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무보다 ‘안 당하기’ 골몰…미래 먹거리 ‘장기 소모전’에 실종”
재계, ‘경영판단 면책’ 보호막 절실…“국가 성장 동력 고갈” 경고
[미디어펜=조우현 기자]정부와 정치권이 추진해온 상법 개정안 시리즈가 지난달 초 3차까지 모두 국회 문턱을 넘은 가운데 산업 현장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최근 한국거래소가 차기 ‘밸류업 지수’ 편입의 핵심 잣대로 자사주 소각 실적을 내세우면서, 기업들은 지수 퇴출을 막기 위해 미래 성장 동력을 깎아 배당에 쏟아부어야 하는 ‘외통수’에 몰렸다.

대한민국 상법은 지난 1년간 기업 성장이 아닌 ‘주주 환원’에 방점을 두고 급격히 선회했다. 지난해 7월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주주’로 확대한 1차 개정을 시작으로,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한 2차, 그리고 올해 2월 자사주 소각을 강제한 3차 개정까지 기업 지배구조의 근간을 뒤흔드는 입법이 완성되면서 산업 현장에서는 성과보다 부작용에 대한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 정부와 정치권이 추진해온 상법 개정안 시리즈가 지난달 초 3차까지 모두 국회 문턱을 넘은 가운데 산업 현장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최근 한국거래소가 차기 ‘밸류업 지수’ 편입의 핵심 잣대로 자사주 소각 실적을 내세우면서, 기업들은 지수 퇴출을 막기 위해 미래 성장 동력을 깎아 배당에 쏟아부어야 하는 ‘외통수’에 몰렸다. /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 사법 리스크에 갇힌 이사회... 경영 실무보다 '방어 논리' 골몰

가장 우려되는 대목은 기업 이사회가 ‘사법 리스크 방어소’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이다.

상법 1차 개정(제382조의3,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 이후, 삼성전자는 팰리서캐피털 등 행동주의 펀드들이 개정된 상법을 무기 삼아 이사회의 전략적 판단 하나하나를 소송 대상으로 삼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는 이사들이 경영 실무보다 법적 대응에 골몰하게 되는 ‘행정력 낭비’가 심화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SK하이닉스의 상황도 비슷하다. 과거 결정된 5조 원 규모의 미국 인디애나 패키징 공장 투자를 두고 최근 일부 주주들이 개정 상법상의 주주 충실의무를 명분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국가 전략적 차원의 투자가 사후적으로 개개인의 이익 잣대에 휘말리며 경영진의 추가적인 글로벌 확장 의지를 위축시키는 전례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자사주 족쇄를 채운 상법 3차 개정의 후폭풍도 거세다. 현대차그룹은 이미 발효된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와 3%룰로 경영권 방어 부담이 커진 데다, 자사주 신주배정 금지까지 확정되며 7년째 이어온 지배구조 개편의 동력을 잃게 됐다. 

LG그룹은 자사주 전량 소각으로 밸류업에 화답하고 있지만, ABC(AI·바이오·클린테크) 등 조 단위 투자가 절실한 시점에 입법 규제가 강화되면서 투자 재원 배분을 둘러싼 셈법이 복잡해졌다.


◆ '면책 규정' 안전장치 절실... 정부 신중론에 장기 소모전 우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기업들이 본연의 경쟁력 강화보다 소송 리스크 관리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이러한 장기적인 소모전이 이어질 경우 한국 경제의 역동성은 급격히 식을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이에 경제계는 상법 개정의 독소 조항을 상쇄할 ‘안전장치’로 ‘이사의 경영 판단 면책 규정(비즈니스 저지먼트 룰)’ 신설을 촉구하고 있다. 

이는 이사가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 의무를 다하고, 개인적인 이익이 아닌 회사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합리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결정을 내렸다면, 설령 결과적으로 기업에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사법적 책임을 묻지 말라는 원칙이다.

반면 법무부와 금융위원회 등 정부 당국은 여전히 ‘신중론’을 고수하고 있다. 면책 규정을 명문화할 경우 자칫 지배주주나 경영진의 배임 행위에 면죄부를 줄 수 있고, 소액주주 보호 기조가 무력화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상법개정안은 기업들로 하여금 경영 실무보다 ‘안 당하고 보자’는 식의 법적 방어에 골몰하게 만들고 있다”며 “이러한 장기적인 소모전이 이어질 경우, 과감한 투자는 실종되고 결국 국가 전체의 성장 에너지가 상실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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