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가격제 시행에 '정제마진' 타격…재고평가이익 호황은 '착시'
차량 5부제 도입 땐 판매량 20% 급감 전망…다운스트림 직격탄
가격·수요 묶인 상황 속 CDU 가동률 하향 등 '초강도 자구책' 거론
[미디어펜=김동하 기자] 중동 전쟁 격화로 국제 유가가 배럴당 120달러를 위협하는 가운데 국내 정유업계(SK이노베이션·에쓰오일·GS칼텍스·HD현대오일뱅크)가 유례없는 '수요 파괴' 우려에 직면했다. 이미 2차 시행에 돌입한 정부의 석유 최고가격제로 핵심 수익원인 정제마진이 압박이 심화한 상황에서 민간 차량 5부제라는 고강도 시장 개입 카드마저 거론되며 밸류체인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중동 전쟁 격화로 국제 유가가 배럴당 120달러를 위협하는 가운데, 국내 정유업계(SK이노베이션, 에쓰오일, GS칼텍스, HD현대오일뱅크)가 유례없는 '수요 파괴' 우려가 커지고 있다. 사진은 울산석유화학단지. /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30일 업계에 따르면 미 국방부의 이란 지상 작전 준비 및 예멘 후티 반군의 참전 시사 등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가 최고조에 달하며 서울 지역 휘발유 가격이 리터당 2000원 대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러한 에너지 수급 비상사태 속에서 정유사들은 전통적인 '고유가 호황'을 누리기는커녕 뼈를 깎는 수익성 악화에 몰렸다. 일반적으로 유가가 급등하면 과거 싼값에 사둔 원유의 가치가 뛰어 1분기 재무제표상 막대한 '재고평가이익'이 발생하지만, 이는 단기적인 장부상 착시에 불과하다. 정유업의 실제 현금창출력은 원유를 들여와 정제한 뒤 최종 석유제품을 팔아 남기는 '정제마진'에 있기 때문이다.

가장 직접적인 타격은 이미 현장에서 가동 중인 '석유 최고가격제'다. 가파르게 치솟는 원유 도입 비용을 주유소 최종 판매 가격에 온전히 전가하지 못하도록 정부가 상한선을 강제하면서, 밸류체인 하단에서부터 구조적인 마진 악화가 가시화됐다. 글로벌 시장에서 비싸게 사 온 원료를 국내 시장에서 제값 받고 팔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혀, 공장을 돌려 제품을 생산할수록 손실 폭이 확대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아직 현실화하지 않은 2차 충격, 즉 '강제적 수요 증발'에 있다. 정부는 국가 경제의 물가 타격을 막기 위해 국제 유가가 120달러에 도달할 경우 '민간 차량 5부제'를 전격 도입하는 고강도 수요 억제 정책을 신중하게 검토 중이다.

이미 최고가격제로 팔수록 마진이 줄어드는 기형적인 수익 구조가 만들어진 상태에서 차량 5부제라는 물리적인 제재가 더해지면 국내 석유제품 판매량(볼륨) 자체가 단기간에 20% 가까이 급감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정학적 프리미엄이 반영된 고가 중동 원유를 들여와도 마진은 통제당하고 판로마저 축소돼 저유소에 악성 재고만 쌓이는 이중고를 겪게 되는 셈이다.

가격과 수요가 모두 제한될 위기에 처한 정유사들은 밸류체인 업스트림의 원가 방어와 생산 설비의 탄력적 운영으로 돌파구를 찾고 있다.

원가 방어의 핵심 대안은 '러시아산 원유' 재도입이다. 최근 한미 당국 협의를 통해 2차 제재 위험 없이 비달러화로 구매할 수 있게 된 러시아산 원유는 중동산 대비 가격 경쟁력이 우수하다. 정유 4사의 원유 트레이딩 부서는 중동 프리미엄을 피하고 제재 리스크가 걷힌 러시아산 대체 물량을 전격적으로 확보해 최고가격제로 인한 정제마진 하락 충격을 상쇄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다운스트림(생산·판매) 단에서는 '코로나19 팬데믹' 수준의 비상 생산 플랜이 가동될 것으로 보인다. 과거 전 세계적인 록다운으로 원유 수요가 급감했을 때처럼, 정유사들은 차량 5부제 시행 시기에 맞춰 상시 80% 이상을 유지하던 원유정제설비(CDU) 가동률 하향 조정을 검토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또한 하반기에 예정된 대규모 정기보수 일정을 앞당겨 일시적으로 공장 가동을 멈추고 공급량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는 자구책도 주요 선택지로 거론된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현재 정유사들은 글로벌 지정학적 위기로 빚어진 원가 부담을 짊어진 채 정부의 가격 통제와 판매량 축소 압박을 동시에 감내해야 하는 삼중고에 갇혀 있다"며 "저가 원유의 공격적 확보와 다가올 수요 절벽에 맞춘 유연한 가동률 조정만이 생태계 타격을 최소화할 수 있는 핵심 방어 기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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