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주 연구원, “본능과 이성이 이끄는 곳 자유주의를 만나다”
경제민주화, 복지포퓰리즘과 같은 정부개입주의 처방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취업하고 싶은 직장 1위로 공기업이 꼽히고, 공공성이라는 말이 아름다운 말로 여겨지며, 무슨 일만 생기면 정부가 나서 해결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대세입니다. 젊은 세대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부각시키면서 부자와 기업에 대한 반감을 고취시키는 일이 쉽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같은 사회 풍조에 대해 경계하면서 시장경제-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인정하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 번영에 기여한 시장경제-자유민주주의를 호의적으로 보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바로 ‘자유주의’ 운동입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자유주의에 약육강식, 승자독식, 부패와 탐욕이라는 왜곡된 이미지를 덧씌워 신자유주의라는 용어가 만들어지고 퍼져나가면서 그 입지는 더욱 위축되었지만, 그러한 현실에서도 자유주의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자유주의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학생과 대중들에게 쉽게 알리고자 하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유경제원’과 ‘미디어펜’은 그 노력의 일환으로 젊은 자유주의자들의 이야기인 <청춘, 자유주의의 날개를 달다>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자유경제원에서 최근 펴낸 젊은이들의 이야기입니다. 8월 5일 저녁 7시, 서울역 상상캔버스에서 북콘서트도 열립니다. [편집자주]

 

   
▲ 김연주 자유경제원 연구원

대학, 그 ‘자유’ 앞에서 만난 내 인생의 ‘전쟁과 평화’

‘대학’, 그것은 나에게 자유의 상징이었다. 대학에 가면 짜여진 시간표도, 틀에 박힌 교복도, 한곳에만 머물러야 했던 좁디좁은 교실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건데 그것은 단순히 매력적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했다. 자유는 지겨운 입시터널을 지나 진짜 내 삶을 만나는 한줄기 ‘빛’과 같은 것이었다. 오롯이 내게 주어진 ‘자유’ 그것을 얼마나 고대했던지!

나의 첫 번째 자유는 어떤 공부를 할지 선택하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멋진가. 통제받는 교육이 아닌 진짜 배움이 내 손에 달려 있었다. 세상의 이치를 배우겠노라 하는 다짐으로 선택한 첫 교양 과목 ‘전쟁과 평화’. 이것은 거의 계몽에 가까웠다. 전쟁은 나쁜 것, 평화는 좋은 것으로만 알았던 순진한 나에게 좋은 전쟁과 나쁜 전쟁, 좋은 평화와 나쁜 평화가 모두 공존한다는 것은 낯설고 놀라운 사실이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놀라움 다음에는 엄청난 배신감도 따라왔다. 대입 준비 시절 그 유명하다는 스타강사, 인기 선생에게 배웠던 얼룩지고 한심한 대한민국의 역사는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새로이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은 ‘네가 알고 있던 이야기는 진실이 아니야’ 라며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도대체 내가 배워왔던 것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중·고등학교 내내 귀에 딱지가 앉도록 지겹게 들었던 한국 근현대사의 얼룩진 역사, 비민주적이고 폭압적이기만 했던 정권 등의 이미지는 전교조가 내게 비춰준 가짜 거울이었다. 처음엔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의심도 해보고 내가 노트 필기했던 것들을 곱씹어 보며 따져보기도 했다. 진실과 거짓 속 그 어느 쯤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사실’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거짓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 ‘청춘 자유주의의 날개를 달다’ 북콘서트 

대학 수업에는 균형이 있었다. 훌륭한 교수님을 만나게 된 행운도 있었지만 국제정치학이라는 분야에는 실로 수많은 학문적 시각이 존재했고, 나는 그 중에서 나에게 맞는 관점을 공부하고 선택할 수 있었다. 질문도 이견도 논리만 있다면 누구든지 자유롭게 제시할 수 있었다. 누구도 잘못된 지식을 나에게 이식하려고 하지 않았다. 지금은 익숙해져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처음 그 순간 얼마나 감사하고 기뻤던지 지금도 그 자유로움에서 오는 사소한 기쁨이 마음속 한켠에 자리 잡고 있다. 대학 이전에는 느껴보기 어려웠던 자유로운 감정이었다.

정치학은 그 자체로 인류의 역사와 같았다. 실재하는 것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부분이 제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는 ‘정치’를 통해 표출되었고, 수많은 도전과 실패, 전쟁과 평화의 경험이 축적되어 역사를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때까지 내가 들어왔던 역사의 정의와 굉장히 이질적 이었다. 내가 스쳐왔던 많은 교사들은 역사는 못가진 자의 투쟁이요, 혁명으로 새로운 체제를 세워가면서 쓰여지는 것 이라 가르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을 알게 된 내 눈에는 역사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각이 단절된 스냅 샷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역사는 스냅 샷이 아니다. 끝나지 않는 하나의 영화 같은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어떠한 역사적 사건 하나로 세상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쌓여온 수많은 시도와 실패, 경험과 바탕이 있었기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좌파가 그렇게 위대하게 생각하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 볼셰비키 혁명은 투쟁을 통해 세상을 더 이롭게 만들었는가? 아니다. 그들은 처참히 실패했다. 이상주의에 빠져 세상을 진화가 아닌 혁명과 투쟁으로 바꾸려 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우리는 역사 속 사건들의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자유’를 향한 인류의 행보를 공부하면서 역사가 투쟁과 혁명의 결과가 아니라 첫째도 둘째도 경험에 의해 더 나은 방향으로 진화해 온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너무나도 간단해 보이는 이 진리를 만나기까지 무려 20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사실에 오히려 기가 찰 정도였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의 눈을 가리는 장애물이 사회에 어찌나 많은지, 그것들을 걷어내고 ‘자유’를 만나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나 안타까움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렇게 ‘자유’를 알게 되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순수했던 대학 1학년, 스치듯 만난 ‘전쟁과 평화’라는 교양 수업 한 과목은 세상을 보는 내 눈을 맑게 해주었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삶은 전쟁 같은 것이라고 가르치던 좌파의 가짜 전쟁터에서 현실의 평화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자유의 무게’ 북한 인권에 침묵하는 가짜 진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될 무렵, 결정적으로 내가 자유주의자가 된 것은 ‘북한 인권’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원초적 문제를 접하면서였다. 순전히 친한 친구의 소개로 인연을 맺게 된 북한인권 동아리 H.A.N.A (Humanitarian Action for North Korea)에서 이제껏 모르고 지냈던 너무나 많은 사실과 충격을 마주하게 된 나는 그 곳에서 진짜 ‘자유’의 무게를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연민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하고 밥 한술 뜨지 못해 헛배만 풍선처럼 부푼 아이들, 갈빗대가 훤히 보이도록 비쩍 마른 몸, 그리고 무엇보다 사진 속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 알 수 없는 눈빛이 마음속에 무언가를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처음엔 알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어린아이에게서 저런 눈빛이 나오는 것일까? 이 감정은 도대체 무얼까······’ 이 의문은 그들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생각하기 시작하자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 주르륵 답이 풀렸다. 알 수 없었던 그 눈빛, 그것은 단 한 번도 자유를 가져보지 못한 영혼의 몸부림 이었다.

단 한 번도 자유를 갖지 못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감정일까? 혹자는 한 번도 자유를 가져보지 못한 자는 자유와 인권이란 것이 있는지 조차 모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자유는 인간 본성에 기인한다. 그들이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인지하고 있지 못하다 하더라도, 빈곤으로 비쩍 말라버린 몸 안에 갇힌 영혼까지 가난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들의 눈빛은 자유를 갈망하고 있었다. 배고픔, 그것은 자유가 없기 때문에 생겼다. 몸의 자유도 정신의 자유도 그 어느 것 하나 허락되지 않는 땅에 살며 무엇을 희망할 수 있을까? 그 어느 것도 희망하지 못하는 그곳에서, 단하나 그들이 꿈꾸는 것은 ‘자유’였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도 인간의 모든 소망이 회귀하는 그것이 바로 자유인 것이다. 이 얼마나 숭고하고 무거운 가치인가!

북한인권의 참상을 알게 된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던 예전처럼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사유 재산은 물론 신체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 우리에겐 너무나 당연한 권리처럼 여겨지는 것들을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늘 내가 가진 ‘자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나의 자유는 어디에서 왔으며, 왜 그들은 갖지 못했을까.

북한 인권의 현실을 알게 된 후부터 나는 침묵하는 공범자, 방관자라는 오욕을 벗기 위해서는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교내 북한 인권 사진전, 북한 자유주간 행사 참여, 주먹밥 캠페인, 시민단체와 연대한 대규모 북한인권 사진전에 이르기까지 북한 인권 침해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작은 행동부터 진심을 전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적은 인원으로 행사를 하기에 쉽지 않은 순간들이 많았다. 그러나 가장 큰 방해와 좌절은 소위 ‘진보’의 방해였다.

인권 앞에 이념 없음은 당연하거늘, 내가 본 한국의 진보는 인권 앞에 철저히 이념적이었다. 그들은 북한인권 침해의 실체가 없으며, 북한인권법 제정이 남북관계를 경직시키고 북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에 불필요하다고 계속해서 주장해 왔다. 진정 논리 상실의 시대요, 수치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이 대한민국 정계의 현실이다. 미국과 일본에도 있는 북한 인권법이 우리나라에는 없다. 통탄할 일이다. 자유민주주의 헌법 이념 아래 세워진 국가의 정치인들이 자유가 짓밟히는 것을 묵과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직무 유기다. 반인륜적 북한 정권과 연합해 내란을 음모한 죄로 12년형을 받은 이석기 RO, 통합진보당은 말할 것도 없고 당당히 진보의 이름을 달고 그들을 비호하는 새민련 정치인들까지 북한인권 문제에 대한 그들의 행태는 인권을 그 무엇보다 강조하는 진보좌파 단체의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모순되게 만든 지 오래다. 이념에 사로잡힌 대한민국의 가짜 진보가 북한인권 앞에 옳은 소리를 낼 날이 오기는 올까?

지난 5월, 우리나라에 UN 북한인권 현장사무소 설치가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외로운 길을 걸어온 북한인권 시민단체와 인사들은 모두 마음으로 뜨거운 눈물을 함께 흘렸을 것이다. ‘자유’의 가치가 온당히 그가 있어 마땅한 자리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북한 인권 운동을 통해 내 ‘자유’의 무게와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향해 인류가 피흘려온 역사를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진짜 자유는 책임을 다할 때 만 존재할 수 있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책임지지 않을 때, 타인의 자유침해에 침묵할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자유로부터 멀어진다. 개인의 자유가 지켜지지 않는 곳에서 자유로운 국가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총학생회 선거’ 기성정치와 집단주의에 물든 학생운동

자유에 대한 내 생각을 굳혀갈 때 쯤, 눈에 들어온 것은 심히 많은 사람들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운동권 학생회의 뻔뻔한 정치적 행보였다. 그들은 ‘불쌍한 학생, 짓밟히는 학생 권리 보호’등의 구호를 내세우며 ‘반값등록금’을 외쳤다. 삭발을 하고 기자회견을 하며 흘리는 닭똥 같은 눈물엔 혀가 내둘러 질 정도였다. 확실히 보통 학생들과 같지 않은 그들은 모습엔 보편적 선을 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은 우리의 마음속 ‘불쾌함’이란 감정을 건드렸다. 그들의 정치적 운동과 행보가 흡사 기성 정치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포퓰리즘적 정치활동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운동권 학생회는 각각의 개성을 가진 수 만 명의 학생들을 너무나 쉽게 ‘너와 나, 우리’로 묶었고 동시에 ‘우리’라는 지칭대명사 아래 모두를 가난하고, 짓밟히고, 무시당하는 피해자로 둔갑시켰다. 이런 피해자를 대표해 본인들이 마치 민주투사라도 되는 심정으로 모두를 위해 희생하겠다고 포장한 것이다. 이런 황당한 경우라니. 한마디로 꼴 보기 싫었다. 나는 불쌍한 사람도 피해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대학 생활을 즐겁게, 이롭게 하고 싶은 학생이었다. 주변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경제적 형편이 심하게 안 좋은 친구부터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온 친구까지 개개인의 경제적 환경은 각각 다르게 존재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자신을 피해자처럼 꾸며대는 것에 유쾌한 이가 없었다.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친구라고 해서 스스로를 불쌍한 피해자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며 스스로의 삶에 책임지는 사람들이었다.

반값등록금 ‘투쟁’을 외치는 목소리로 순헌 광장이 쩌렁쩌렁 울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했던 말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이런 말하기 자존심 상하는데, 나 돈 없는 거 너도 알지? 솔직히 아르바이트 하랴, 공부하랴 힘들고 짜증날 때도 많은데 난 불쌍한 사람은 아니야. 적어도 내 인생 내가 책임져. 그런데 쟤네는 내가 불쌍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마치 날 위해 뭘 해줄 수 있는 것처럼 떠들어. 그게 더 방해된다고. 지들은 돈이 남아돌아 돈 내고 수업 안 듣고 투쟁할 기운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귀하거든? 그게 기분 나빠. 피해를 준다고. 사회는 더 짜증나는데 학교는 좀 즐겁고 생산적이면 안되냐? 왜 지들 맘대로 날 피해자 취급하며 밤낮으로 투쟁을 불삼냐. 학생회비 만원 아깝다.” 불만이 가득했다. 이런 불만이 있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직접 나서서 그들의 집단주의적이고 정치적인 학생운동을 막으려 하지는 않았다. 무관심 속에서 학생 운동은 점점 학생들의 참된 바람과는 멀어져 가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대학 4학년. 총학생회장이라 직책에 도전하고 모험을 걸어보기엔 요즘 젊은 학생들은 기회비용이 너무 크다. 어학연수, 여행, 취업준비 등 그 시기에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수많은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요즘 시대에 ‘총학생회장’이라는 타이틀이 스펙에 한줄 도움이라도 되는가? 그렇지 않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총학생회장직에 출사표를 던졌다. 운동권 학생회처럼 사상적으로 위대한 목적, 고매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누군가는 밖으로 표출되지 못하고 분산되는 다수의 불만을 대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대학생활이 투쟁으로 점철되어야 하는지, 삭발은 왜 하며 단식투쟁은 왜 하는지. 나아가 학생들이 낸 돈으로 그들이 원치 않고 관심도 없는 정치운동은 왜 하는지 브레이크를 걸어야 했다. 논리적 설득 없이 감성팔이 수법의 운동은 기성정치인들이 국민들을 대상으로 눈속임 할 때 즐겨 쓰는 방법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철저히 우롱이고 기만이었다. 정치는 분명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정치적’이란 것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념적이고 분열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이 좁은 의미에서 한국 대학운동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학생회는 학생답게 학우들을 위한 활동을 해한다. 기성정치인 따라 정치세력 따라 좌지우지 되는 조직은 두말할 것 없이 속내가 시커멓다.

돌이켜 보건데 선거운동은 치열했다. 몇 년 만에 단일 후보가 아닌 선거판이기도 했거니와 매번 부당한 일이 있을 때 마다 전학대회에서 따박따박 따져댔던 나였기에 비운동권으로 출사표를 던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기존세력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선거운동 시작과 동시에 익명게시판에서 나는 친일파도 됐고, 뉴라이트도 됐다. 그 다음날엔 또 너무나 쉽게 된장녀도 됐다가 모기업 사장 딸도 됐다가 어용도 됐다. 각오했던 것 이지만 근거 없는 루머와 악성 댓글 공격을 실제로 당해보니 정신적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물론 오해와 온갖 공방이 오갈 때 마다 지지해 주고 힘을 실어 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어 끝까지 달릴 수 있었다.

긴 이야기는 접어두고, 결과적으로는 팽팽한 신경전이 오가는 가운데 투표 2-3일 전 시작된 중선관위 매수논란, 잇단 중선관위 대표들의 사퇴 등 네거티브선전이 하늘을 찔렀고 나는 낙마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선거 이후 학내에서 운동권 학생회에 대한 불신이 치솟기 시작했고, 그들이 얻은 것은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학생회의 정치적 운동 반대,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회(이하 한대련) 탈퇴 등 학생들의 진짜 요구와 목소리가 집결되기 시작했다. 결국 2년 만에 비운동권 학생회가 세워지며 운동권 학생회는 세력을 잃게 되었고, 얼마 전 전학대회에서 92%의 찬성률로 한대련 탈퇴라는 결과를 이루어 내었다. 전체주의적 선동이 힘을 잃고 개개인의 자유가 존중받는 날이 온 것이다.

내가 꿈꾸는 세상, 국민 권력이 존재하는 나라

내가 자유주의에 빠져든 계기를 돌아보니, 언제 이런 시간들이 있었나 새삼스럽기도 하다. 삶에서, 생활에서 마주한 문제들에 대해 자유주의는 내게 본능으로 이성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흔히들 ‘~주의’ ‘~ism’이라고 하면 멀고 어려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내가 만난 자유주의는 삶 그 자체요, 인류 역사의 흐름에 가까웠다. 물론 자유는 때때로 부정당했다. 전체주의와 파시즘의 불길이 전 세계를 전쟁으로 빠트리기도 했고, 유토피아를 꿈꾸던 사람들이 만든 사회주의, 혁명의 불꽃은 타올랐다 사그라져 버리기도 했다. 케인지언들이 우세했을 때 세상은 거대정부에 의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개인으로 회귀했다. 사유재산이 보호되고 경제적 자유가 주어진 곳에서 번영의 꽃이 피었고 인류의 절대적 삶의 수준이 향상되었다. 변치 않는 사실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회주의 바람이 이곳저곳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병들고, 부정한 것으로 가득 찼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지 않은가? 우리는 여기서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원하는 세상은 무엇인가? 위대한 나라? 아니다. ‘내가’행복한 나라. 내 가족이 행복한 나라다. 이것은 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이기주의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와 책임의 주체로서 최소의 단위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실체가 불분명한 ‘사회’ ‘이웃’을 개인과 가족보다 중요한 상위 단위로 놓을 때 범할 수 있는 책임 회피 문제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모든 요구와 책임을 사회와 국가에 짐 지울수록 우리의 자유는 잠식된다.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에 산다. 좌파도 우파도 민주주의 수호를 외친다. 헷갈리는 것은 국민이다. 모두가 외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국민이 가장 혼동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 ‘국민에게 권력이 있는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다. 그렇다면 국민이 주인이 되고 권력을 가질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개인이 강해지는 길은 무엇인가?

바로 자유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나의 책임을 다 할 때, 누구나 당당히 요구할 수 있다. 스스로의 인생을 감당하고 책임질 때 바로 그 자리에서 권력이 나오는 것이다. 내 인생의 특정부분을 사회나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무임 승차자는 늘어난다. 책임 없이 가질 수 있는 자유는 없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모든 것을 나라가 책임지도록 요구하면 언젠가는 나라가 나의 주인이 된다. 몰락의 길이다. 자유주의는 멀리있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학문적 개념도 아니다. 우리 삶의 근간에 내재되어 있는 원칙과 같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소중한 ‘자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갖기를 소망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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