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슬로리딩' 다큐의 힘, 왜곡된 역사관 가진 어른 청년들 읽어봐야

   
▲ 조우석 문화평론가
실로 잘 만든 TV프로였다. 기획 좋고 콘셉이 살아있어 두 시간 방영 내내 거의 매 장면에서 지적(知的) 자극을 받았다. 지난 12일 저녁 EBS-TV '슬로 리딩, 생각을 키우는 힘' 3부작 다큐가 그랬다. 필자가 내린 잠정결론은 이렇다. "이 프로그램은 의미있는 방송 실험은 물론 교실 혁명의 새 지평을 함께 열었다." 왜 그럴까?
 

슬로 리딩(slow reading)이란 다독(多讀)과 달리 깊이 읽기를 뜻한다. 그냥 천천히 읽는 것은 물론 체험학습을 병행하면서 책에 몰입한다. 그 프로에서는 경기도 용인의 성서초등학교 5학년생 모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그들은 국어시간 한 학기 동안 문학작품 한 권을 읽어내는 대장정에 나섰다.
 

놀랍게도 학생들과 교사는 소설가 박완서의 성장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이하 <싱아>)를 붙잡았다. 그런 본격 작품을 코흘리개들이 읽어낸다고? 프로그램을 보는 순간, 그것부터 믿기지 않았다. <싱아>는 말로만 성장소설이지 박완서 문학의 백미에 속한다. 데뷔작 <나목(裸木)>을 포함한 박완서 문학의 원형이 모두 녹아있는 문제작이기 때문이다.

박완서 문학의 백미인 <싱아>를 척척 읽어내는 초등학생들

그런데도 학생들이 작품을 재미있게, 그리고 척척 읽어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의 변화도 눈에 띄였다. 좋은 문학을 만나 정신의 키가 훌쩍 크는 특별한 경험을 한 것이다. 학기 중간 박완서 선생의 따님(호원숙 씨)이 진행하는 특강도 인상적이었는데, 그가 칠판에 암호 같은 숫자 다섯 개를 썼다.
"1931, 1950, 1970, 1992, 2011"
 

이 다섯 개의 뜻을 모두 아는 학생이 있느냐고 묻자 모두가 다 안다는 표정이었다. 손을 든 여학생이 웃음 가득한 얼굴로 이렇게 밝혔다.
 

"1931년 박완서 선생님이 개성에서 태어난 해이구요. 1950년에는 <싱아>의 뒷부분에 나오든 6.25가 터졌습니다. 1970년 데뷔작 <나목>을 발표했고, 1992년에는 <싱아>를 출간했으며, 2011년에는 선생님이 돌아가셨어요."
 

EBS의 슬로리딩 다큐멘터리. 경기 용인의 성서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이 박완서의 성장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천천히 읽는 체험학습하고 있다.

대학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이런 장면이 그 프로에 가득했다. 한 학기 내내 현장에 카메라 놓고 찍은 EBS의 정성이 묻어났는데, 시청자 입장에서는 <싱아>를 읽고 말하는 학생들 표정이 실로 인상적이었다. 고백컨대 저토록 의젓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10대들의 모습은 본 적이 없다. 학원을 오갈 때의 기계적이고 지친 표정, 컴퓨터에 빠진 멍한 눈빛과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 이 다큐 프로는 위대한 교실혁명의 현장인데, 그 이상의 차원이 별도로 있다는 게 오늘 이 글의 요지다. 무슨 말인가? <싱아>라는 소설 자체가 2000년대 지금 어른들이 읽기에 딱 좋다. 이념논쟁에 찢기고, 틈 날 때마다 불거져 나오는 시대착오적인 친일(親日) 논쟁에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진 이 나라에 안성맞춤인 텍스트다.
 

<싱아>는 후속작 <그 산이 거기 정말 있었을까>와 함께 2부작 성장소설인데, 일제시대-6.25전쟁을 배경으로 왜곡되지 않은 근현대사가 담겨있다. 수록된 이야기는“우리 소설문학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년의 공간”(평론가 이남호의 말)을 담고 있다.

일테면 그 아름다움은 개성 옆의 촌동네 박적골을 둘러싸고 펼쳐진다. 주인공 박완서는 여고시절 방학 때 내려와 고향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한다. “박적골의 봄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은 처음 알았다. 한창 감수성이 피어날 열다섯 소녀였다. 동무 없이 몽유병자처럼 산과 들을 누볐다. 박적골 여자들처럼 종다래끼를 옆에 차고 다니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산길을 헤매다가 음습한 골짜기로 들어가게 됐다. 서늘하면서도 달콤한, 진하면서도 고상한, 환각이 아닌가 싶게 비현실적 향기에 끌려서였다. 그늘진 골짜기에 그림으로만 본 은방울꽃이 쫙 깔렸다.”

옛 낙원을 빠져나와 산업화의 신천지를 개척한 한국인의 억척
‘그 많던 싱아’가 지천인 박적골은 박완서 유년의 공간이자, 전 시대 낙원을 상징한다. 하지만 20세기 한국인들은 그곳을 빠져 나와야 했다. 그곳은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던 봉건적 구질서이기도 했다. 그곳을 용감하게 빠져 나와 새로 만든 낙원이자 삶의 터전이 산업화· 근대화로 드라마틱하게 탈바꿈한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소설에는 이 변화가 기막히게 포착돼 있다. 전쟁통에 미군PX에서 일했던 박완서가 묘사한 PX 풍경은 이랬다. “그 일대에는 사람들이 미친 듯이 꼬여들어 사고팔고 속고 속이고 훔치고 구걸하느라 마음껏 흥청대고 있었다. 우리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이국적 활기와,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천박의 근원지가 바로 PX였다.”

그때 미군PX 자리는 일제시대 미츠코시백화점이었다. 훗날 신세계로 변신했던 그곳은 남대문시장과 함께 대한민국 유통업의 1번지가 아니던가? 역사의 연속성이 신기할 따름이다. 박완서에 따르면 그 시절 PX물건, 미제물건의 위력은 엄청났다. 거기서 흘러나온 담배 럭키스트라이크· 카멜, 밀키웨이 초콜릿, 럭스 비누, 폰즈 크림의 힘으로 남대문시장 상권이 형성됐다. 일테면 스무 살 박완서가 그곳에서 어렵게 구한 초콜릿 깡통우유 ‘타디’를 “삐삐 말라 머리통만 크고 얼굴에 버짐이 허옇던” 조카들에게 타서 먹였다. 잠깐 새 살이 오르고 얼굴에 윤기가 흘렀다. "화려한 미제 포장지만으로 집안에 부티가 흘렀다"고 증언했던 것도 잊을 수 없다.
 

전쟁 초기 인공(人共) 치하 서울에 대한 묘사도 생생하다. 피난을 못 갔던 그녀는 수령 교시 따위를 읽는 민청학습에 밤이면 밤마다 시달리면서 ‘황폐의 극치’를 체험했다. 그게 어느 정도였을까? “나는 전쟁 중 생리가 멎었고,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반세기 전 서울을 무대로 잠시 만들어졌던 사회주의 지옥, 전체주의 지옥이 얼마나 최악이었는가에 대한 증언으로 이만큼 위력적인 게 없다.
 

결정적으로 <싱아>에는 일제시대 창씨개명 얘기도 나온다. 그의 집안은 일본 식 이름으로 바꾸지 않았다. 순전히 엄마의 고집이었을 뿐 반일 감정에 따른 저항행위 같은 게 아니었다. 당시 소녀 박완서의 속마음은 “하루에· 하나코 같은 이름이 좋았다”는 철없는 고백도 나오는데, 그 시대 일본인으로 살기를 강요당했던 분위기에 대한 정직한 고백임을 눈여겨봐야 한다.

지금 이념에 찢긴 이나라의 어른들이 박완서의 소설을 먼저 읽을 때

실제로 소녀 박완서는 숙명여고에 진학 때 친구와 함께 남산을 찾아가 합격을 기원했다. 남산에는 가장 큰 규모의 신사(神社)가 있었기 때문이다. 앞뒤를 잘라 놓고 읽으면 박완서는 순전히 친일파 소녀에 다름 아니지만, 당시엔 그게 조선인 소녀의 일상이고 풍속이었음을 잊으면 안 된다.
 

사실 그가 소설을 발표한 1990년대 초만해도 우리사회가 그렇게 경직되지 않았다. 역사 바로 세우기를 내세운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1993년)하기 한 해 전만해도 정형화된 기억을 심어주는 공식 역사책의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민중사관의 역사책들, 남로당 식 역사관의 책들이 친일파라면 부르르 떨며 단죄를 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그건 몇 해 전 나온 영문학자 유종호 연세대 명예교수의 성장기록 <나의 해방 전후>, <그 겨울 그리고 가을> 두 권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도 창씨개명 일화가 나온다. 그의 일본명은 야마모토 마사오였는데, 창씨개명을 거부한 학생은 충청도 시골학교에 한 명도 없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훗날 2000년대 초입 한 연세대 학생이 강의 때 저자에게 캐물었다.
 

“선생님, 왜 저항시인 윤동주는 창씨개명을 했던 것이죠?”
저항시인이 그랬을 리 없다는 ‘민족주의 공식’은 누가 심어줬을까? 그건 당대의 진실을 외면한 채 지금의 판단으로 옛 역사를 헤집어 놓는 우리 시대의 역사왜곡이 아닐까? 그래서일 것이다. 역사학자 이인호(현 KBS이사장) 선생은 유종호 교수의 <나의 해방 전후>와 <그 겨울, 그리고 가을> 같은 책을 요즘 대학생들에게 읽히고 있다. 정몽준 의원이 운영하는 아산서원 ‘역사와 문학’강좌에 두 책을 교재로 한다는 것이다.
 

왜곡된 역사관을 가진 젊은이들이 이런 책을 읽은 뒤 확 달라진다는 것인데, 초등학교 고학년까지도 이런 책을 접할 수 있다는 게 이번 EBS 다큐에서 새삼 확인된 셈이다. 소설책 몇 권이 세상을 바꿀 순 없다. 그러나 한국사회 혼란은 인문사회과학을 관통하는 지식정보의 오염 현상 탓이 크다.
 

이걸 바로 잡아줄 텍스트는 그리 많지 않은 게 현실이기도 하다.박완서의 성장소설 <싱아>와 <산>이 갖는 무진장한 가치를 새삼 일깨워준 EBS에 감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지금 두 소설을 반드시 읽어야 할 사람들은 이념에 찢기고 진영논리에 멍든 이 땅의 어른들이다. /조우석 미디어펜 논설위원,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