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 또는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의 대화'라고 정의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중요한 징검다리다. 그럼에도 우린 때때로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로 스스로를 부정하는 우를 범하곤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도발은 계속되고 있다. 이에 맞서는 유일한 길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앎과 이해일 것이다. '독도는 우리땅'이란 가수 정광태의 노래에 등장하는 이사부(異斯夫)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이사부 장군은 경상북도 동부의 작은 부족국가 신라를 한반도의 주역으로 끌어올린 분이다. 또 다양한 종족을 하나로 통합해 한민족의 뿌리를 형성하게 했으며, 신라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은 위인이기도 하다. 독도에 대한 이해와 자긍심 고취를 위해 미디어펜은 이사부의 흔적을 찾아 나선 김인영(언론인)씨의 '이사부를 찾아서'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이사부(異斯夫)②] 마복자-진흥왕의 의붓아버지 되다

믿기지 않는 화랑세기 스토리
 
   
▲ 김인영 언론인
1) 마복자
사료가 희귀해 이사부에 대한 흔적을 찾아 그의 활약상을 그려내기엔 너무나 어려움이 많다. 그런 갈증을 시원하게 해결해주는 문건은 <화랑세기 필사본>이다.

최근에 발췌본과 필사본이 발견돼 신라 중엽에 운영되었던 화랑제도와 그 인물들의 면면을 살피면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일본서기>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이사부와 그의 가족에 대한 내용을 이해할수 있게 됐다.

   
▲ 삼척 오십천 하구 오화리산성터.(원내) 이사부 장군이 울릉도의 우산국을 정벌하러 갔던 산성터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화랑세기>의 원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고, 발췌본과 필사본이 위작이라는 사학계의 반론과, 위작이 아니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 있어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이는데 한계는 있다.

위작 논란을 제기한 사학자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이사부가 소지왕의 마복자라는 스토리와 며느리 미실에 관한 얘기 등은 신라의 위대한 장군 이사부의 명성을 먹칠하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화랑세기 필사본>이 소개하는 이사부와 그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는 참고자료로 삼기로 한다. 믿거나 말거나,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정사의 빈약한 사료에 의지해 이사부의 궤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허기지고 목마른 상황에서 <화랑세기 필사본>의 위작여부는 배부른 학계의 논쟁 쯤으로 치부해버리고 싶을 정도다. 울릉도에 내려오는 전설마저 사실(史實)로 받아들여야 할 마당에서 <화랑세기 필사본>도 일단 받아들여 1천5백년전 이사부의 모습을 풍부하게 그려보는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화랑세기 필사본>이 주는 충격은 이사부, 즉 태종(苔宗)이 소지 마립간(비처왕)의 마복7성(摩腹七星)의 한 사람이라고 한 점이다. 마복자(摩腹子)란 한자를 뜻대로 해석하면 ‘배를 마찰해 나온 아들’이다. 소지마립간이 산하의 임신한 부인을 궁궐로 불러 정을 통해 낳은 아이가 7명이고, 보옥공주도 아진공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소지왕과 관계를 맺고 아들을 낳으니, 그가 태종, 곧 이사부라는 것이다.

<화랑세기 필사본>은 소지마립간의 마복7성을 소개한다.
 
아시공(阿時公)의 아버지는 선모(善牟)이고 어머니는 보혜(宝兮)다.

수지공(守知公)의 아버지는 이흔(伊欣)이고 어머니는 준명(俊明)이다.

이등공(伊登公)의 아버지는 숙흔(叔欣)이고 어머니는 홍수(洪壽)다.

태종공(苔宗公)의 아버지는 아진종(阿珍宗)이고 어머니는 보옥공주(宝玉公主)다.

비량공(比梁公)의 아버지는 비지(比知)이고 어머니는 묘양(妙陽)이다.

융취공(肜吹公)의 아버지는 덕지(德知)이고 어머니는 가야국의 융융공주(肜肜公主)다.

법흥대왕은 칠성(七星)의 우두머리다. <화랑세기 필사본>
 
지증왕도 임금이 되기 전에 임신한 연제부인을 소지마립간에 보내 관계를 맺게 하고,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법흥왕이다. 법흥왕이 소지마립간의 마복자이고, 마복7성의 우두머리가 된다는 내용은 유교적 관점에서 상상도 할수 없는 내용이다. 따라서 보수적인 사학자들 입장에서 마복자를 <화랑세기 필사본>이 위작임을 주장하는 주요한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마복자는 임신을 한 여자가 보다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후 낳은 아들을 말한다. 높은 지위의 세력들은 마복자를 통해 정치적인 지지자와 후원자를 갖게 되는 신라의 독특한 제도라고 <화랑세기 필사본>은 전한다. 왕들도 마복자를 가졌고 화랑들이나 낭두들도 상급자에게 부인을 바쳐 마복자를 가졌다.

마복자의 존재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성적 문란이자만, 신라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일종의 사회, 정치적 관계를 맺는 행위라고 볼수 있다고 <화랑세기 필사본>을 진본으로 보는 학자들은 주장한다. 이종욱교수(서강대)는 저서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에서 "마복자 제도는 다른나라, 다른 시대에서 그 비슷한 예를 찾기 힘들다"면서 "중세 유렵의 영주들이 가지고 있던 초야권과 비교될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 이사부(국가표준영정).

중세 유럽의 영주들은 농민이 혼인하면 그의 신부와 첫날을 보낼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는 잉글랜드 귀족이 주인공 멜 깁슨의 애인에게 초야권을 행사하려다가 실패하면서 스코틀랜드 반란의 원인을 제공한다는 스토리를 만들어 낸 바 있다.

아무리 철저한 계급사회였다고 해도, 귀족 특히 임금이 될 사람의 부인에게까지 마복(摩腹)의 권리(?)를 행사했다는 내용은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필자도 유교적 관념에서 자유로운 사림은 아닌가 보다.
 
2) 지소태후의 남편

<화랑세기 필사본>이 흥미로운 사실은 태종(이사부)이 법흥왕의 딸이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只召)태후의 남편이 된다는 점이다.

지소태후의 초명(初名)은 식도(息道)부인이고, 처음엔 입종공(立宗公)에게 시집을 가서 진흥대제를 낳았다. 입종공은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갈문왕이며, 입종갈문왕이 죽자 영실공을 계부(繼夫)로 맞이해 황화공주를 낳았다.

지소태후는 영실과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아 세 번째 남편으로 병부령이었던 이사부와 결혼해 숙명(淑明)공주와 세종공(世宗公)을 낳는다. 즉 이사부의 아들 세종과 딸 숙명은 진흥왕에게는 어머니가 같고 아버지가 다른 동복(同腹) 형제요, 누이인 셈이다.

진흥왕도 세종을 매우 사랑해 말하기를, "나의 막내 아우다(吾末弟也)"며, 항상 곁에 있으며(侍側) (대왕을) 모시도록 했다고 <화랑세기 필사본>은 기록한다. 진흥왕은 숙명에 대해서는 '어머니 같은 누이'라고 표현했다.

법흥왕의 딸 지소태후가 삼촌인 입종(立宗) 갈문왕을 남편으로 삼아 진흥왕을 낳았다는 스토리는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신라 김씨 왕가가 몽골고원을 휘어잡던 흉노족 출신이고, 유목민족에게서 가까운 친족내 근친 결혼은 흔히 볼수 있는 풍습이다. 김씨 왕가도 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내려온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유목민족의 유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촌끼리는 물론 삼촌과 조카 사이에도 혼인을 했다. 고귀한 혈통을 보존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지소부인과 첫남편 입종갈문왕에 대한 스토리는 천전리 각석에 새겨져 있다. 경주에서 남쪽으로 35번 국도를 타고 언양으로 가다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에서 태화강변으로 가다보면 천전리 각석을 만날 수 있다.

천전리 각석은 원명과 추명 두 부분으로 나눠져 있는데, 추명부분의 요지는 사훼부 사부지(徙夫知) 갈문왕과 어사추여랑(於史鄒女郞)이 천전리 계곡을 찾은지 14년이 지난 기미년(539년)에 사부지 갈문왕의 부인인 지몰시혜비(只沒尸兮妃)가 무즉지(另卽知) 태왕의 비인 부걸지비(夫乞支妃)와 사부지 갈문왕의 아들인 심□부지(深□夫知)와 함께 이곳을 찾아왔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사부지 갈문왕은 '사'는 '서다(立)'는 뜻, 부는 높은 사람의 뒤에 붙이는 종(宗,) 그래서 입종 갈문왕으로 추정된다. 지몰시혜비는 지소부인으로 해석된다. 무즉지 태왕은 법흥왕, 그의 부인 부걸지비는 보도부인, 사부지 갈문왕의 아들 심□부지는 나중에 진흥왕이 되는 삼맥종(彡麥宗)으로 비정된다. 천전리 각석 추명에는 이때 사부지 갈문왕에 대해 '과거(過去)'라는 표현을 써 죽었음을 시사한다.

서기 539년은 진흥왕이 즉위하기 1년 전이다. 이때 진흥왕은 법흥왕에 이어 차기 임금으로 내정돼 있던 시기로 보인다. 진흥왕의 아버지이자 지소부인의 남편인 입종 갈문왕은 이미 죽었고, 지소부인은 남편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들인 삼맥종을 데리고, 차기 왕이 될 것임을 고하며, 바위에 그 내용을 쓴 것이다.

이 무렵, 지소부인은 전남편인 입종갈문왕을 잃고, 둘째 남편인 영실과 헤어져 아들의 왕권 확립을 공고히 하기 위해 당대의 실력자인 이사부에 접근하고 있었을 것이다. /김인영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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