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가 속 원가 반영 제한…'최고가격제'에 묶인 정유업계 수익성
UAE OPEC 탈퇴 예고 조달 비용 감소 기대…정책에 마진 회복 제한
한 달 반 만에 3조 손실…정책 리스크 적은 비정유(SAF) 사업 확장
[미디어펜=김동하 기자] 아랍에미리트(UAE)의 원유 수출 확대 예고로 국제 원유 시장 수급이 개선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국내 정유 업계는 원유 조달 비용 감소 기대감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수익성 회복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정부의 '석유 최고가격제' 등 가격 통제 정책이 정제마진 개선을 제한하는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어서다.

29일 업계에 따르면 UAE는 다음달 1일 OPEC(석유수출국기구)을 탈퇴하고 독자적인 원유 증산에 돌입할 계획이다. 중동 주요 산유국들의 공급량이 늘어날 것이란 관측이 나오면서 최근 지정학적 위기 등으로 불안정했던 국제 유가가 다소 진정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형성되고 있다.

하지만 국내 정유 4사(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에쓰오일, HD현대오일뱅크)는 이러한 수급 개선의 긍정적 효과를 온전히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에너지 밸류체인 상단인 원유 도입 환경은 나아질 여지가 생겼지만 하단인 소매 시장의 제품 가격이 정책적으로 통제되면서 정상적인 마진 창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 사진은 울산석유화학단지. /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 높아진 원가, 묶인 판매가…가중되는 부담

정유업계의 수익성 악화 배경에는 물가 안정을 위한 정부의 시장 개입이 자리잡고 있다. 최근 고유가 흐름 속에서 정유사들의 원유 도입 비용은 크게 늘어났다. 통상적으로 원가 상승분은 시차를 두고 석유 제품 가격에 반영되지만 정부의 '석유 최고가격제' 시행으로 주유소 등에서 판매되는 제품 가격의 상한선이 설정됐다.

이로 인해 정유사들은 높아진 원유 도입 단가에도 불구하고 규제된 가격 상한선에 맞춰 석유 제품을 공급해야 하는 구조적 부담을 안게 됐다. 수급 논리에 따른 가격 형성이 제한되면서 기업이 자체적으로 시장 변동성에 대응하고 마진을 방어할 수 있는 여력이 줄어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최고가격제 시행 이후 한 달 반 동안 국내 정유 4사의 영업 손실 규모는 3조 원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원가 부담을 고스란히 기업이 떠안으면서 수출 시장에서 창출한 이익을 내수 시장의 적자가 상당 부분 상쇄하는 수익 생태계 훼손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 카르텔 깬 UAE…정책 제약에 효과 제한적

이런 상황에서 UAE의 증산 예고는 원가 부담을 덜어줄 긍정적 요인으로 꼽힌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경직된 가격 정책이 유지되는 한 실질적인 체감 효과는 제한적일 것이란 분석이 제기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전 세계 39개국이 에너지세 인하 등 시장 가격 조정에 나선 상태다. 다만 조세 지원을 넘어 제품 판매 가격 상한선을 규정하는 직접적인 가격 통제는 시장 왜곡 우려를 낳고 있다. 

향후 유가 하락으로 조달 원가가 낮아지더라도 상한제에 묶인 가격 구조 탓에 그동안 누적된 손실을 만회하거나 정상적인 정제마진 궤도로 회복하는 데 한계가 따르기 때문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 등 주요 기관들도 전면적인 소매 가격 상한제가 기업의 재무 건전성을 저해하고 장기적으로는 에너지 공급망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 정책 리스크 비켜 간 사업 다각화…SAF·석화 집중

수익성 압박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정유사들은 규제 리스크가 적은 비정유 부문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며 돌파구를 찾고 있다. 대표적인 분야가 지속가능항공유(SAF) 등 친환경 사업이다. SAF는 일반 주유소 판매용 제품과 달리 글로벌 항공사 등과 직접 장기 공급 계약을 맺는 B2B(기업 간 거래) 시장을 형성하고 있어 국내 소매 가격 통제 정책의 영향을 적게 받는다.

SK이노베이션과 GS칼텍스 등은 기존 정제 설비를 활용해 바이오 원료 기반의 SAF 생산 라인 확충에 투자를 진행 중이다. 에쓰오일과 HD현대오일뱅크 역시 석유화학 기초 원료인 나프타 기반의 고부가가치 화학 소재 사업 비중을 늘리며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고 있다. 국내 연료 시장의 불확실성을 피하고 글로벌 소재 시장에서 안정적인 수익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다만 이러한 사업 재편이 속도를 내기 위해서는 기존 정유 부문의 현금 창출력 회복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획일적인 가격 통제를 재검토하고 취약계층 중심의 선별적 지원으로 정책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UAE 증산 소식으로 원유 조달 여건은 다소 개선될 여지가 생겼지만 판매 가격 상한선이 유지되는 한 실질적인 마진 회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며 "경직된 가격 정책이 장기화될 경우 정유사들이 추진 중인 친환경 전환을 위한 투자 동력마저 꺾일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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