에 대한 연민이 남아 있었다.

질긴 연(緣)이니 죽기 전에 얼굴이나 한 번 보자는 소망이었겠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한다. 일본으로 돌아간 다케유키는 덕혜옹주보다도 먼저 세상을 뜬다. 그가 남긴 글 중에는 덕혜옹주에게 전하는 짧은 글이 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아내에게는 남편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나는 낙선재에 오래 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2. 영화 속 덕혜옹주 외의 사실들

그나마 영화를 100% 픽션에서 구원해주는 것이 덕혜옹주의 조카들인 이건과 이우다. 덕혜옹주의 삶을 다룬 영화인데도 사실은 이건과 이우뿐이라니 더 답답해진다.     

“영화에는 덕혜옹주뿐 아니라 영친왕, 의친왕의 두 아들인 이건과 이우가 등장한다. 영친왕 이은(1897~1970)은 1907년 황태자에 책봉됐으나 바로 일본에 끌려간다.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받았으며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육군 중장까지 지냈다. 그는 상하이 망명을 시도한 사실이 없다. 영화에 등장하는 영친왕 망명 작전은 그의 이복형인 의친왕 이강(1877~1955)의 망명 기도 사건을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1919년 11월 의친왕은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탈출하려고 압록강 건너 안동(지금의 단동)까지 갔다가 일본 경찰에게 잡혔다. 의친왕 장남인 이건(1909~1991)은 일제가 의도한 대로 살았던 인물이다. 영화에서도 그가 "임시정부에 가봐야 여기만큼 우리를 대우해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일본에 유학해 일본 육군 장교가 되는 정통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일본인으로 귀화해 일본에서 삶을 마감했다. 영화에서 고수가 열연한 이우(1912~1945)는 의친왕 차남으로 일찍이 '얼짱 왕자'로 알려졌다. 황실 후예 중 드물게 민족의식이 강하고 일본의 조종에 따르지 않으려 했던 사람이다. 그의 일본인 동기생은 훗날 히로시마 지역 TV 프로그램에 나와 "(이우는) 무슨 일에서든 일본인을 앞서려고 노력했고 조선인이라는 의식이 강했다. 화가 나면 조선말을 써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우는 일본 황족과의 결혼을 거부하고 박영효(1861~1939)의 손녀인 박찬주와 결혼했다. 영화에선 이우가 독립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나오지만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 조선일보/2016. 8. 19 -

영친왕 이은은 귀비 엄씨의 소생으로 고종의 넷째 아들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이다(왕실 여성의 품계는 왕비, 빈, 귀인, 소의, 숙의의 순). 1907년 황태자에 책봉되었고 같은 해 12월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일본에 인질로 잡혀간다(당시 11세). 1910년 국권 상실로 순종이 폐위되자 왕세제로 격하되었으며 1920년 내선일체 정책에 의해 일본 왕족 나시모토의 맏딸인 마사코方子와 결혼한다(마사코는 히로히토 천황과는 6촌). 1926년 순종이 죽자 왕위 계승자가 되어 이왕이라 불린다. 1945년 해방으로 환국을 기대했지만 국교 단절 및 한국 정치의 벽에 부딪쳐 귀국이 좌절되고 황족 특권 상실로 재일 한국인으로 등록하여 일본에서 1963년까지 살다가 63년 11월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의 주선으로 국적을 회복하고 부인 이방자 여사와 함께 귀국한다. 실어증 등 질병으로 고생했으며 1970년 74세로 영면한다. 이방자 여사와의 사이에 진과 구 두 아들을 두었으나 진은 어려서 죽고 구는 2005년 사망했다(구의 골상이 아버지인 이은보다 히로히토와 닮아 별별 추측을 다  불러일으켰다). 

의친왕 이강은 고종의 셋째 아들로 귀인 장씨 소생으로 1877년 태어났다(영친왕보다 스무 살 위로 이는 일제가 만만히 다룰 수 없는 나이). 1900년 미국으로 유학했고 1905년 귀국한다. 항일독립투사들과 접촉하여 1919년 대동단의 핵심 인물이었던 전협, 최익환과 상해 임시 정부로 탈출 모의하였으나 실패한다.

만주 안동에서 붙잡혀 한국으로 송환. 여러 차례 도일을 강요받았으나 꿋꿋하게 버티면서 해방과 6.25를 서울에서 맞는다. 1955년 79세로 영면했고 슬하에 12남 9녀를 두었다(최소). 이강의 아들이 건과 우만 나오는 이유는 두 사람만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되었기 때문이고 건은 일본이름으로 개명하고 귀화했기 때문에 우를 적통으로 부르기도 한다. 

   
▲ 의친왕 이강./사진=자유경제원 '역사를 정직하게 보자, 덕혜옹주의 실상' 토론회 자료집

   
▲ 이건과 아내 마쓰다이라 요시코./사진=자유경제원 '역사를 정직하게 보자, 덕혜옹주의 실상' 토론회 자료집
   
▲ 이우. 실제로도 잘생겼다./사진=자유경제원 '역사를 정직하게 보자, 덕혜옹주의 실상' 토론회 자료집

의친왕의 아들 중 또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이 10남인 이석이다(비둘기집이라는 가요를 부른). 이석의 어머니인 홍정순은 창덕궁의 전화 교환원이었는데 의친왕이 그녀의 목소리를 좋아해 얼굴을 보러갔다가 13번째 후실로 삼는다. 당시 의친왕은 61세, 홍정순은 19세로 조선 최초의 폰팅으로 맺어진 인연이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5남매가 태어난다.

영화 속 묘사처럼 이우는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나름대로 저항을 했지만 삼엄한 감시에 둘러싸여 큰 활동을 하기는 어려웠고 조선군사령부에 배속되어 일본 제국 육군으로 복무해야 했다. 1945년 6월 일제는 그를 중좌로 진급시키고 일본으로 전출시킨다. 하필 간 곳이 히로시마로 1945년 8월 6일 부임지로 출근하는 도중 피폭되어 8월 7일 고열 끝에 사망한다. 

   
▲ 이석./사진=자유경제원 '역사를 정직하게 보자, 덕혜옹주의 실상' 토론회 자료집

정리하자면 고종에게는 성년을 맞은 자식이 넷으로 순종, 의친왕, 영친왕, 덕혜옹주(나이 순)이 있었으며 영친왕은 일본 여자와 결혼했고 의친왕은 박영효의 손녀와 결혼했다. 덕혜옹주는 쓰시마 번주와 결혼하여 1녀를 두었으나 실종되었다. 영친왕은 아들 둘을 얻었고 의친왕은 후실들에게서 21명의 자녀를 두었고 이 중 기개가 남달랐던 인물로 기억되는 것이 이우다. 

3. 영화 속 이데올로기적 왜곡 프리즘

왜 망해가는 왕실의 풍경을 이토록 집요하고 비감하게 그리려하는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결기 넘치게 망했다고 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이문열도 ‘장려했느니, 우리 그 낙일(落日)’이라는 단편에서 고종의 독립운동 지원을 유려하게 풀어내고 있지만 그것은 소설적인 상상력일 뿐이다.

그냥 그랬더라면 하는 아쉬움으로 작가는 소설의 문을 닫는다. 그러나 덕혜옹주는 다르다. 덕혜옹주에서 정말로 영화 감상을 불편하게 하는 건 역사적인 사실 왜곡이 아니다. 후반부 내러티브에 들어있는 현실적 이데올로기의 재현이다.

영화 속에서 이우는 상해 임시 정부로 망명을 기도한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항일 = 상해 = 중국의 공식으로 상해는 우리의 독립을 지원해주는 공간이다. 은근한 친중親中 정서가 영화 속에 보일락 말락 녹아들어있다면 반일 = 반미의 정서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영화 속 가상 악당 한택수(윤제문 분)는 해방이 되고 덕혜옹주가 조선으로 돌아가려하자 이를 제지하며 “세상이 또 바뀌었네”라며 이죽거린다. 그리고 곧이어 영어로 출국 심사를 받는다. 기개 넘치게 항일을 했던 왕족은 출국이 금지되고 한택수는 다시 지배자가 바뀐 나라로 그 지배자의 언어를 쓰면서 자연스럽게 진입하는 것이다.

이 장면 하나로 친일파가 친미파가 되어 항일 세력을 짓누르는 공식은 자연스럽게 완성된다. 상해/중국은 독립운동을 위해 떠나는 곳이다. 미국은 일본에 이어 한반도를 접수한 또 다른 외세다. 1950년대 할리우드에서 좌익 시나리오 작가들은 영화 전편에 걸쳐 이데올로기를 선전하지 않는다. 아주 짧게 윤곽만 살짝 드러내고 꼬리를 감춘다. 짧을수록 여운이 길게 남는다. 그들은 짧고 강렬하게 이데올로기를 전달한다.

그런 면에서 덕혜옹주는 제대로 성공을 거뒀다. 영화 ‘덕혜옹주’는 실존인물을 내세운 가상의 역사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는 2016년의 현실을 그들만의 주장으로 정확히 공략했다. 500만 명의 관객들이 무의식속에 그 주장을 담고 집으로 돌아갔다.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1)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 조현병(정신분열증)은 망상, 환청, 와해된 언어, 정서적 둔감 등의 증상과 더불어 사회적 기능에 장애를 일으킬 수도 있는 질환으로, 예후가 좋지 않고 만성적인 경과를 보여 환자나 가족들에게 상당한 고통을 주지만, 최근 약물 요법을 포함한 치료적 접근에 뚜렷한 진보가 있어 조기 진단과 치료에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한 질환이다.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조현병(調絃病)’이란 용어는 2011년에 정신분열병(정신분열증)이란 병명이 바뀐 것이다. 정신분열병(정신분열증)이란 병명이 사회적인 이질감과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편견을 없애기 위하여 개명된 것이다. 조현(調絃)이란 사전적인 의미로 현악기의 줄을 고르다는 뜻으로, 조현병 환자의 모습이 마치 현악기가 정상적으로 조율되지 못했을 때의 모습처럼 혼란스러운 상태를 보이는 것과 같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이 글은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가 8일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역사를 정직하게 보자, 덕혜옹주의 실상’에서 발표한 발제문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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