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력 떨어지는 '적당주의' 아닌 창의적 사고 가능케 해
'라곰(Lagom)', 스웨덴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 이석원 객원칼럼니스트
스웨덴 북부 공업 도시 룰레오(Luleå)에서 자동차 정비업자로 일하는 36세의 에리히 브롬크비스트는 6살과 8살 아들이 있다. 에리히의 두 아들은 1년 전부터 배드민턴을 배웠다. 둘 중 큰 아들 페르는 제법 잘 친다. 자기 학교 같은 학년 아이들 중에서 정상급 실력이다. 

어느 날 페르의 담임 선생님이 에리히를 학교로 불렀다. 페르를 배드민턴 선수로 키우고 싶은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에리히는 선생님에게 "페르는 그저 취미로 배드민턴을 쳤을 뿐이다. 그리고 이 정도 쳤으면 됐다. 페르는 아직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다른 것도 해보고 싶은지 봐야할 것 같다"고 말하고 선생님과의 면담을 마쳤다. 페르는 요즘 축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대학에서 텍스타일 디자인을 전공했던 27세 모아 융베리는 아시아 여행이 꿈이다. 그러나 한동안 마음에 드는 직장에 취업하지 못해 고민이 많았다. 시간제로 몇 군데 의류 회사에서 일을 했지만, 일하는 시간이 적어 수입이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심심풀이로 자신의 텍스타일 디자인을 넣어 만든 천 가방을 길에서 팔았는데, 엄청난 반응을 얻었다.

나중에 패션 회사 몇 군데와 생활 소품 회사 몇 군데에서 계약을 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모아는 그 중 한 패션 회사와 제품 납품에 관한 계약을 했다. 1년 간 스웨덴 돈으로 50만 크로나, 한국 돈으로 약 6300만원어치만 제작하기로 했다. 물론 그 회사에서는 더 많은 양을 원했지만 모아는 거절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돈으로 내년 한국과 일본, 태국과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로 6개월 간 여행을 떠나겠다고 했다. 

   
▲ 스웨덴은 과하지 않아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나라다. 그들은 그 어떤 일도 자기 개인이나 가족보다 우선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그들의 국가가 성립한다고 믿는다. 사진은 스웨덴 국기. /사진=이석원

이 지면을 통해 오래 전에 소개한 '얀테의 법칙(Jantelagen)'이라는 말이 있다.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 사람들을 상징하는 말이다. 10개의 경구가 있지만, 한 마디로 '잘난 척 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스웨덴 사람들을 일컫는 또 다른 말이 있다. '라곰(Lagom)'이라는 단어다. 스웨덴어로 '적당한, 알맞은, 딱 들어맞는'이라는 뜻의 형용사이자, '적당히, 알맞게'라는 뜻의 부사로도 쓰인다. '라겟 옴(Laget om)'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말인데, 라그(lag)는 팀(Team)이라는 뜻이고, 뒤에 붙은 '에트(et)'는 정관사, '옴(om)'은 '~을 둘러싸고' 정도의 뜻인 전치사. 그러니까 '~에 둘러싸인 팀' 정도의 뜻일 게다. 근데 왜 라곰이 '적당한, 알맞은'이라는 뜻의 형용사가 됐을까?

8~11세기 유럽은 물론 서아시아까지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바이킹은 스웨덴 사람들의 조상이다. 그들에게는 뿔 모양의 전통적인 술잔이 있다. 그들이 함께 술을 마실 때 규칙이 하나 있다. 커다란 뿔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 모닥불을 둘러싸고 앉은 전사들이 그 뿔 술잔의 술을 한 모금 씩 나눠 마신다. 맨 처음 사람부터 맨 마지막 사람까지 뿔 술잔이 돌아야 한다.

중간에 누군가가 많이 마시면 맨 마지막 사람이 마실 술이 남지 않는 경우도 있고, 중간 사람들이 술을 아껴 마시면 맨 마지막 사람이 혼자 많은 술을 마셔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맨 처음 사람부터 중간 사람들은 적당한, 그리고 알맞은 양의 술을 마셔야 한다. 바이킹들은 언제나 둘러앉은 모든 사람들이 알맞게, 적당히 술을 마실 수 있었다. 

추측컨대, '~에 둘러싸인 팀'인 '라겟 옴(Laget om)'이 '알맞은, 적당한'이라는 뜻의 '라곰(Lagom)'이 된 데는 둘러앉아서 뿔 술잔의 술을 나누어 마시던 바이킹 전사들의 전통이 이유인 듯하다.

   
▲ 스웨덴 사람들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말인 ‘라곰’은 스스로가 행복할 수 있는 최상의 가치를 지닌, 가장 적당하고, 알맞은 말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사진=이석원

스웨덴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개인의 삶을 희생하지 않는다. 더 출세하기 위해 낮밤을 가리지 않고 시간을 몰두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휴일이나 명절에 일을 하면 두 배, 세 배의 수익을 얻을 수 있지만, 그들은 본래 자기가 일해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자신을 위해, 또는 가족을 위해 시간을 사용한다. 새로 아이가 태어나면 일부러 일을 적게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정규직을 포기하고 비정규직 시간제 노동자가 되는 일도 허다하다.

앞서 에리히는 큰 아들 페르가 배드민턴을 얼마나 잘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정도의 실력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선수로 키운다는 것도 페르의 생각과는 무관한 것이다. 충분히 재밌게 배드민턴을 즐기기 충분한 실력인데 자칫 욕심으로 배드민턴이 지옥이 될 수도 있다.

모아의 꿈은 자신의 디자인 제품이 '대박'이 나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내년에 아시아 국가를 여행하는 것이다. 50만 크로나면 대학 때 학자금 대출도 다 갚고, 6개월 간 아시아를 여행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내년에 아시아 여행을 이룰 수 있게 됐는데, 모아는 그 꿈을 뒤로 미루고 더 많은 돈을 벌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에리히와 모아는 '라곰'의 전형이다. 무언가를 시작했고, 필요한 만큼의 성과를 얻었다. 물론 더 할 수도 있다. 선수가 된다거나 부자가 되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또 에리히와 모아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다른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에리히와 모아의 선택은 거기까지였다. '적당한, 알맞은' 성과를 얻은 그들은 그 다음의 일을 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유익한 일이라고 믿었다. 그게 스웨덴 사람들의 '라곰'이다.

   
▲ 스웨덴 스톡홀름의 랜드 마크인 스웨덴 왕궁. /사진=이석원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는 '라곰'의 정의를 '야심찬 계획보다는 충분히 실현 가능한 계획을 세우고, 삶의 작은 성취를 축하하며, 나를 아끼고 거절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라곰'을 프랑스의 '오캄(au calme)', 덴마크의 '휘게(hygge)', 그리고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확행(小確幸)'과 같은 개념이라고 말한다. 중국의 '중용(中庸)'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 사전적 의미가 무엇이든, 스웨덴 사람들에게 '라곰'은 굳이 인지되는 규범이거나 습성이 아니다. 그냥 삶이다. 세월이 지나고, 사회적 환경이 변하면 조금 씩 달라질 수도 있지만, 달라진들, 달라지지 않은들 의식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이다. 누구에게도 설명되지 않고 설명할 이유도 없는 자기 자신들이다. 

'라곰'의 의미를 장황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그건 아마도 스웨덴 사람이 아닐 것이다. 이제껏 만난 스웨덴 사람 중 "라곰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을 때 한결 같이 돌아오는 반응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한 쪽으로 기울이는 것 뿐 이었다. 그게 '라곰'이다. /이석원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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