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44)-문장의 참과 거짓을 밝히는 논리적 규칙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 『명제에 관하여』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논리학은 말과 글의 명징한 사용에서 출발한다. 표현된 말과 글의 참과 거짓을 밝히고, 논리적 오류를 파악하는 데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 중요한 대상은 명제(命題)다. 명제는 한자 뜻풀이대로 '이름 붙여 적어 놓은 것'이다. 즉 명제는 생각한 바가 표출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것처럼 "말은 머리 안에서 일어난 바에 대한 상징물이나 표현물이다." 따라서 명제는 곧 말로 표현된 사람들의 느낌과 생각인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문장화된 이 명제들을 유형화하고, 각 문장들이 어떤 성질을 지니는지, 그 문장들은 어떻게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지를 <명제론(Peri hermeneias)>에서 상세히 분석하고 있다. 앞선 저서 <범주들>에 이어 저술된 이 책과 <변증론>, <분석론 전서>, <분석론 후서>, <소피스트적 논박> 등의 책을 통해 인류 최초의 논리학이 탄생했다.

논리학은 제 학문의 예비학문적 성격을 띤다. 즉 모든 학문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낱낱의 말과 문장의 의미, 문장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의미의 정확한 이해와 사용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오류 없는 단어와 명제만이 논리적일 수 있고, 규명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명징한 서술이 성립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걸맞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책에서 명제의 다양한 문법적·논리적 분석 예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먼저 명사와 형용사, 문장, 명제 등 기본 개념을 정의한다. 그는 명사와 문장은 합의에 의해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말소리라고 규정한다. 이는 플라톤의 대화편 <크라튈로스>에서 헤르모게네스가 주장하는 규약주의적 관점과 같다. 이는 모든 이름은 본래 각각의 본성에 맞게 자연적으로 있게 마련이라는 자연주의적 견해와 다른 셈이다.

그렇다면 모든 문장은 명제일까? 그렇지 않다. 참이나 거짓이 들어 있는 문장만이 명제가 된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희다', 또는 '소크라테스는 희지 않다'라는 문장은 어느 것은 참이거나 거짓일 것이므로 명제로 성립된다.  

이러한 명제는 단순 명제와 복합 명제로 나뉘며, 명제가 되는 문장의 유형도 여럿이다. 긍정문이 있고, 어떤 것을 부인하는 부정 명제도 있다. 보편적인 것들에 대해 보편적으로 서술하는 전칭(全稱) 명제도 있고, 개별자에 대해 서술하는 명제도 있다. 또 명제에는 반대 명제와 모순 명제도 있다. 이를테면 '모든 사람은 동물이다'라는 명제는 전칭 명제로써 긍정문이다. 하나의 긍정문에는 딱 하나의 부정문이 성립한다.

앞의 명제의 부정문은 '모든 사람은 동물이 아니다'가 되는데, 이 경우 둘 가운데 하나는 거짓일 것이다. 물론 이 때의 부정문은 거짓이다. "보편자에 대해 보편적으로 서술하는 모순 명제들에서는 반드시 둘 중 하나가 참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이어야 한다." 그러나 보편자에 대해서도 보편적으로 서술되지 않을 경우에는 항상 어느 한 쪽이 참이고, 다른 쪽이 거짓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희다'와  '(어떤) 사람은 희지 않다'는 동시에 참일 수 있다는 의미다.

앞으로 닥칠 있을지도 모를 일에 대한 모순되는 서술의 참과 거짓은 어떻게 판별할 수 있을까? 만약 어떤 이는 '내일 해전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다른 이는 '내일 해전이 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치자. 두 사람이 제기한 명제는 서로 반대이다. 그러면 누구의 말이 참이고, 누구의 말이 거짓일까?

이 경우 말하는 시점에서는 어느 것도 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즉 해전이 "있게 될 것도 아니고, 있게 되지 않을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필연성을 띠고 있다. 만약 ‘내일 해전이 있을 것이다’라는 명제가 참이라면 내일 해전이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또 그 반대 명제가 참일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해전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모든 맞놓인 긍정문과 부정문은 반드시 그 중 하나가 참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이라고 할 때, 어느 것도 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이와 같은 사태는 '논리적' 이치에 맞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모순되는 사태에 대한 해법을 이렇게 제시한다. 일단 아직 실현 상태에 있지 않고 가능성의 개념에 따라 서술되는 경우에는 "모든 것들이 다 필연적으로 있는 것도 생기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따라서 "어떤 것들은 그냥 벌어지는 대로이며 긍정문이 부정문보다 조금만큼도 더 참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 "내일 해전이 있게 되거나 아니면 있게 되지 않을 것이지만, 내일 해전이 반드시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일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반드시, 일어나거나 아니면 일어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이 사례가 갖는 관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순 명제의 쌍들에 대해, "모순 명제 쌍의 한쪽이 반드시 참이거나 거짓이어야 하지만, 이것이나 저것으로 (미리) 정해져 있지는 않고 그냥 벌어지는 대로 (둘 중 어느 하나가 언젠가)참이거나 거짓"이라고 설명한다.

한편 술어들이 아무 제약 없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복합 명제의 경우도 이치에 어긋나는 사례가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두 발 달린 동물 사람이다’라고 말한다면 두 가지의 술어가 결합된 명제다. 소크라테스는 동물인 동시에 두 발 달린 사람임에 틀림없다. 따로 따로도 참이고, 결합된 서술도 참이다. 그런데 각각이 참이라고 해서 둘을 합한 것도 참인 사례를 계속 확대하다보면 이치에 어긋나는 점들이 많이 생기게 될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때에는 복합 명제에 제시된 여러 서술이 같은 대상에 직접적으로 딸린 것인지 아닌지를 판별해야 할 것이다. '두 발 달림'과 '동물'이라는 속성은 이미 소크라테스에게 속해 있다. 이런 경우 개별자에 대해 둘 중 하나를 아무 제약 없이 말하는 것은 참이다. 즉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도 맞고, '소크라테스는 두 발 달린 동물이다'도 참일 것이다. 그러나 복합 명제 속에 모순을 함축하는 것들이 덧붙여진 것이 안에 들어 있다면, 그건 참이 아니라 거짓이다. 이를테면 '그는 죽은 사람이다'라고 서술한 복합 명제에서 '그는 죽었다'는 참이지만, '그는 사람이다'는 더 이상 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생존해 있을 때 사람일 수 있을 뿐, 사람의 시체는 더 이상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양상(樣相) 명제를 논리적으로 도출하고 그 모순 대립 관계에 대해서도 상술하고 있다. 즉 '…임은 가능하다'와 '…임은 가능하지 않다', 혹은 '허용된다'와 '허용되지 않는다'가 포함된 긍정문과 부정문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같은 대상에 대해 서로 모순되는 방식으로 맞놓인 표현들은 참일 수 없다. 이른바 '양상 논리' 분야이다.

<명제들>에서 분석한 다양한 규칙들은 문장의 논리적 모순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명제들의 사례를 보면 사물이나 대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말과 글로 표현할 때, 부지불식간에 얼마나 많은 오류와 논리적 모순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확인시켜 준다.

<명제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 가운데 어렵기로 이름난 책이다. 그는 문장의 종류별로 치밀하게 분류하고 자세하게 의미를 해석했다.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의 원고를 엮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내용들은 기원전 4세기에 아테네의 플라톤 학당 '아카데메이아', 혹은 뒤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직접 세운 학당 '뤼케이온'에서 강의되었을 것이다.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열강을 진지하게 경청했을 철학자들과 입문 학생들의 진지한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그들은 왜 이 난해한 논리학 강의를 들었을까? 말과 글의 명확하고 논리적인 사용법을 습득함으로써 당시 크게 유행하던 소피스트들의 궤변에 대응하려 하지 않았을까. 특히 그들은 논리학 수강을 통해 소피스트들이 전개하는 말과 글의 논리적 모순과 오류를 식별해 낼 수 있는 분석 능력 함양에 몰두했을 것 같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 추천도서: 『명제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진성 역주, 이제이북스(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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