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와 현진건의 원작, 여성 시선으로 재해석...김보나·김태은 주연
사랑과 헌신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일상 속 폭력과 침묵의 기록
[미디어펜=이석원 문화미디어 전문기자] 오래도록 남성의 시선으로 읽혀온 고전 텍스트를 여성의 관점에서 완전히 새롭게 뒤집어보는 무대가 찾아온다. 제47회 서울연극제 자유참가작으로 선정된 연극 ‘로테/운수’가 오는 5월 28일부터 6월 7일까지 대학로 공간아울에서 공연된다.

연극 ‘로테/운수’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모티브로 삼은 작품이다. 원작에서 남성 주인공의 지독한 사랑이나 비극적인 삶을 설명하기 위한 ‘주변적 존재’에 머물렀던 여성 인물 로테와 운수를 서사의 중심부로 소환한다. 작품은 익숙한 고전의 정서를 비틀어, 그들이 자신의 언어와 감각을 가진 주체로서 무대 위에 서게 만든다.

이 작품이 주목하는 것은 미화된 고전의 이면이다. 남성 중심의 시각에서 ‘순애보’로 칭송받던 베르테르의 구애는 로테의 입장에서는 일상을 뒤흔드는 불안과 스토킹으로 치환된다. 또한, 김 첨지의 ‘운수 좋은 날’ 뒤에 가려져 있던 아내 운수의 삶은 지독한 고립과 가정폭력의 현장으로 재정의된다.

   
▲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을 여성의 시각으로 재정의한 연극 '로테/운수'. /사진=창작집단 하이카라 제공


극은 사랑, 헌신, 희생처럼 아름답게 여겨져 온 단어들이 실제 관계 안에서 어떻게 폭력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지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무대 위에는 두 인물만이 남는다. 장미꽃 한 송이를 받은 이후 침범당하기 시작한 일상을 견디는 ‘김로테’와, 오랜 폭력 끝에 남편을 살해하고 법정에서 정당방위를 주장하는 ‘이운수’가 그들이다. 서로 다른 시대와 텍스트에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여성은 ‘구조적 억압’이라는 닮은 결의 시간을 공유하며 무대 위에서 교차한다.

‘로테/운수’는 자극적인 장면을 전시하기보다 인물이 처한 상황과 그 안에 쌓여온 감정의 결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많은 장치 대신 두 여성의 말과 침묵을 통해 관객이 인물의 시간을 직접 감각하도록 유도한다. 비극을 과장하거나 소비하지 않으면서도, 무너짐 속에서 삶을 붙들려는 인간의 본질적인 감각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배우 김보나가 ‘김로테’ 역을, 김태은이 ‘이운수’ 역을 맡아 극을 이끈다. 오직 두 배우의 호흡만으로 무대를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만큼, 불안과 절박함, 분노와 저항 사이를 오가는 배우들의 섬세한 내면 연기가 작품의 완성도를 좌우할 전망이다.

이번 작품은 서승연이 극작과 연출을 동시에 맡아 텍스트의 밀도를 높였다. 여기에 주예령(조연출), 백혜린(무대), 박혜림(조명), 이진형(음악) 등 실력파 창작진이 의기투합해 고전의 감각을 오늘날의 무대로 번역해낸다. 강렬한 이미지를 담은 포스터 그래픽은 디자인 스튜디오 ‘무난한’이 맡아 시각적인 강렬함을 더했다.

공연을 제작하는 하이카라는 2021년 초연 당시 호평을 받았던 감각을 이번 재연을 통해 다시 한번 무대에 올린다. 초연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현실 속에서,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하는 폭력과 침묵의 시간을 응시하겠다는 포부다.

연극 ‘로테/운수’는 관객에게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것들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묵직한 여운을 남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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