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재고 누적 10억 배럴 증발…여름 성수기 앞두고 '재고 고갈' 가속화
정유업계, 원가 부담 뛰어넘는 제품가 폭등에 정제마진 슈퍼 사이클 기대
단기 유가 등락보다 물리적 물량 부족 주목…하반기 실적 방어력 강화 관측
[미디어펜=김동하 기자]국제에너지기구(IEA)가 중동 전쟁으로 인한 현재의 원유 수급 상황을 “역사상 가장 큰 공급 위기”라고 공식 선언하면서 국내 정유업계의 수익성 지표인 정제마진이 이례적인 수준으로 치솟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장기화되며 글로벌 원유 재고가 유례없는 속도로 고갈되는 가운데, 여름철 이동 수요 성수기까지 겹치면서 제품 가격이 원가 상승분을 크게 상회하는 슈퍼 사이클에 진입할 것으로 전망된다.

15일 국제에너지기구(IEA) 5월 월간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글로벌 석유 시장 수급 전망은 기존 공급 과잉에서 ‘공급 부족(Deficit)’으로 전면 수정됐다. 

IEA는 중동 전쟁으로 인한 인프라 파괴와 호르무즈 해협 통제 여파로 하루 평균 1400만 배럴의 원유 생산 및 선적이 중단된 상태라고 분석했다. 이는 과거 그 어떤 에너지 위기 때보다 큰 규모의 물리적 단절로, 시장의 자율적인 수급 조절 기능을 상실하게 하는 수준이다.

   
▲ 국제에너지기구(IEA)가 중동 전쟁으로 인한 현재의 원유 수급 상황을 "역사상 가장 큰 공급 위기"라고 공식 선언하면서 국내 정유업계의 수익성 지표인 정제마진이 이례적인 수준으로 치솟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사진은 여수산업단지 전경./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현재까지 누적된 글로벌 공급 손실은 이미 10억 배럴을 넘어선 것으로 파악됐다. IEA는 보고서를 통해 “전 세계가 전례 없는 속도로 원유 재고를 헐어 쓰고 있다”며 이번 사태를 “역사상 가장 심각한 공급 쇼크”라고 규정했다. 그동안 시장이 기대했던 ‘원만한 수급 조절’ 시나리오가 사실상 폐기되면서 원유 및 석유 제품의 가격 하방 경직성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해지고 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역시 동일한 시기에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중동 주요 산유국들의 수출 제약을 공식 확인했다. 밸류체인 최상단인 산유국과 국제기구가 동시에 ‘물량 부족’을 공표함에 따라, 향후 원유 시장은 단기적인 종전 소식이나 외교적 수사보다는 실질적인 ‘물리적 잔고’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평가다.

◆ 비축유 바닥인데 성수기…재고 고갈이 당기는 마진 폭등

문제는 글로벌 에너지 시스템이 가장 취약해진 시점에 북반구 여름철 이동 수요 성수기가 도래했다는 점이다. 통상 2분기에는 정유사들이 여름철 수요 급증에 대비해 재고를 확충하는 시기지만 올해는 오히려 기존 상업용 재고와 비상 비축유를 쏟아부어 당장의 수요를 메우고 있는 형국이다. 

IEA는 수입 국가들이 공급망 단절에 대응해 비축유를 소진함에 따라 다가올 항공 및 육상 운송 수요 피크를 감당할 완충력이 사실상 사라졌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재고 절벽 현상은 정유사의 수익성을 결정짓는 정제마진을 급등시키는 트리거가 된다. 원유 가격이 오르는 속도보다 당장 쓸 수 있는 휘발유, 경유, 항공유 등 제품 재고가 바닥나면서 제품 가격 상승 속도가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특히 항공 수요 회복세와 맞물려 항공유 마진이 역대급 수준을 기록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정제 설비를 풀가동할 수 있는 국내 정유사들에게는 최적의 시장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국제금융센터(KCIF) 및 주요 투자은행들은 호르무즈 해협이 재개방되더라도 훼손된 시설 복구와 예방적 비축유 수요 때문에 유가 및 제품 가격 하락세가 매우 완만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는 정유사들이 고유가 상황에서 비싸게 산 원유가 제품으로 만들어져 팔릴 때까지의 시차를 고려했을 때 대규모 재고평가손실 우려 없이 높은 마진을 장기간 향유할 수 있는 ‘수익 방어막’이 형성됐음을 의미한다.

◆ 정유업계 수혜 방정식…조달력이 가를 하반기 실적

공급망 대란 속에서 SK이노베이션, 에쓰오일, HD현대오일뱅크, GS칼텍스 등 국내 정유 4사의 경쟁력은 ‘안정적인 원료 조달 및 정제 능력’에서 판가름 날 전망이다. 

중동산 원유 수급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미주나 아프리카 등 비(非)중동 지역의 대체 원유를 신속하게 확보해 공장 가동률을 유지하는 기업이 이번 마진 사이클의 최대 수혜자가 될 것으로 관측된다. 국내 기업들은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비해 도입선을 다변화해온 만큼 글로벌 경쟁사들 대비 높은 가동률을 유지하며 제품 수출량을 늘릴 수 있는 입지를 점하고 있다.

또한 이번 공급 위기는 정유사들의 밸류체인 내 협상력을 극대화하고 있다. 제품 공급이 부족해지자 발주처들이 가격 인하를 요구하기보다는 ‘물량 확보’ 자체에 우선순위를 두면서 정유사들이 원가 상승분을 판매 가격에 온전히 반영하는 것을 넘어 추가 프리미엄까지 얻는 공급자 우위 시장이 굳어졌다. 이는 고금리와 인플레이션으로 전방 산업의 수요 침체가 우려되는 상황에서도 정유업종만큼은 독보적인 수익성을 기록할 것이라는 낙관론의 근거가 된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IEA가 ‘사상 최대 공급 위기’를 언급한 것은 향후 수개월간 제품 가격의 하방 지지선이 매우 탄탄할 것임을 선언한 것과 같다”며 “원유 수급의 어려움이라는 리스크가 존재하지만, 이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정제마진 확대와 견조한 제품 수요가 맞물리면서 K-정유사들은 하반기에 역대급 실적 방어력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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