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잘돼야 나라가 잘 된다"…사드보복 롯데 등 반기업정서에 죽비
우리에게 필요한 아산(峨山)의 정신은 무엇인가
- 아산의 ‘무한도전’과 기업보국(企業報國)

1. 우리는 왜 ‘정주영’을 기억하고자 하는가?

현대그룹 창업주인 아산 정주영은 삼성의 이병철, 대우의 김우중과 더불어 한국의 경제발전, 기업을 이야기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다. 한국이 배출한 위대한 기업가인 세 사람은 그러나 사뭇 다른 인상으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품질경영과 인재제일로 대표되는 삼성의 창업주답게 이병철 회장은 테크놀로지, 인텔리, 세련됨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며 세계경영을 실천한 김우중 회장은 전 세계를 누비며 세일즈 하는 거상(巨商)으로 기억된다. 반면에 정주영 회장은 경부고속도로와 조선소 건설에서 연상되는 기름 떼와 흙투성이로 얼룩진 작업복 차림의 왕(王)회장으로 남아있다. 세련됨보다는 투박함, 인텔리보다는 몸으로 부딪혀 일구는 역군으로 기억되는 것이 사실이다.
  
세 사람의 서로 다른 이미지 때문일까? 이병철, 김우중 회장과 달리 근래 청년들에게서 정주영에 대한 관심은 적어 보인다. 지금의 청년들이 보기에 ‘궂은 일’로 상징되는 그 분야에서 활약한 기업가가 바로 정주영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오늘날 청년들이 몸보다는 머리를 쓰는, 몽키 스패너와 삽이 아닌 펜과 태블릿 PC를 쓰는, 양질의 일자리를 선호하는 것은 결코 걱정할 일이 아니다. 높아진 국민소득에 걸맞은 일자리를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위대한 기업가 아산 정주영의 정신마저도 흘러간 과거에서나 유효했던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정주영의 성공 드라마는 이제 신화가 되었다. 박정희 시대에나 가능했던 일이었다. 지금에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이다”는 평 따위가 대표적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정주영의 인생역정과 성공스토리를 오늘날 똑같이 따라갈 수 없다는 말은 맞다.

위인전대로 산다고 모두가 위인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주영이 가졌던 인생관과 세계관, 신념과 가치의 체계, 다른 말로 ‘정주영 정신’이 오늘날에 맞지 않다는 말은 틀리다. 우리가 위대한 인물의 ‘정신’이라 말할 때, 그 정신이란 달라진 환경 속에서도 나름의 보편성을 갖는 추상적 개념이다.

물론 그 가운데 바뀐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천변만화하는 현실에서도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는 정신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어, 이를 배우고자 노력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찾아야 할 ‘정주영 정신’이란 무엇인가?

   
▲ 2015년 11월 18일 저녁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고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한 관객이 고 정주영 회장의 사진 앞을 지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2. 무한도전: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을 향해 노력하라.

‘정주영 정신’이라 부를 만한 가치 덕목은 많다. 도전, 성실, 검소, 용기, 끈기, 낙천성 등등. 아마 많은 위인전과 역사책에서 위인들의 장점을 골라낸다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아산의 탁월함은 ‘노력’을 ‘도전’과 결합한 데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 세대에게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정주영 회장의 이미지 중 하나는 아무 것도 없는 드넓은 모래사장 사진을 들고서 외국 선주업체를 찾아가 “내가 여기서 배를 만들어줄 테니 그 배를 사라”고 말하던 모습일 것이다. 현대중공업에서 기업광고로 내보냈던 영상이다. 짧은 영상이지만 아산의 ‘도전 정신’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조선소 설립, 중동 진출, 국산 자동차 개발 등 정주영이 걸어온 발자취를 돌이켜보면 그는 늘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을 향해 노력해왔음을 알 수 있다. 정주영 회장은 아무 생각 없이 눈에 보이는 일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두가 ‘무모한 도전’이라고 부르는 일을 노력으로 일궈냈기 때문에 남들과 다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이미 성공한 사업에서만 계속 노력했다면 그 분야에서 1등이 될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결코 한국 재계 1위의 세계적 기업인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산의 ‘불가능한 도전에 노력을 다하는 자세’는 작금의 청년들에게 발상의 전환을 요구한다. 사실 지금도 우리 청년들은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노력이 부족해서 안 된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기성세대는 ‘노력하라’고 말한다. 부족하다면 ‘더 노력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말은 청년에게 아무 위로도, 격려도 되지 않는다.
  
단군 이래 가장 높은 스펙을 가진 청년들이 좌절과 불만에 빠져 있는 이유는 그들의 노력 부족 때문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좌익들이 말하듯 사회구조가 잘못되었기 때문은 절대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도전과는 거리가 먼 일에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무원, 대기업·공기업 입사, 교직원 등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직업들의 공통점은 ‘도전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도전이 없는 곳에는 정체(停滯)만이 남을 뿐이다. 정체된 분야에서 모두가 똑같이 ‘노오력’을 다하고 있으니, 당연히 취업은 어렵고 설령 취업이 되더라도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다.

아산의 도전 정신을 잘 드러내는 말 가운데 하나로 “하면 된다!”를 꼽는다.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면 ‘무엇’이 된다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누구나 다 성공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일’을 하면 ‘소박한 성공을 얻게’ 된다. ‘누구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리는 일’을 하면, ‘대단한 성공을 얻게’ 된다. 시련에 굴하지 않고, 실패를 디딤돌 삼아 열심히 노력하는 자세(“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좋은 태도다.

그러나 노력하는 대상이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일 때만 큰 성취와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위험이 클수록 보상도 크다”는 말은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자 열심히 노력한 사람은 공무원이 될 수 있다. 대신 “내 월급으로는 왜 스포츠카도 못 끌고 다니나, 이 더러운 세상 같으니!”라는 불만은 하지 말아야 한다. 도전이 없는 노력은 딱 그만큼의 성취만을 얻을 뿐이다. 남들이 주저하는, 때로는 뜯어말리는 도전을 향해 노력해갈 때 우리도 아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아산 정주영은 경제에는 기적이 없다고 믿었을 것이다. 종교나 정치에는 기적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경제 분야에서는 기적이 없으며, 오로지 땀과 노력과 창의력이 있을 뿐이라고 정주영은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의 현대그룹 모두는 아산 정주영 생각의 소산이다./사진=미디어펜

3. 한국적 기업가 정신: “기업이 잘 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것이다”

“우리가 잘 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것이고, 나라가 잘 되는 것이 우리가 잘 될 수 있는 길이다.” 현대중공업의 사훈인 이 말에는 아산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기업이 잘 되면 배불리는 건 소유주와 그 가족뿐이라는 좌익적 선동에 일침을 놓는다. 기업이 잘 되면, 기업가 개인이 아니라 나라 전체에 보탬이 된다는 뜻인데, 경제학의 기본 가르침과도 통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택한 국가에서 국부(國富)를 증진시킬 수 있는 주체는 개인과 기업이다. 기업가의 창의가 기업을 통해 마음껏 발현될 때, 비로소 국가가 풍요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만 가지고는 아산의 기업관을 ‘한국적’ 기업가 정신이라 부르기엔 어색하다.
  
그러나 이 말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아산은 기업이란 “보다 발전된 국가의 미래와 보다 풍요로운 국민 생활을 보람으로 알고 일하는 집합체이지, 어느 개인의 부를 증식시키기 위해, 혹은 폼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기업가는 마땅히 이윤을 추구해야 하지만, 그 이윤을 가지고 내 배만을 불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산의 기업관이다. 이윤을 얻고 기업을 더 크게 키움으로써, 국민들에게 더 많은 일자리와 값싸고 좋은 상품을 제공하고, 더 많은 세금과 더 많은 수출을 통해 국가 경제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기업경영을 통해 나라에 보탬이 되자는 기업보국(企業報國)의 정신이다. 미국의 기업가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한국인의 고유한 기업가 정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기업보국의 정신은 비단 정주영뿐만 아니라 이병철(삼성), 구인회(LG), 최종건(SK), 김우중(대우) 등 한국의 1세대 기업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확인해볼 수 있다.
  
“자본주의 = 신자유주의 = 노동자 착취 = 기업가 배불리기 = 양극화”라는 등식이 증명된 진리인양 시중에 회자되는 요즘, 아산의 기업관은 한국인에게 큰 울림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기업이 잘 되는 것이야말로 나라가 잘 되는 첫 걸음’이라는 평범한 진리가 국민들에게 널리 공유되고 각인되기를 바란다.

어느 때보다 반(反)기업 정서가 팽배한 요즘, 기업의 역할을 가장 잘 드러내는 아산의 정신이 널리 퍼지길 바란다. 따뜻한 자본주의가 되었든, 사람 냄새나는 자본주의가 되었든 무엇이든 간에 좋다. 어쨌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하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개인, 기업이 자유와 창의를 바탕으로 이윤 추구하기를 독려해야 한다(헌법 제119조 1항 참조). 청년들이 원하는 일자리도, 질 좋고 멋진 상품도 모두 기업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의 기업가들에게도 아산의 기업관이 계승·발전되기를 기대해본다. 기업경영을 통해 ‘나’와 가족의 안녕만이 아니라 국가의 발전과 국민생활의 향상을 이루고자 했던 아산의 정신이 21세기에도 다른 기업인들에 의해 실천되기를 바란다. 물론 기업은 정부도, 공공기관도 아니기 때문에 국가발전과 민생을 보살펴야 할 의무가 없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기업들이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공동체의 이익은 증대되기 때문에 구태여 기업에게 보국(報國)을 강요하지 말라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필자도 정치권과 같은 타인이 기업인에게 보국하라고 강요하는 것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다만, 강요가 아니라 기업가 스스로가 기업보국의 정신을 가지는 것을 무어라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나’의 안위가 아니라 나라와 국민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해보자는 기업인의 자발적 마음가짐이 나쁠 리 없다. 때로는 기업경영에 더 적극적으로 임하게 되는 내적 동기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삼성, 현대자동차, LG, SK, 롯데 등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은 이미 기업보국을 잘 해내고 있다. 사드 부지를 제공하는 바람에 중국으로부터 곤욕을 치루고 있는 롯데가 대표적이다. 국민들도 삼성과 애플이 싸우면 삼성 편을 들고, 롯데가 중국에게 보복당하면 중국을 욕하는 게 우리네 정서다. “기업에게는 국경이 없어도, 기업가에겐 조국이 있다”는 아산의 정신은 오늘의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 1971년 정주영 회장은 황량한 바닷가에 소나무 몇 그루와 초가 몇 채가 선 초라한 백사장을 찍은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일본으로, 영국으로 배를 수주하러 돌아다녔다. 그로부터 현대중공업의 신화가 시작됐다. 사진은 현대그룹 故정주영 회장(1915~2001)./사진=현대그룹 홈페이지

4. 21세기 한국에서 또 다른 정주영이 나올 수 있을까?

과연 ‘정주영 정신’이 지금의 한국에서도 꽃피워질 수 있을까? 개인의 성공이든, 기업의 성공이든 정신만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정신이 활짝 꽃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제도적, 물질적 환경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정주영 회장의 성공스토리는 그의 기업가 정신과 ‘조국근대화’라는 시대적 배경이 조응했던 결과다. 정주영, 이병철, 김우중 등 위대한 기업가들의 뒤엔 박정희 대통령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박정희 대통령이 사회주의적 경제노선을 택했거나, 수입대체형 공업화를 고수했더라면 정주영도 이병철도 절대 성공한 한국의 기업인으로 기록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박정희 대통령과 정주영 회장은 ‘도전 정신’과 ‘선공후사의 애국심’이라는 점에서 데칼코마니다.

수출주도형 공업화로의 전환, 중화학공업화 추진 등 모두가 불가능이라고 말한 과업에 도전했으며, 재임기간 내내 오직 ‘조국근대화’를 위해 모든 정력을 쏟았다(“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박정희 리더십을 정주영 정신의 정치가 버전으로, 정주영의 기업경영을 박정희 정신의 기업가 버전으로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서로 닮은꼴인 통치자와 기업인들 덕분에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는 그 때와는 너무나 다르다. 역사의 심판대에 서겠노라며 도전하는 정치인도 없고, 나라를 위해 개인적 손해를 감수하겠다고 나서는 정치인도 없다. 그저 열심히 일하는 기업가들로부터 돈을 뜯어내 ‘의적’(義賊) 행세나 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과연 제2의 정주영이 한국에 나올 수 있을지. 서거 16주기를 맞아 아산을 기리며, 동시에 아산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는 또 다른 이유다. /이승수 청년박정희연구회 회장


(이 글은 20일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정주영 서거16주기 세미나-청년이 본 기업가, 정주영’에서 이승수 청년박정희연구회 회장이 발표한 발제문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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