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조한진 기자] “소재를 개발한 다음에 반도체 회사가 없다면 무슨 소용일까요.” 반도체 업계 관계자가 한숨과 함께 쏟아낸 말이다.

지난 4일부터 일본이 반도체·디스플레이 제조에 필요한 핵심소재의 대한국 수출 규제를 강화한 뒤 국내 반도체업체들의 속이 점점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있다. 총수부터 여러 관계자들이 백방으로 뛰고 있지만 안정적으로 일본산 소재를 확보할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고 있다.

   
▲ /사진=삼성전자 제공

반도체 제조사들은 “큰일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다. 그만큼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반도체 생태계의 뿌리가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도 점점 짙어지고 있다.

일본이 ‘무역보복’ 카드를 꺼낸 뒤 정부는 다양한 대응방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이 기업총수와 최고경영자(CEO)들까지 청와대로 불러 의견을 들었다. ‘국제여론전’ ‘소재 국산화’ 수입선 다변화‘ ’인수합병‘ 등이 회의 테이블의 단골 메뉴다. 명분 없는 일본의 수출규제 강화에 대한 쓴소리도 이어지고 있다.

원론적으로는 모두 맞는 말이다. 핵심 기술을 확보해 ’기술 무기화‘에 대응하고, 국제 자유무역에 질서에 역행하는 일본의 처사를 해외 무대에 알려 협상력을 키울 수 있다면 금상첨화 일 것이다.

반도체 공정은 핵심 소재 1~2가지만 빠져도 돌아갈 수 없는 구조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라인이 가동을 멈춘다면 글로벌 정보기술(IT시장)에 큰 충격파가 불가피하다. 미국의 IT 공룡들은 물론, 일본 기업들까지 피해가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미국·일본 기업들이 한국산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의 대체재를 찾을 수 없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그것은 또 아니다. 얼마간의 시장 혼돈과 품질의 문제가 있을 수는 있어도 중국과 대만, 일본 기업들의 물건을 가져다 쓸 수 있는 구조다.

당장 일본산 핵심 소재를 사용하지 못하면서 가장 피해를 볼 수 있는 국가는 결국 우리다. 몇 년 뒤 ’EUV 포토리지스트 국산화 성공‘이라는 타이틀의 기사가 나와도 이 감광액을 국내 반도체 공정에 사용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글로벌 IT시장은 분초를 다투면서 돌아가고 있다. ’골든타임‘을 놓치면 회복하는 데 몇 배의 시간이 필요하다. 아예 시장에서 도태될 수도 있다. 중국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우리의 밥그릇을 빼앗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다. 일본과 대만 역시 우리의 IT 경쟁력을 바라보는 시선이 우호적이지 않다.

   
▲ /사진=SK하이닉스 제공

시장은 냉정하다. 해외 IT 기업들이 우리 기업과 거래하는 것도 ’기술 경쟁력‘이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우리가 핵심소재 문제로 시간을 허비한다면 기존 거래사들은 중국, 대만행 비행기 티켓을 발권할 수도 있다. 결국 기술력이 떨어지면 경쟁국들의 배만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과는 ’가위바위보‘도 지면 안된다는 말이 있다. 과거사 등 국민정서상 일본과의 경쟁에는 ’절대승리‘라는 명제가 항상 붙는다. 그러나 그들이 가위를 내면 우리는 주먹을 내고, 장군을 부르면 멍군을 부를 수 있어야 균형을 맞추면서 승부를 이어갈 수 있다.

이번 일본의 무역보복은 기업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한·일 정부 모두 갈등의 골이 깊은 상황에서 명분 없이 한쪽이 먼저 발을 빼기도 어렵다. 아쉽지만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피해가 커지는 쪽은 우리다.

정부에게는 ’총선‘과 ’정권유지‘ 등 이번 사태와 연결된 다양한 고려 사항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와 국민들이 앞으로 어떻게 잘 살수 있느냐다. 치욕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도 때로는 필요하다. 상대가 꽃놀이 패를 쥐고 있는 것을 아는 상황에서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불나방이 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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