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추위와 함께 시간은 어느덧 2025년 끝자락을 알린다. 거리는 떠들썩하니 연말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우리 의식의 시간은 여전히 1년 전 그날, 2024년 12월 3일에 멈춰 서있다. 대한민국을 요절낼 뻔했던 ‘비상계엄’, 그 악몽이 할퀴고 간 상처는 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공포이고 아프다. 시공간은 분명 바뀌었지만 시대의 공기는 여전히 엄혹한 겨울이다.
청산은 미래로 가기 위한 출발점
자연의 이치는 명징하다. 혹독한 겨울이 끝나지 않고선 결코 따스한 봄이 시작될 수 없다. 부산하게 봄 흉내를 낸다고 해서 얼어붙은 대지가 녹는 것은 아니다.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 헌정을 파괴하려 했던 잔재들을 청산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는 단 한 발자국도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처를 대충 덮는 어설픈 봉합이 아니라 환부를 정확히 도려내는 철저한 ‘청산(淸算)’이다.
청산은 단순히 정적을 제거하거나 보복을 가하는 정치적 수사가 아니다. 청산은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 20대와 70대, 호남과 영남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미래로 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출발점이다.
시대의 요청인 청산을 위해 우리는 무섭고 부끄러워서 외면하려던 어두운 과거를 직시해야 한다. 지난 1년 동안 사회 곳곳에 자리한 내란동조세력이 썩은 살을 동여매며 현란한 법기술로 본질이 흐리는 사이 책임져야 할 반(反)헌법적 무리가 면죄부를 꿈꾸는 장면을 목도 했다. 그들의 반헌법적 행위들이 상처를 악화시키고 공동체에 치명상을 입히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우리는 썩은 살은 도려내야 새살이 돋는다는 사실을 안다. 수술이 두려워 메스를 대지 않는다면, 결국 생명마저 위험하다는 사실도 잘 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겪는 혼란은 수술을 거부한 채 진통제로 버텨온 시간의 청구서일터이다.
헌정 파괴의 잔재를 둔 채 국민 통합을 논하는 것은 기만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한다. 더구나 국가의 명운이 걸린 사법적 판단의 지연은 헌정의 연속성을 위협한다. 헌정 파괴라는 폭주를 멈추기 위해서는 단호한 단죄가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진행 중인 내란 관련 재판은 국민의 인내심을 시험한다.
엄혹했던 지난겨울의 기억을 역사라는 이름의 지혜로 바꾸기 위해, 우리는 지금 고통스럽더라도 메스를 들어야 한다. 그것이 살아남은 우리가 헌정을 지키다 쓰러져간, 혹은 고통받은 이들에게 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이자,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이다. 그리고 그 책무는 법원에 맡겨져 있다. 국기 문란 사태 앞에서 사법 절차는 거북이걸음으로 답답하다. 관련자 처벌은 다음 해로 넘어가고 법원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극에 달한 상태다. 지연된 정의를 신속히 바로잡는 것은 오랜 겨울을 종식하고 봄을 맞이하기 위한 첫 단추다.
불확실성의 안개를 걷어내야 여야 모두가 산다
사법부의 침묵 혹은 지연은 그 자체로 정치적 불확실성을 키우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 ‘불확실성의 지옥’에서 벗어나는 신속한 판결은 국민과 여야 모두에게 기회이다.
여권은 ‘도덕적 승리’를 넘어 ‘역사의 승자’로 공인받을 기회이다.
계엄 비호세력이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명하고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여권은 이를 반박하는 데 국정에 쏟아야 할 동력을 소모하고 있다. 이는 집권 여당이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와 싸우는 형국이다. 법원의 판결이 확정되면 여권은 ‘민주주의를 수호한 승자’로서 국정을 주도할 수 있다.
특히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가해자를 용서할 수도, 포용할 수도 없던 여권은 국민 통합을 이야기할 수 있는 ‘통치자의 여유’를 갖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여권이 지루한 공방전을 끝내고 도덕적 우위를 앞세워 미래지향적 통치를 시작한다면 국민이 크게 반길 일이다.
야권은 회피할 수 없는 ‘죗값’을 치름으로써, 정치적 부채를 청산하고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설 명분과 실리를 챙길 수 있다. 무엇보다 짓누르던 정당해산의 공포와 정치인 사법처리 리스크에서 벗어날 계기로 삼을 수 있다.
또 새로운 리더십이 들어서는 것과 상관없이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눈앞의 지방선거와 차기 집권을 위한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다. ‘내란 동조세력’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정책과 민생으로 승부하는 정상 정치를 회복할 수 있다.
오롯이 상대의 몰락에 승부하는 ‘현실부정 정치’가 아니라, 실력과 비전으로 국민을 설득하는 경쟁의 장으로 들어서게 된다. 이는 보수의 건전한 혁신을 강제하고 틀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기후의 속절없는 변덕으로 봄의 시작을 특정할 수 없으나 분명한 자연이치는 겨울이 끝나야 봄이란 사실이다. 봄맞이에 나서자.
미디어펜=김진호 부사장겸 주필
[미디어펜=김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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