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전력망의 응급실”…예천양수발전소 484m 아래 숨은 거대한 배터리
수정 2026-05-18 08:18:32
입력 2026-05-18 12:00:00
이소희 기자 | aswith5@mediapen.com
국내 최대 단일용량 양수발전소 가보니…“3~5분이면 전력 공급”
재생에너지 시대 ‘물 저장 배터리’ 역할 커지며 주목, 수익성도 개선
상·하부 저수지 낙차 활용, 가장 안전하고 자연친화적 차세대 발전망
재생에너지 시대 ‘물 저장 배터리’ 역할 커지며 주목, 수익성도 개선
상·하부 저수지 낙차 활용, 가장 안전하고 자연친화적 차세대 발전망
[미디어펜=이소희 기자] 경북 예천군 은풍면.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오르자 초록 산세 사이로 잔잔한 저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조차 잠잠한 오후, 물 위는 고요했지만 그 아래에서는 대한민국 전력망을 지탱하는 거대한 기계가 쉼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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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천양수발전소 상·하부댐 전경./자료사진=한수원 | ||
지난 15일 찾은 한국수력원자력 예천양수발전소. 발전소 입구에서 안전모를 착용한 뒤 버스에 오르자 곧바로 어두운 터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약 720m를 내려가자 약간의 냉기와 함께 묵직한 기계음이 귓가를 울렸다.
지하 발전동 문이 열리는 순간 압도적인 공간이 펼쳐졌다. 높이 53.5m, 길이 129m 규모의 거대한 공동(空洞). 아파트 13층 높이의 공간 속에 은빛 발전기 두 대가 거대한 몸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콘크리트 벽면을 타고 울리는 저주파 진동은 발바닥까지 전해졌다. “생각보다 규모가 크죠? 지하에 아파트 네 동 정도가 들어가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현장을 안내한 임석채 발전부장이 발전기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천양수발전소는 2004년 착공해 7년 만인 2011년 준공됐다. 400MW급 발전기 2기를 갖춘 총 800MW 규모로, 현재 국내 최대 단일용량 양수발전소다. 발전소 직원과 협력사 인력을 포함해 120여 명이 이곳에서 근무하고 있다.
양수발전의 원리는 의외로 단순했다. 전력이 남는 시간에는 하부저수지의 물을 상부저수지로 끌어올려 저장하고, 전력이 필요할 때 다시 떨어뜨려 발전하는 구조다. 일종의 ‘물 배터리’인 셈이다.
박병조 예천양수발전소장은 “전기를 물의 위치에너지 형태로 저장한다고 생각하면 쉽다”며 “전력계통이 불안정할 때 즉시 투입돼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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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천양수발전소 상부댐 전경./자료사진=한수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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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천양수발전소 하부댐 전경./자료사진=한수원 | ||
예천양수발전소는 상·하부 저수지 사이에 484m의 낙차를 확보했다. 저장된 물이 이 높이차를 따라 떨어지며 터빈을 돌리고 전기를 만든다. 실제 발전에 사용되는 물만 약 607만 톤에 달한다.
발전동 아래층으로 이동하자 거대한 회전축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전기와 수차를 연결하는 핵심 설비다. 분당 약 400회 회전하는 축이 물의 힘을 전기로 바꿔낸다. 발전과 양수를 반복해야 하는 특성상 정·역회전이 모두 가능한 ‘입축가역식’ 구조다. 철제 계단 난간에 손을 얹자 미세한 진동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발전소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양수발전의 진짜 가치는 ‘속도’에 있다. 원자력발전이 정지 상태에서 발전까지 약 40시간, 화력발전은 14시간, 가스터빈도 2시간 가까이 걸리는 데 비해 양수발전은 단 3~5분이면 전력 생산이 가능하다.
“양수발전은 거의 항상 5분 대기상태입니다. 급전 지시를 받으면 바로 투입돼야 해요.” 임 부장은 양수발전소를 “전력망의 응급실”이라고 표현했다. “응급실은 돈 벌려고 존재하는 시설이 아니잖아요. 위급 상황에서 시스템 전체가 무너지지 않게 막는 역할을 합니다. 양수발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 최근 들어 양수발전의 역할은 더 커지고 있다.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 비중이 늘어나면서 전력 생산량 변동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햇빛이 사라지거나 바람이 멈추면 전력망 주파수는 순식간에 흔들린다. 이때 남는 전력을 저장했다가 즉시 공급할 수 있는 양수발전이 버퍼 역할을 맡는다.
임 부장은 “예전에는 이용률만 보고 양수발전을 비효율적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며 “재생에너지가 늘어난 이후에는 가동 빈도도 높아지는 등 전력이용 체계가 바뀌면서 수익성도 개선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양수발전을 물을 활용한 에너지저장장치(ESS), 이른바 ‘WESS(Water Energy Storage System)’라고 부르기도 한다. 배터리 기반 ESS보다 대규모 저장이 가능하고 화재 위험이 낮다는 점에서 차세대 저장 수단으로 평가받는다.
발전소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도 핵심 역할을 맡는다. 전국적인 정전, 이른바 블랙아웃이 발생하면 대부분의 발전소는 재가동을 위한 초기 전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양수발전은 상부저수지의 물만 있으면 스스로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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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하부 저수지 낙차를 활용해 에너지를 생산하는 양수발전소 개념을 설명하는 임석채 예천양수발전소 발전부장./사진=미디어펜 이소희 | ||
“양수발전소가 다른 발전소를 다시 깨우는 마중물 역할을 하는 겁니다.” 발전소 외부에는 태양광 설비와 소수력발전 설비도 함께 운영되고 있었다. 댐 사면에 설치된 태양광 패널은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하천 유지용 방류수는 소수력발전을 통해 또 다른 전기로 바뀌고 있었다.
산속 깊은 곳, 거대한 암반 아래서 물은 끊임없이 오르고 떨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반복이 전력망의 균형을 붙들고 있었다. 재생에너지 시대가 본격화될수록, 가장 오래된 저장 기술인 양수발전은 오히려 가장 중요한 미래 전력 인프라로 존재감을 키우고 있었다.
가장 안전하고 자연친화적으로 즉시 에너지를 생산해내는 양수발전소가 에너지 안보 시대에 재생에너지로의 전환과정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다.
현재 한수원은 예천양수발전소를 비롯해 양양, 청평 등 총 7곳에 16기의 양수발전소를 운영하고 있다. 설비용량은 4700MW로, 국내 전체 발전 설비용량의 약 4%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양수발전소 건설 최초로 지자체 자율유치공모를 통해 영동(500MW), 홍천(600MW), 포천(700MW) 등 3곳에서 1.8GW 규모의 양수발전소를 건설하고 있다. 각각 영동 2030년, 홍천 2032년, 포천 2033년에 준공돼 전력계통 안정화 역할을 할 예정이다. 총공사비는 4조3000억 원에 달하며, 발전소 건설 및 운영기간 동안 지역별로 최대 약 610억 원의 지원금이 지원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