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가 인하·고금리·상장요건 압박 속 안정 수익 전략 본격화
배당 확대·지배구조 개편 병행…사업 다각화 두고 문어발 우려
[미디어펜=박재훈 기자]지난 26일 국내 제약·바이오 상장사들이 일제히 정기 주주총회를 열고 새로운 수익원 발굴을 시사했다. 건강기능식품과 화장품은 물론 세차장 운영, 폐타이어 수집업, 부동산 임대업까지 새로 정관에 올라오면서 본업과는 결이 다른 사업으로 확장 의사를 보인 것이다. 약가 인하와 고금리, 상장유지 요건 압박 속에서 제약사들이 R&D(연구개발)가 아닌 현금창출형 신사업을 물색하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 R&D 부담이 커진 제약업계 내부에서 새로운 캐시카우를 창출하려는 움직임이 확대되고 있다./사진=제미나이


◆세차장·부동산 등 비의료 영역까지…신약 개발까지 버티기

30일 업계에 따르면 3월 마지막 주 대웅제약, JW중외제약, 광동제약, 동화약품, 국제약품, 동아에스티, GC녹십자, 명인제약 등 수십 개 제약·바이오사가 같은 날 주주총회를 열고 배당과 정관 변경 안건을 동시에 상정했다. 상당수 회사가 기존 의약품 제조·판매에 더해 건강기능식품과 화장품, 동물의약품 등 인접 사업을 사업목적에 추가했다.

여기에 더해 일부 상장사는 부동산 임대업, 세차장 운영, 폐기물·폐타이어 수집업 등 비의료 영역까지 사업 범위를 넓히며 수익 다각화에 나섰다. 표면적으로는 라이프스타일·헬스케어와 연계할 수 있다는 명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경기 변동에 덜 민감한 현금창출형 사업을 정관에 미리 올려 두는 보험 성격이 강하다는 평가다.

바이오벤처와 중소 제약사들은 AI(인공지능)·플랫폼·로봇 등 기술 기반 신사업으로의 확장도 서두르는 모습이다. 일부 기업은 AI 기반 맞춤형 배지 개발 플랫폼, 미용·피부개선 주사제, 바이오의약품 제조공정 위탁서비스 등 신사업을 한 번에 여러 개 추가했다. 이외에도 의약품 개발용 AI 솔루션과 AI 적용 기기, 로봇·하드웨어·소프트웨어 제조·판매까지 정관에 담아 ‘AI·로봇 기업’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신약 임상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플랫폼·솔루션 매출을 확보하겠다는 계획이다. 전통적인 제약 모델만으로는 성장성과 수익성을 동시에 담보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반영된 행보인 셈이다.

해당 움직임 배경에는 약가 인하와 고비용 R&D, 상장유지 요건, 고금리라는 네 가지 압박이 겹쳐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건강보험 재정 악화로 제네릭 약가가 지속적으로 깎이는 가운데 신약·바이오의약품 개발에는 막대한 연구개발비와 긴 개발 기간이 필요하다.

코스닥 상장사의 경우 연 매출 30억 원 미만이면 관리종목 지정 위험에 놓이는 만큼 코로나19 특수 이후 매출이 꺾인 바이오기업들은 신약 매출이 나오기 전까지 버텨 줄 매출원과 현금흐름이 절실한 상황이다. 여기에 글로벌 경기 둔화와 미국·유럽의 규제 강화, 수출 환경 악화까지 겹치며 제약사 입장에서는 본업만으로는 재무 구조를 방어하기 어렵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예측 가능한 수익에 눈길…"R&D 자금 위해 불가피한 선택"

주주환원과 지배구조 개선 요구도 사업 다각화 흐름을 자극하는 요인으로 거론된다. 자산 규모가 큰 상장사들을 중심으로 집중투표제 도입과 이사 선임 절차 개편 등 정관 변경이 잇따르면서 배당 확대와 사업 다각화를 묶은 ‘패키지 전략’이 부각되고 있다.

일부 대형 제약사는 정기 현금배당을 유지·확대하고 배당 기준일을 손보는 동시에 안정적인 캐시카우 역할이 가능한 인접·이종 사업을 확보해 투자자들을 달래려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실적 변동성이 큰 신약·바이오 파이프라인에만 의존하기보다 건기식·화장품·부동산·플랫폼 등 비교적 예측 가능한 수익원으로 밸류에이션 디스카운트를 일부라도 줄이겠다는 접근이다.

다만 제약사 정관에 세차장과 폐타이어 수집업이 등장하는 현상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시각이 엇갈린다. 업계에서는 “신약 개발은 10년 이상이 걸리는 장기전인 만큼 인접 사업과 부동산·서비스업에서 안정적인 현금을 확보해 R&D를 지탱할 필요가 있다”며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설명한다.

반면 일부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본업 경쟁력 강화보다 단기 매출과 잡다한 신사업에 치중하면 ‘문어발 확장’이 돼 장기적으로 기업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또 전문성이 분산되면 임상과 허가 전략이 느슨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신사업이 단순한 상장유지용 숫자 채우기에 머무를지 아니면 미래 먹거리로 진화할지는 향후 2~3년간 실적과 투자 계획을 통해 가려질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는 “약가 절감, 고금리, 상장유지 기준 강화라는 세 가지 압박 탓에 제약사들이 새로운 캐시카우 찾기에 몰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면서도 “정관에 적힌 사업 목적이 실제로는 R&D 투자 여력을 키우는 선순환 구조로 이어지지 못하면 투자자들 입장에서는 제약사가 본업 경쟁력이 흐려지는 회사로 보일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미디어펜=박재훈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