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적 구조…부르주아라는 말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 최승노 자유경제원 부원장
가진 자의 특권추구는 자본주의 정신이 아니다

부르주아는 근대사회에서 귀족이나 성직자와 달리 새롭게 나온 중산계층에게 붙여진 말이다. 유산계급이라는 뜻이고 현대적으로 보면 자본가 또는 부자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좋은 뜻으로 쓰이기보다 가난한 계층과 대비해 부정적 이미지를 나타내는데 주로 쓰인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졸부, 재벌, 가진자, 금수저 등 비판적 의미를 가진 말들과 비슷하다.

가진자의 횡포(요즘은 흔히 갑질이라 부른다)는 과거 사회에서 심각했다. 왕과 귀족층, 교황 등 권력자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들은 특권을 통해 사람들을 착취하였다. 인류가 권력자들의 횡포에서 벗어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시스템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가진자의 기득권이 특권과 진입장벽의 부정적 행태로 나타나지 않도록 제어하는 방식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반면 사회주의는 기득권에 대한 시기심에 치우쳐 빼앗고 배분배하는 방식을 동원하다보니 오히려 더 큰 특권의 함정에 빠졌다.

개인의 자유와 법 앞의 평등

자유는 개인이 누려야 할 기본권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free’라는 말의 유래에서 알 수 있듯, 자유는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기사나 귀족들에 게만 허락된 특권에 해당됐다. 이러한 자유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질 수 있게 된 것은 17∼18세기 들어와서다. 자유주의 운동은 나라마다 다양하게 일어났다. 영국과 프랑스가 가장 앞섰다.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법 앞에 동일한 권리를 보장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법 앞에서는 누구라도 어떠한 특권이나 특혜를 받을 수 없으며,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오직 법에 의해, 법대로만 처벌받아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나 법 앞에서 평등하며, 어느 누구에게도 법적인 특권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누구에게든 경쟁을 통해 부자가 되거나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 도전할 수 있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해 실력을 인정받게 되면 ‘부’ 라는 대가를 얻을 수 있다.

   
▲ 국가 권력이나, 시민단체, 노종조합, 소비자 앞에서는 대기업도 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법 앞에서는 재벌이나 대기업이라도 어떠한 특권이나 특혜도 누릴 수 없는 게 법치사회의 특징이다./사진=미디어펜


기득권 보호에서 벗어나야

근대에는 권력자들이 정치적 인기를 위해 이익집단의 특권을 보호하는 정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곡물법은 1815년에 영국에서 시행된 법으로, 외국에서 수입되는 농산물 수입 금지와 밀에 관세를 부과해 일정 가격 이상으로 거래하도록 강제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하지만 곡물법은 제정 이후 영국 내에서도 많은 논란을 야기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이 진행되며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나폴레옹 전쟁으로 곡물 수요가 극도로 높아져 있었다. 그런 와중에 외국산 곡물이 제대로 수입되지 않으니, 영국 내 곡물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영국 내에서도 데이비드 리카도를 포함하여 곡물법을 반대하고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이 많았다. 물론 의회에서는 기득권층의 이익을 위해 번번이 곡물법 폐지를 부결시키고 유지시키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1845년 이후 아일랜드 대흉작으로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자 결국 곡물법은 폐지되고 말았다. 때는 1846년, 무려 3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소수를 위해 다수가 희생되어야 했던 것이다. 곡물법 폐지 이후 영국은 대부분의 분야에서 무역을 자유화했다. 데이비드 리카도의 비교우위론대로 비교우위에 입각한 자유무역이야말로 가장 효율적인 경제 운영 방법이라고 생각한 덕분이다. 

글로벌 세계에서 언어의 기능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 지식에 대한 접근성과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언어의 문제는 과거 조선에서도 있었다. 바로 문명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중국어를 써야 한다는 주장이다. 2백여 년 전에 박제가는 중국어 공용화론을 제안한 셈이다. 서자 출신으로 당시의 기득권층과 다른 자유로운 사상을 품었던 박제가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개방된 사회는 외부의 정보를 신속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려면 언어에 제약이 있어서는 곤란하다. 지금 세계의 정보는 영어와 수학, 컴퓨터 언어로 교류하고 있다. 특히 과학 분야에서는 절대적이다. 우리 사회가 세계와 정보를 교류하는 데 소홀해서는 세계 문화를 선도하기 어렵다. 언어의 폐쇄성은 그 분야의 고립을 낳고, 이는 그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가두고 자유를 제약하게 한다. 그 언어를 사용하는 소수는 기득권을 누리겠지만 대다수는 그들 특권층의 이익을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언어에 제한을 두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부르주아를 공격한 사회주의의 실패

놀랍게도 노예제 사회는 21세기에도 있다. 바로 공산주의 사회다. 공산주의 국가는 명목상으로는 모두가 평등한 사회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당원과 비당원, 기득권층과 비기득권층 사이에 어마어마한 계급 차이가 존재하지만 명목상으로는 평등하다.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계급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니 당연히 계급 이동도 인정하지 않는다. 모두가 평등한데 무슨 계급 상승이 필요하냐는 논리다. 한번 기득권을 잃고 비주류로 밀려나면 좀체 그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사회주의는 사람들에게 그 어떤 경제적 풍요도, 평등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사회적 부와 명예, 온갖 특권은 새로운 지배층의 몫이었고, 민중은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곤궁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힘겨운 삶을 이어나가야만 했다. 심지어 외부와 차단되고 통제된 사회에서 몰개성적이고 획일적인 평등이 강요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는 이전의 왕정 사회보다 더 지독하게 억압적이고 비인간적인 사회였다.

   
▲ 가진자의 특권추구는 자본주의 정신이 아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고 미지의 분야에 새롭게 뛰어드는 도전 정신을 가진 사람만이 번영을 누릴 수 있다./사진=미디어펜

부르주아라는 말의 함정에 빠지지 마라

가진자를 미워하고 그것을 빼앗는 방식으로는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부르주아라는 말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부자나 대기업이 대중에게 미움을 받는 것도 좌편향적 편견과 반기업적 편견에서 비롯된 이분법적 시각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대기업이 공공의 적으로 매도당하는 일이 많은데, 선거철만 되면 이러한 현상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경기침체와 맞물려 대기업을 공격하면 자신들의 인기가 높아질 것이라는 착각으로, 여야가 손을 잡고 모든 문제와 잘못을 대기업에 떠넘기다 못해 대기업 관련 정책을 반시장적 규제로 채우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문제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강자와 약자의 이분법적 구조로 접근하다 보면 사회적으로 소모적인 논쟁만 일어나고 경제행위는 이익다툼을 위한 정치게임으로 타락하고 만다. 사실 국가 권력이나, 시민단체, 노종조합, 소비자 앞에서는 대기업도 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법 앞에서는 재벌이나 대기업이라도 어떠한 특권이나 특혜도 누릴 수 없는 게 법치사회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쌓은 지위나 소득, 명성 등을 시기하거나 매도하기보다는 그들도 법 앞에 평등한 소수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처벌할 일이 있다면 법에 따라 처벌해야지 감정적으로 비판하거나 법을 벗어난 방법으로 처단해선 안된다. 사회 정의가 흔들리지 않고, 사회 질서가 원칙에 의해 바로잡히기 위해서는 대중인식을 가지고 소수를 억압하려 해서는 안된다.

가진자의 특권추구는 자본주의 정신이 아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고 미지의 분야에 새롭게 뛰어드는 도전 정신을 가진 사람만이 번영을 누릴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행여 자신의 처지가 다소 곤궁할지라도 거기서 주저앉지 말고 지칠 줄 모르는 도전 정신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최승노 자유경제원 부원장


(이 글은 16일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반자본주의 정서의 뿌리를 찾는다: 부르주아는 탐욕스러운 존재인가’ 세미나에서 최승노 자유경제원 부원장이 발표한 토론문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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