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칼 주총, 산업은행 의중대로 안건 통과
산은, '디폴트' 아시아나항공 파산·M&A 등 처리방안 고민
한진그룹에 아시아나항공 인수 의사 타전…수락 이후 지원
조원태 대한항공 사내이사 재선임안, 국민연금 반대에도 가결
'특혜 프레임' 국민연금 수탁위원 중 상당수, 참여연대·민주노총 출신
"시민단체 출신 수탁위원들, 산은이 조 회장 대신 싸워준다고 여겨"
"반기업·반시장적 수탁위원들, 전문성 없고 신뢰도 낮다"
[미디어펜=박규빈 기자] 한진칼 주주총회가 한국산업은행의 의중대로 끝난 가운데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은 국민연금공단 반대를 뚫고 대한항공 사내이사 재선임에 성공했다. 물론 산업은행과 국민연금이 대놓고 신경전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이처럼 현 한진그룹 경영진에 대한 찬성과 반대 입장이 갈린 건 근본적으로 양 기관의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인수·합병(M&A)에 대한 관점이 달라서다.

   
▲ 한국산업은행·조원태 한진그룹 회장·국민연금공단 전주 본사./사진=연합뉴스·대한항공 커뮤니케이션실


두 기관의 입장차가 생기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2019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아시아나항공 회계감사를 맡았던 삼일회계법인은 '한정' 감사의견을 내놨다. 리스 항공기 정비의무와 관련한 충당부채가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이후 같은 해 4월 10일에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산은 등 채권단에 자구계획안을 제출했지만 다음날 퇴짜를 맞았다. 4월 15일,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아시아나항공 매각을 선언하며 채권단에 수정 자구계획안을 냈다.

아시아나항공은 시장에 매물로 나온 이 시점에 돈을 벌어도 버는 상태가 아닌 디폴트 상태였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한계기업이었다. 2019년 4월 23일, 아시아나항공 채권단은 아시아나항공을 정상화하기 위해 1조7300억원을 긴급 투입하기로 했다. 아시아나항공 돈줄과 명줄을 쥐고 있던 산은이 파산을 포함한 처리방안을 놓고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M&A 일러스트./사진=연합뉴스


산은은 아시아나항공 인수 의사를 밝혔던 HDC현대산업개발과도 접촉했지만 지지부진하다 결국 협상이 결렬됐다. 때문에 아시아나항공이 천덕꾸러기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됐지만 이내 국내 항공업계 맏형 대한항공이 아시아나항공을 전격 인수한다는 발표가 이어졌다.

수많은 부실 기업 설거지를 도맡아온 산은은 항공사 경영 경험이 없었고 장부상 13조원대의 부채를 지닌 아시아나항공은 그 자체로 부담이었다. 장고를 거듭한 끝에 산은은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통합안을 계획하게 되고 한진그룹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1969년 3월 파산 직전의 국영기업이던 대한항공공사를 한진상사가 인수하던 것과 꼭 같은 모양새다.

산은 역시 대한항공에 의한 항공시장 독과점과 같은 특혜 논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기획재정부·국토교통부 등 정부 눈치를 봐야해 정무적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던 입장이다.

아시아나항공 본사 소속 임직원은 9000여명이나 협력사까지 합하면 5만명 가량 된다. 현 문재인 정권은 각종 제도를 수정하면서까지 일자리 정부를 표방해왔다. 그랬던만큼 아시아나항공 파산 처리로 이들이 하루 아침에 거리에 나앉게 될 경우 산은이 감당해야 할 후폭풍은 상당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사진=대한항공 커뮤니케이션실 제공


이와 같은 복잡다단한 역학관계에 따라 결국 산은은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에 아시아나항공 인수 의사를 타진했고, 한진칼 경영 참여 차원에서 지분을 매입해 지난달 26일 한진칼 제8기 정기 주주총회에서 46개 안건에 대해 입장을 내 조 회장을 지지하게 된 것이다.

한편 국민연금은 한진그룹과 관계가 껄끄럽다. 2019년 3월 26일,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는 회의를 열어 일우 조양호 선대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선임건에 반대 의결권을 행사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수탁위는 기업가치 훼손·주주권 침해를 이유로 들었는데 주주권행사분과 위원 간 의견차가 극심해 결론 도출에 난항을 겪어 책임투자분과 위원까지 급히 부를 정도로 진통을 겪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로써 조양호 선대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선임건은 부결됐다.

   
▲ 서울 강서구 공항동 대한항공 본사에서 제59기 정기 주주총회를 주재하는 우기홍 사장./사진=대한항공 커뮤니케이션실 제공


지난주 26일에 열렸던 대한항공 제59기 정기 주주총회에서도 국민연금 수탁위는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선임건에 대해 반대 목소리를 냈다. 이유는 역시나 마찬가지로 기업가치 훼손·주주권 침해. 조원태 회장이 아시아나항공 인수 결정을 내려 대한항공의 부채가 늘 것이며, 실사도 진행하지 않아 계약상 불리한 내용 우려로 기업가치가 떨어져 주주들의 이익을 빼앗아 간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조 회장은 82.84%라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대한항공 사내이사 재선임에 성공해 국민연금의 반항은 당랑거철(螳螂車轍)로 끝나고 말았다. 지난해 정기 주총에서 이사 선임 방식을 참석 주주 ⅔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특별 결의 사항에서 보통 결의 사항으로 변경한 것 외에도 시장은 아시아나항공 인수 자체를 호재로 봐 조 회장을 적극 지지했기 때문이다.

이는 올해 1월 열린 임시 주총에서 아시아나항공 인수 목적의 발행 주식 총수 확대 정관 변경 안건에도 국민연금은 반대표를 던졌지만 69.98%로 정관 변경 건이 가결된 점에서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대한항공이 최근 3조31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단행하자 일반공모 경쟁률이 518.26대 1을 기록했고 예상 신주 발행가는 1만4200원을 뛰어넘어 1만9100원으로 급상승했다. 일반적으로 유상증자가 이뤄지면 지분율 희석 탓에 주가가 떨어지나 대한항공 주주들이 조 회장에 대해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게 중론이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노·사·가입자 대표 위원 9인으로 구성된 국민연금 수탁위는 최근 회의에서 5대 4로 조원태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선임에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수탁위가 시장 흐름을 제대로 읽고 있는지, 전문성을 갖춘 게 맞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된다.

대한항공이 아시아나항공 실사를 굳이 하지 않은 이유는 국내 항공업계 사정에 밝기 때문이었다. 대한항공 관계자가 "아시아나항공 제반 경영 상태는 손바닥 안에 있다"고 언급한 건 이와 궤를 같이 한다.

   
▲ 인천국제공항 주기장에 세워진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여객기들./사진=연합뉴스


국민연금은 조 회장이 대한항공 사내이사로 재선임되면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추진해 대한항공의 기업 가치가 하락할 것이라며 반대하면서도 이달 초 대한항공 주식 보유량은 8.11%에서 13.87%로 5.76% 늘리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였다. 기업 가치 훼손을 우려하며 주식을 추가 매수하는 건 이익 증대를 바란 것인 만큼 국민연금은 '입은 아니라고 하나 몸은 정직하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게 됐다.

국민연금이 이처럼 일구이언의 행보를 보이는 건 기금운용위원회와 수탁위로 분할돼 있어서다. 기금운용위는 실제 어느 기업에 투자할지를, 수탁위는 기업 지배구조 등에 대해 의견을 낸다.

수탁위는 노·사·가입자 대표 3인씩 총 9인으로 이뤄져있는데 노사 대표들은 입장이 극명한 만큼 사실상 가입자 대표가 캐스팅 보트를 쥐는 경우가 많다. 가입자 대표이자 공인회계사인 홍순탁 위원은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실행위원과 금융연대 위원을 겸직하고 있다. 이상훈 변호사는 민주노총이 추천했다.

항공업계 한 관계자는 "좌편향적 시민단체 출신들은 산은이 무조건 조 회장의 백기사를 자처한다는데 한진그룹에 대한 현 정권의 태도를 보면 가당키나 하느냐"며 수탁위에 회의적인 시각을 나타냈다. 그는 "회사가 망할지도 모르는 판국에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결정한 것 아니냐"며 "산은이 조 회장의 이익을 대변해준다는 '특혜 프레임'은 억지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손발이 맞지 않는 국민연금이 이와 같이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자 전문가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항공업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전문성과 자격을 이들로 구성된 갖춘 해외 연기금 기관과는 달리 함량 미달 인사들이 기업과 시장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국민 노후 자금의 거취를 결정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반기업적·반시장적 사고를 가진 시민단체 출신들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