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 올라도 1500원 초강달러에 외화환산손실 '눈덩이'
나프타 1009달러·에틸렌 -149달러…석화 셧다운 위기
샤힌 프로젝트부터 SAF까지…정유업계 밸류체인 고도화
[미디어펜=김동하 기자]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가 확산하며 국제 유가가 고공행진 하고 있지만, 국내 정유업계에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통상적으로 유가 상승은 재고평가이익으로 이어져 실적 호재로 작용하다. 그러나 원·달러 환율이 1500원 선에 육박하는 초강달러 현상과 전방 산업인 석유화학 업계의 셧다운(가동 중단) 가능성까지 제기되면서 정유업계 밸류체인 전반이 구조적인 붕괴 위기에 직면했다.

   
▲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가 고조되며 국제 유가가 고공행진 하고 있지만 1500원에 육박하는 원·달러 환율과 석화업계 셧다운 가능성에 국내 정유업계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사진은 울산산업단지 전경./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17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정유 4사(SK이노베이션·GS칼텍스·에쓰오일·HD현대오일뱅크)는 환차손과 나프타 수요 위축을 극복하기 위해 기존 밸류체인을 재편하며 체질 개선을 통한 생존 승부수를 띄웠다.

현재 정유업계를 압박하는 가장 큰 부분은 1500원에 달하는 원·달러 환율이다. 국내 정유 산업은 원유 수입 대금 전액을 달러로 결제하는 밸류체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유가가 오르는 상황에서 환율마저 급등하면 정유사들이 원유 도입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원화 환산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이는 곧 막대한 외화환산손실로 이어진다. 대규모 원유를 수입하기 위해 막대한 외화 부채를 짊어지고 있는 정유사 특성상 환율 상승은 재무제표상 부채 규모를 장부상으로 급증시켜 영업외손실을 키운다. 유가 상승으로 얻은 재고평가이익이 장부상 환차손으로 증발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셈이다. 이로 인해 정유업계는 배당 축소 등을 우려하는 주주 및 투자자 등 핵심 이해관계자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파생상품을 활용한 환헤지(Hedge) 전략을 전면 재점검하고 선제적인 유동성 확보에 나섰다.

정제마진 하방 압력도 심각하다. 정유사의 든든한 수요처였던 국내 석유화학 업계의 한파가 정유 산업 발목을 잡는 형국이다. 정유 공장에서는 원유를 정제해 휘발유, 경유, 항공유 등과 함께 석유화학의 기초 원료인 나프타를 생산해 화학사에 공급한다.

하지만 최근 글로벌 나프타 가격이 톤당 1009달러를 돌파하며 원가 부담이 커졌다. 반면 화학제품의 수익성 지표인 에틸렌 스프레드(에틸렌-나프타 가격차이)는 손익분기점인 250달러에 한참 못 미치는 -149달러까지 내렸다. 공장을 돌릴수록 적자가 쌓이는 상황에 처하자 석화기업들은 정기보수를 앞당기거나 설비 가동률을 최저치로 낮추며 셧다운 카드까지 검토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석화업계의 셧다운이 현실화할 경우 이는 곧 정유사가 생산한 나프타의 수요 절벽을 의미한다. 나프타 재고가 쌓이면 정유사는 전체 공장(CDU)의 가동률을 임의로 낮춰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며, 이는 전체 고정비 부담을 증가시켜 정유 부문의 수익성을 갉아먹는 악순환으로 연결된다.

시장 구조 붕괴 우려 속에서 정유 4사는 각기 다른 밸류체인 고도화 전략을 가동하며 돌파구를 마련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공정 유연성 극대화와 주주가치 방어에 집중한다. 석유화학 자회사의 가동률 하락에 맞춰 정제 설비에서 생산되는 나프타 비중을 선제적으로 줄이고, 마진이 상대적으로 견조한 항공유와 경유 중심의 수율 최적화 전략을 펼쳤다. 적극적인 환헤지 및 운전자본 통제를 통해 재무 건전성 방어에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GS칼텍스는 올레핀 생산시설(MFC)을 앞세워 원가 경쟁력을 증명했다. 나프타 대신 정유 공정에서 발생하는 액화석유가스(LPG), 부생가스 등 저렴한 대체 원료를 융통성 있게 투입해 화학제품 생산 단가를 낮추는 구조적 우위를 점했다. 합작사인 미국 셰브론의 글로벌 네트워크 십분 활용해 원유 도입선을 다변화하며 중동발 공급망 리스크도 완충하고 있다.

에쓰오일은 최대주주인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와의 확고한 동맹을 바탕으로 원유 조달 밸류체인 불확실성을 차단하고 있다. 나프타 수요 감소라는 구조적 한계 돌파를 위해 원유를 정제해 나프타를 거치지 않고 직접 화학제품으로 전환하는 TC2C기술 기반의 '샤힌 프로젝트' 가속화에 전사적 역량을 쏟고 있다.

HD현대오일뱅크는 초중질원유 고도화 설비를 통해 원가 압박을 돌파하고 있다. 값싼 초중질원유를 들여와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만드는 원가 방어력을 발휘한다. 화학 계열사를 통해 구축한 중질유 석유화학 시설(HPC) 역시 나프타 대신 탈황중질유를 주원료로 사용해 시장 악재를 피했다. 그룹 내 비상장사라는 특성을 살려 단기 배당 압박에서 벗어나, 지속가능항공유(SAF) 등 미래 친환경 밸류체인 전환에 대규모 자본을 과감하게 투자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정유 4사가 겪고 있는 상황은 과거 유가 사이클에 따른 일시적 등락이 아닌 글로벌 공급망 불안과 전방 산업 위기가 결합된 산업 생태계의 거시적 위기"라며 "각사의 인프라와 이해관계자 네트워크를 활용한 근본적인 체질 개선에 성공해야만 생존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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