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유예에도 인증만 수년…R&D '이중 투자' 압박
LG·한화, '불소계' 끊고 '무불소' 국산화 총력
"버티면 룰메이커"…무불소 상용화 패권 가른다
[미디어펜=김동하 기자] 유럽 화학물질청(ECHA)이 반도체, 배터리 등 핵심 산업에 쓰이는 과불소화합물(PFAS) 규제에 대해 품목별 5년의 선별적 유예를 부여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규제 유예안에도 불구하고 LG화학, 한화솔루션 등 국내 석유화학 업계의 기류는 여전히 엄중하다. 규제 회피를 넘어 불소계 소재 공급망 불확실성 해소를 위해 '무불소(PFAS-Free)' 원천 기술 확보를 위한 시간과의 싸움이 시작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 유럽 화학물질청(ECHA)이 반도체, 배터리 등 핵심 산업에 쓰이는 과불소화합물(PFAS) 규제에 대해 품목별 5년의 선별적 유예를 부여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석유화학업체들이 밀집해 있는 여수산업단지 전경./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6일 업계에 따르면 유럽 화학물질청 산하 사회경제성분석위원회(SEAC)는 최근 PFAS 전면 제한 조치와 관련해 산업별 대체재 개발 난이도에 따라 유예 기간을 차등 적용하는 내용의 의견서 초안을 내놓고 막바지 의견 수렴 절차에 돌입했다.

유럽 규제 시기가 구체화되면서 국내 석유화학사들의 발등에도 불이 떨어졌다. 주요 화학사들은 최근 사업보고서를 통해 주요국의 화학물질 환경 규제 강화가 핵심 위험 요인으로 지목했다. 자동차 및 에너지 고객사의 까다로운 새로운 소재 인증 기간이 통상 3~5년 소요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유예를 받더라도 당장 연구개발(R&D) 비용을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이다. 

특히 온도 변화와 주행 환경을 견뎌야 하는 전기차 배터리와 모터 부품의 경우, 완성차 업계의 안전성 검증과 장기 필드 테스트에만 수년이 추가로 소요돼 실제 대체 소재의 개발 완료 시점은 이보다 앞당겨져야 한다.

최근 중국발 범용 화학 제품의 과잉 공급으로 인해 기초유분 부문에서 적자가 누적되면서 업계의 신규 투자 여력은 크게 줄어든 상태다. 기존 불소계 설비 운영비(OPEX)를 감당하며 무불소 신소재 개발(CAPEX)에 투자해야 하는 '이중 투자'의 압박이 현실화하는 모습이다. 기초 화학 실적 부진을 고부가 스페셜티 제품 확대로 상쇄하려던 석화업계 생존 공식이 유럽 환경 규제라는 장벽에 부딪혀 사업 궤도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 LG화학, 수입산 PVDF 의존 탈피…'수계 바인더'로 공급망 주권 확보

규제가 강화될 경우 가장 먼저 공급망 마비 리스크가 불거지는 곳은 전기차 배터리 밸류체인이다. 전기차 배터리 양극재를 결착시키는 핵심 소재인 PVDF(폴리비닐리덴 플루오라이드)를 주력으로 삼는 LG화학이 대표적이다. 그동안 국내 배터리 업계는 PVDF를 유럽과 일본 등 해외 기업으로부터 전량 수입에 의존해왔다.

배터리 산업은 유예 대상에 포함될 가능성이 높지만, PVDF를 대체하지 못할 경우 친환경 전지 소재 생태계 전반이 차질을 빚을 우려가 제기된다. 배터리 충방전 효율과 수명에 직결되는 바인더의 특성상, 신규 수계 고분자의 접착력과 화학적 안정성을 기존 불소계 소재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상용화의 최대 관건으로 꼽힌다.

이와 관련해 LG화학 관계자는 "유럽의 환경 규제는 전지 소재 사업의 주요 변수"라며 "유예 기간과 무관하게 고객사의 장기 테스트 기간을 고려해 불소 성분이 아예 없는 수계(Water-based) 바인더 등 차세대 폴리머 상용화에 R&D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 한화솔루션, 불소계 PEM 대신 'AEM' 승부수…수소 시장 룰메이커 노린다

한화솔루션은 청정에너지 생태계가 환경 규제와 충돌하는 위기를 차세대 기술로 돌파하겠다는 전략이다. 기존 수전해 설비의 핵심인 이온교환막(PEM)은 듀폰 등 글로벌 기업이 독점한 불소계 소재 시장이다. 한화솔루션은 기득권이 강한 불소계 시장에 머물기보다, 아예 불소 물질과 고가의 귀금속 촉매가 필요 없는 '음이온교환막(AEM)' 기술 개발에 자본을 집중하고 있다.

수소 생산 과정에서 고온·고압을 견뎌야 하는 멤브레인 기술은 진입 장벽이 매우 높. 하지만 한화솔루션은 비(非)불소계 AEM 수전해 기술을 선제적으로 확보해 유럽의 환경 규제를 오히려 경쟁사들을 따돌릴 기회로 활용하겠다는 구상이다.

한화솔루션 측은 "글로벌 시장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비(非)불소계 멤브레인 자체 개발에 자본을 집중하고 있다"며 "기존 불소계 소재를 뛰어넘는 효율을 확보해 선진국 수소 시장의 룰메이커로 도약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각 사 경영진은 기존 스페셜티 사업의 수익성을 유지하면서도, 무불소 소재 R&D에 필요한 재원을 적기에 투입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제를 안게 됐다.

석유화학 업계 관계자는 "유예 기간이 주어졌다는 것은 그 기간 안에 무불소 상용화에 성공하는 기업이 향후 글로벌 친환경 소재 시장을 주도할 수 있다는 의미"라며 "R&D 경쟁을 버텨내고 해답을 내놓는 기업이 새로운 룰메이커로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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