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동하 기자]국내 석유화학 업계가 사상 초유의 셧다운 도미노 위기에 빠졌다.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로 기초 원료인 나프타 공급망이 마비되면서 에틸렌 스프레드(마진)가 원가를 역전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여기에 롯데케미칼과 LG화학마저 고객사에 '불가항력' 선언 가능성을 공식 통지하며 업계에 짙은 전운이 드리우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국내 정유업계의 원료 내재화 우려까지 겹치면서 자체 정제 설비가 없는 순수 화학사들은 사면초가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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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로 기초 원료인 나프타 공급망이 마비되면서 국내 석유화학 업계가 사상 초유의 셧다운 도미노 위기에 빠졌다. 사진은 석유화학업체들이 밀집해 있는 여수산업단지 전경./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
12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롯데케미칼과 LG화학은 주요 고객사들에게 "미국과 이란의 무력 충돌 여파로 원료 수급에 극심한 차질을 빚고 있다"며 제품 공급 불가항력 발생 가능성을 공지했다. 롯데케미칼은 복수의 기초 소재 제품군에 대해, LG화학은 친환경 가소제인 디옥틸 테레프탈레이트(DOTP) 수급에 제동이 걸린 것으로 확인됐다.
'불가항력'은 전쟁, 천재지변 등 단일 기업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요인으로 인해 계약된 제품을 제때 공급하기 어려울 때 내리는 법적 조치다. 이를 선언하면 추후 계약 불이행에 따른 배상 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다.
앞서 롯데케미칼과 DL케미칼의 합작사인 여천NCC가 제품 공급 이행 지연을 통보한 데 이어, 업계를 대표하는 기업들마저 연쇄적으로 한계 상황에 도달한 형국이다. 원료 자체를 구하지 못하거나, 채산성이 완전히 무너져 공장을 돌릴수록 손해가 나는 시점인 것을 그룹 차원에서 공식화한 셈이다.
이같은 상황의 원인은 극단적인 원료가 폭등에 따른 '마이너스 마진' 고착화다. 최근 중동 리스크가 격화되며 기초 원료인 나프타 가격은 전주 대비 60% 이상 폭등해 톤당 1009달러를 돌파했다. 반면 최종 제품인 에틸렌 가격은 중국발 범용 설비 공급 과잉 여파 등으로 860달러 선에 머물고 있다. 원재료를 사 오는 가격이 최종 생산된 제품의 판매 가격을 훌쩍 추월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 결과 석유화학 업계의 수익성을 가늠하는 핵심 지표인 에틸렌 스프레드는 톤당 -149달러를 기록했다. 업계에서 통상적인 손익분기점으로 보는 250~300달러 선이 붕괴된 것을 넘어, 1분기 평균(50~80달러)마저 넘어섰다. 생산 라인을 가동할수록 막대한 적자가 회사 장부에 찍히는 구조적 함정에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나프타 공급망을 둘러싼 대내외적 위기가 순수 화학사들의 목줄을 조이고 있다. 국내 석유화학 업계는 연간 필요 나프타 물량의 절반가량을 해외 수입에 의존하며, 이 수입 물량의 무려 54%가 중동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 최근 이란의 기뢰 설치 움직임 등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가시화되면서 당장 공장에 투입할 수입망 자체가 끊길 위기다.
나머지 절반의 수급을 쥐고 있는 국내 정유사들의 움직임은 화학업계의 더 큰 공포 대상이다. 최근 정유사들은 중동발 지정학적 불확실성과 치솟는 원유 도입 프리미엄 등 원가 부담에 대응해 원유 정제 설비(CDU) 가동률 조정을 신중하게 저울질하고 있다. 일각에선 최악의 경우 내수 안정을 위한 정부의 조건부 수출 통제 시나리오까지 거론되며 시장 불안감을 키우는 실정이다.
문제는 이러한 요인들로 정유사들의 가동률이 하락해 나프타 생산량 자체가 줄어들 경우다. 석화업계는 정유사들이 생산된 나프타를 외부에 팔지 않고 에쓰오일 샤힌프로젝트, GS칼텍스 MFC 등 자사 석유화학 시설에 우선 투입하는 '원료 내재화'에 나설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100% 외부 수급에 의존해야 하는 롯데케미칼, 대한유화, 여천NCC 등 순수 화학사들은 수입과 내수 조달이 동시에 막히는 끔찍한 시나리오에 직면했다.
출혈을 견디다 못한 주요 화학사들은 1분기 공장 가동률을 대폭 낮추고, 하반기로 예정됐던 정기보수(T/A) 일정을 상반기로 조기 단행하며 사실상 공장 가동을 멈추는 '버티기'에 들어갔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ICIS는 한국의 나프타분해설비(NCC) 가동률이 지난달 80% 수준에서 이달 마지노선인 70%마저 붕괴된 69%까지 추락할 것으로 전망했다. 석유화학 공장의 셧다운은 플라스틱, 섬유, 자동차 부품, 건설 자재 등 수많은 하위(다운스트림) 산업의 연쇄적인 생산 차질과 원가 상승으로 직결된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정부는 비상경제장관회의를 열고 나프타 대체 수입원 확보와 재정·금융 지원 방안 마련에 착수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중동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단기적인 처방으로는 산업 전반의 셧다운 사태를 막기 역부족이라는 회의론이 감돌고 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정부가 당장의 주유소 기름값 안정에만 집중하느라 나프타 수급 등 국가 산업계의 근본적인 위기에는 관심이 부족해 보인다"며 "현재 석유화학 업계는 단순한 업황 악화를 넘어선 구조적 최악의 상황"이라고 말했다.
[미디어펜=김동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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