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니시오스 2세의 철학 스승…의심 많은 참주에 배신 살해 위협까지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 (42) - 시칠리아에서 꽃 피우지 못한 플라톤의 철인정치
플라톤(BC 427 ~ BC 347)의 『편지들』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플라톤의 여러 대화편에는 플라톤이 대담자로 직접 나서지 않는다. 이 책은 플라톤이 일인칭 화자로 직접 등장한 편지글을 모았다. 따라서 플라톤의 내밀한 생각과 사적 생활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사료이기도 한 작품이다.

길고 짧은 13편의 편지가 실려 있다. 다만 이 편지들 중에는 플라톤 저작 전문 연구자들 사이에서 위작 논란이 일고 있는 몇몇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의 해제 부분에서 각 편지별로 제기된 위작 시비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편지글을 플라톤이 직접 썼든, 아니면 그의 제자 중의 누군가가 썼든 그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일부 글에 대해 위작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이 편지글들이 플라톤의 철학과 현실에서의 실천적 지향을 상당부분 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고대는 물론 중세기까지 이 편지글들을 모두 플라톤의 진작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2300년 동안 계속 전수되며 많은 이들에게 읽혀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근대기에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위작 논란이 제기된 작품들이 몇 개 있지만, 역자의 설명처럼 일반 독자들은 전문가들의 위작 논의에 지나치게 민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당대 그리스 세계의 정치적 상황은 물론 정치가들과 플라톤의 관계를 살피게 해주는 이 편지글의 행간을 잘 음미할 필요가 있다. 특히 플라톤의 철학과 그가 구현하려고 애쓰던 지향이 무엇이었는지 탐색하며 읽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듯싶다.

이 책의 특별한 가치는 여기 담긴 편지글들이 하나하나 플라톤이 현실정치에 참여하여 자신의 철인정치를 구현해 보려고 시도하던 시기의 상황과 고민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편지글들은 그가 말년에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의 최대 도시였던 시라쿠사 참주 디오니시오스 2세의 요청에 따라 3차례나 시라쿠사를 방문하여 이 참주에게 정치철학을 전수하려 했던 특별한 시기에 이루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편지글들은 특정 주제에 대한 철학적 논의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정치적 사안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시라쿠사 군주에 대한 플라톤의 정치적 조언이 담겼고, 플라톤을 지지하고 후원하던 시라쿠사의 민주파 정치가 디온과 그의 추종자들과 나눈 내밀한 교신도 포함되어 있다.

플라톤은 아테네의 명망가 집안에서 태어났고 젊은 시절 자연스럽게 정치 일선에 나서려고 했었다. 하지만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패전한(BC 404) 이후 들어선 30인 참주정의 비민주적이고 폭압적인 정치를 보면서 그는 정치에 환멸을 느낀다. 더구나 참주정을 전복하고 들어선 민주정 지도자들마저 민중에 휘둘리고 급기야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무고하여 사형에 처하는(BC 399) 폭정을 겪으면서 플라톤은 아테네에서의 정치가의 꿈을 완전히 접는다.

플라톤은 교육기관 아카데미아를 창설하여 후진 양성에 매진하면서 바람직한 국가 통치에 대한 정치철학을 지속적으로 갈고 닦아나갔다. 『국가』, 『법률』과 같은 대작은 바로 이런 노력의 과정에서 플라톤이 통찰해낸 이상 국가 건설을 위한 정치철학의 진수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 아테네 학술원 앞에 있는 플라톤 좌상 ⓒ박경귀

플라톤이 덕성을 잃어가던 아테네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자신의 철인정치를 구현할 곳을 신천지를 찾게 된다. 플라톤이 훌륭한 철인교육을 통해 철인 정치가를 길러내려던 집념과 염원이 실험되었던 곳은 바로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였다. 플라톤은 시라쿠사의 젊은 참주 디오니시오스 2세를 철학교육을 통해 새로운 정치 체제를 만들어 낼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디오니시오스 2세와 인척 관계에 있던 정치적 실력자인 디온이 플라톤의 시라쿠사 방문을 강력히 요청한 것도 플라톤의 시라쿠사 방문에 한 몫 했다. 디온은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통해 조국 시라쿠사에 민주정을 세울 수 있길 염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기에 플라톤의 가르침을 따르며 철학 공부에 관심을 보이던 디오니시오스 2세는 날이 갈수록 공부엔 뒷전이고 디온과 플라톤의 우호적 관계에 대한 질시와 견제로 과민해져 갔다. 급기야 플라톤의 후광을 입은 디온이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 자신을 축출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과 두려움을 갖기 시작한다. 디온의 민주파와 반대에 섰던 주변 중상모리배들의 이간은 이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결국 디온과 디오니시오스 2세 사이가 틀어지고 디오니니오스 2세의 플라톤에 대한 경계심은 더욱 높아진다.

디오니시오스 2세는 유명한 현인 플라톤에게서 철학을 배운다는 명분을 얻는데 관심이 두었을 뿐 지혜 사랑에 대한 진정한 열정은 부족했다. 다만 플라톤을 내칠 경우 현인을 멀리했다는 비난을 받을 것을 우려해 겉으로만 존중하는 척 했을 뿐이었다. 결국 디오니시오스 2세는 디온에게 모반 혐의를 씌워 국외로 추방한다. 지적 허영심이 가득하고 오만했던 참주의 태도에 실망한 플라톤은 결국 아테네로 돌아간다.

플라톤의 마지막이자 세 번째 시라쿠사 방문은 해외 망명 중이던 디온과 이탈리아 그리스 식민 도시 타렌툼의 아르키타스의 간곡한 요청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플라톤이 디오니시오스를 계몽할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다.

플라톤 역시 디온 추방을 철회하겠다는 디오니시오스 2세의 약속을 믿고 시라쿠사로 건너갔지만, 그와의 관계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끝내 결별하게 된다. 플라톤은 사실상 참주에게 연금된 상태에서 아르키타스와 타렌툼의 친구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시라쿠사를 빠져나와 아테네로 귀국한다. 플라톤은 시라쿠사에서 거의 살해될 위험 수준까지 처했었다. 참주에게 철학을 가르쳐 '아름다운 철인통치'를 구현해 보려던 플라톤의 정치적 비전은 결국 실패하고 만 것이다.

디온은 플라톤이 시라쿠사 방문에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오자 크게 실망한다. 게다가 시라쿠사에 있는 자신의 전 재산마저 디오니시오스 2세에게 몰수당하자, 디온은 반군을 조직하여 시라쿠사를 탈환하고 디오니시오스 2세의 오랜 참주정을 끝장낸다. 하지만 디온 역시 시라쿠사를 탈취한지 4년 만에 자신의 부하인 칼리포스파에게 살해되면서 시라쿠사는 다시 혼란에 빠진다.

   
▲ 시라쿠사의 원형극장, 바위산에 조각된 하나로 이어진 거대한 조형작품이다. 바위산의 경사를 이용하여 객석을 하나하나 깎아서 만들었다. ⓒ박경귀

   
▲ 시라쿠사에 있는 ‘디오니시오스의 귀’라는 별명이 붙은 동굴의 내부이다. 당시 감옥으로 쓰였다고 한다. ⓒ박경귀

   
▲ 기원전 5세기에 세워진 아테나 신전의 도리아식 기둥 20개를 활용하여 7세기에 건축되고 16세기에 개축된 시라쿠사 대성장(두오모) 건물이다. 플라톤이 시라쿠사에 머물던 4세기경에는 장중한 아테나 신전의 모습을 온전하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박경귀

   
▲ 시라쿠사 대성당(두오모)의 측면이다. 기원전 5세기에 세워진 아테나 신전의 도리아식 기둥이 이후에 덧붙여진 건축부재 사이로 그대로 남아있다. ⓒ박경귀

   
▲ 현재의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항구, 2400년 전의 플라톤의 희망과 회한이 서려있는 곳이다. ⓒ박경귀

여러 편지에는 플라톤과 디오니시오스 2세 사이에 서서히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형성되어가는 아름다운 모습이 잠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러 차례 신의를 저버리는 디오니시오스 2세의 행태에 실망하여 플라톤은 그의 태도를 ‘늑대의 우정’이었다며 차갑게 비난한다. 반면 “시라쿠사 사람들이 최선의 법에 따라 살아가는 자유인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디온에 대해선 따뜻한 애정 어린 충고를 자주 보낸 것을 볼 수 있다.

역사에 가정은 소용없는 일이지만, 만약 디오니시오스 2세의 참주정을 붕괴시킨 민주파 디온이 살해되지 않고 좀 더 오래 시라쿠사를 이끌 수 있었다면 플라톤의 철인통치가 어느 정도 구현될 가능성도 높지 않았을까. 디온은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이해하고 충실히 수행하려는 의지와 역량을 어느 정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라쿠사는 민주파의 정치적 기반이 확고하지 못했고 잇단 정변으로 정치적 혼란에 빠져 안정된 민주정을 확립하지 못했다.

편지글에는 플라톤의 자전적 이야기가 상당히 많이 진술되었다. 그가 정치에 입문하려다 포기하게 된 배경도 담겼다. 또 군사 반란에 성공하여 정권을 잡은 민주파 디온과 디온의 사후 다시 정권을 잡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당부하는 통치의 방략에는 플라톤이 『국가』와 『법률』에서 전개한 정치철학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플라톤은 통치자와 철학자가 우애와 친교를 유지하며 “권위를 가진 법”을 지주 삼아 우정의 결속으로 나라를 통치해 나가도록 권고하고 있다. 또 기본적으로 폭력적 방법에 의한 정치체제 변혁에는 반대했다. 플라톤이 디온의 추종자들에게 당부한 대목에서 이런 점이 명확히 드러난다.

“설사 사람을 추방하거나 죽이는 일 없이는 최선의 정치체제를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일지라도, 정치체제의 변혁을 위한 폭력을 조국에다 가해선 안 됩니다. 그때는 오히려 평온을 유지하면서 자신과 나라를 위해 최선의 것을 기원해야만 합니다.”

플라톤은 폭력이 폭력을 부르는 악순환을 경계했다. “싸움에 이긴 자들이, 여러 사람들을 추방하고 살해하는 식으로 분풀이를 한다거나 복수를 위해 원수들에 대해 앙갚음하는 일을 그만두고, 오히려 스스로에 대해 절제력을 가진 자로서 자기들 못지않게 패자들에게도 만족을 가져다주는 공동의 법률을 제정”할 것을 권고했다. 정파적 파벌 싸움과 적대관계에서 나오는 증오와 불신이 끊임없이 나라를 분열시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시라쿠사에서의 정치적 실험의 실패는 철학자적 자질과 역량을 갖추지 못한 참주 디오니시오스 2세에 대한 그의 과도한 자기 충족적 희망과, 중상과 모략이 지배하는 냉혹한 현실정치의 부조화에서 초래된 결과였다. 디오니시오스 2세는 철인정치가의 자질을 갖고 있지 못했고, 참주 주변 정치가들이 자신들과 적대적 관계였던 민주파 디온의 후견인 역할을 한 플라톤에 대한 의식적 배척도 부정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아무튼 당대 최고의 현인이었던 플라톤의 철인정치의 구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편지 곳곳에서 이상적 정치 모델에 대한 플라톤의 열정과 희망, 그리고 아쉬움과 좌절감이 언뜻 언뜻 보인다. 이 책은 플라톤의 정치철학과 구상이 현실 정치가의 편견과 몰이해, 집권적 권력욕과 정파적 파벌의 복잡한 이해관계에 치여 제대로 착근되지 못했던 시대적 상황과 한계를 잘 보여준다. 플라톤의 철인정치가 구현될 현실 국가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의 정치 현실을 보면 요원한 일이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 ☞추천도서: 『편지들』, 플라톤 지음, 강철웅․김주일․이정호 옮김, 숲(2012), 2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