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간의 ‘날치기’ 프레임 뒤 가려진 ‘국가 생존 위한 구조개혁’ 재조명
30년 지난 지금, 초격차 위기 속 ‘리스크 공유 없는 일방 통행’ 여전
[미디어펜=조우현 기자]최근 노조 파업이 기승을 부리면서 1996년 12월 26일 감행된 이른바 ‘노동법 기습 통과’가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세간에는 여당의 절차적 독단과 민주주의의 후퇴로 각인돼 있는 사건이지만, “국가 부도 파산을 막기 위한 입법부의 불가피한 구국적 결단이자 신념”이었다는 점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당시의 노동개혁 좌절이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경제의 발목을 잡는 ‘고용 경직성’ 고질병의 시초가 된데다, 노란봉투법 시행 이후 파업을 빌미로 노조가 사측을 압박하는 상황이 매번 되풀이될 가능성이 커 노동 개혁의 필요성이 다시금 대두되고 있다.

   
▲ 1996년 12월 26일 감행된 이른바 ‘노동법 기습 통과’가 재평가 되고 있다. 세간에는 여당의 절차적 독단과 민주주의의 후퇴로 각인돼 있는 사건이지만, “국가 부도 파산을 막기 위한 입법부의 불가피한 구국적 결단이자 신념”이었다는 점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사진은 국회 본회의장 전경. /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 국가 파산 위기 속 내린 ‘비상 경영적 조치’

1996년 말 김영삼 정부와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이 정리해고제와 변형근로제 도입을 골자로 한 노동법 개정안을 기습 처리한 배경에는 급박했던 국가 경제 위기 상황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한국 경제는 외환보유고 고갈 조짐과 경상수지 적자 누적으로 심각한 ‘국가 부도 시그널’이 켜진 상태였다. 선진국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조건이었던 글로벌 스탠다드급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를 위해서는 법안 통과가 급선무였다. 

다행히 한국은 1996년 12월 OECD의 29번째 회원국으로 이름을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OECD는 여전히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를 지적하며 개선을 권고하고 있는 실정이다.

​당시에도 야당과 노동계의 반대에 막혀 골든타임을 놓칠 경우 국가 신용등급 추락은 예정된 수순이라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국회가 비상 경영적 차원에서 총대를 멨다는 해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정리해고·유연근무 도입…글로벌 기준 맞춘 체질 개선 시도

당시 기습 통과된 법안의 세부 내용은 철저히 기업 경쟁력 제고와 인력 운용의 효율성 극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을 때 인력을 구조 조정할 수 있는 ‘정리해고제’를 명문화해 부실 사업부를 선제적으로 정리하고 기업 전체의 파산을 막을 생존 장치를 마련한 것이 핵심이다.

이와 함께 획일적인 근로시간 규제를 깨고 업황에 따라 근로시간을 조절하는 ‘변형근로제(유연근무제)’와 파업 시 대체인력 투입을 허용하는 ‘대체근로권’ 등도 포함됐다. 이는 노조의 파업권에 대응해 사측에도 최소한의 방어권을 부여하고 불필요한 연장근무 수당 거품을 빼 생산성을 높이려는 글로벌 스탠다드급 조치였다는 분석이다.

만약 이때 노동법 개정이 노조의 연쇄 총파업에 밀려 유유부단하게 유예되지 않고 산업 현장에 즉각 적용됐다면, 이듬해 말 터진 ‘1997년 IMF 외환위기’의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분석이 나온다.


◆ ‘철밥통’ 지킨 대기업 노조, 고용 유연성 확보 흐름 저해

역설적이게도 당시 노동계가 ‘총파업 승리’라며 지켜낸 기득권은 대한민국 노동시장의 고용 구조를 왜곡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파업을 무기로 강력한 고용 철벽을 구축하자, 글로벌 경기 변동에 대응해야 하는 기업들은 신규 정규직 채용을 사실상 중단한 상태다.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대안적 고용 형태나 외주화를 확대하며 유연성 확보에 나섰으나, 노조의 강력한 기득권 장벽에 가로막혀 전체적인 노동 시장의 효율적인 인력 재배치는 저해됐다.

재계 관계자는 “1996년의 노동개혁 실패 이후 한국 노사 관계는 ‘경기가 꺾여도 대기업 노조는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관성이 생겼다”며 “이때 바로잡지 못한 고용 경직성이라는 고질병은 오늘날 우리 기업들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규제로 작용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 30년째 도돌이표… ‘글로벌 격변기’ 속 반복되는 리스크

문제는 1996년의 ‘개혁 잔혹사’가 현재 대한민국 첨단 산업 현장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전 산업계로 확산 중인 이른바 ‘성과급 파업 사태’가 대표적이다. 글로벌 AI·반도체 패권 전쟁의 한복판에서 천문학적인 연구개발(R&D) 투자가 시급한 상황임에도, 노조들은 “회사가 번 만큼 당장 내놓으라”며 눈앞의 보상만을 요구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총파업 직전까지 치달았던 삼성전자의 임금 교섭 사태는 대한민국 제조업의 보상 체계가 직면한 위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노조의 압박에 밀려 결국 사측은 영업이익의 일정 비율을 자사주로 지급하는 ‘특별경영성과급’ 제도를 신설하며 합의안을 타결했다.

이는 개인이 낸 성과나 사업부의 실적에 따라 철저히 차등 보상한다던 삼성의 오랜 핵심 가치인 ‘성과주의 원칙’이 사실상 무너진 순간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적자를 기록 중인 비메모리(시스템LSI·파운드리) 사업부마저 억대 성과급을 보장받게 되면서, 철저한 수익 중심 분배 원칙은 퇴색됐다.


◆ 노동개혁 여전히 절실…휴전 직전 근로기준법 벗어나야

이러한 현상은 국내 기업 전 방위로 확산하는 추세다. 차세대 먹거리인 바이오 의약품 위탁개발생산(CDMO) 초격차를 위해 막대한 시설 투자가 이어지는 삼성바이오로직스 역시 노조의 대대적인 성과급 인상 및 처우 개선 요구와 파업 압박에 직면해 있다.

매년 역대급 실적을 갈아치우는 현대자동차 노조 역시 특별성과급과 기본급 대폭 인상을 관철시키기 위해 상시 파업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미래 모빌리티(EV·SDV) 전환을 위한 천문학적인 투자 재원을 상시 확보해야 하는 경영진으로서는 노조의 압박이 미래 리스크를 키우는 주된 요인이다. 

성장 정체와 사법 리스크 등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이한 카카오 등 IT 플랫폼 업계마저 고용 안정과 성과 보상 확대를 요구하는 노조의 단체 행동으로 혁신의 발목이 잡혀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에 역사적 오판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노조가 글로벌 시장 환경을 직시하고 업황 주기에 맞춰 리스크와 성과를 사측과 함께 나누는 책임 있는 파트너십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진단이 나온다.

박기성 성신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노동 개혁의 핵심은 파업 시 대체근로를 허용하고, 미국의 임의 고용 원칙을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1953년 휴전 직전 공포된 근로기준법이 여전히 시장을 억죄고 있다”며 “이를 최소한의 기준만 남긴 ‘근로계약법’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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