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기아 모빌리티 개발 산실 '남양기술연구소'
드라이빙 시뮬레이터·DMC·AMSC·노바랩 공개
첨단 R&D 기술의 발달로 변화된 차량 개발 현장
[미디어펜=김연지 기자]"실차를 제작하지 않고도 차량 성능을 개발하기 위한 가상환경 기술을 10여 년간 연구해 왔습니다. 수많은 실패와 성공,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의 드라이빙 시뮬레이터를 완성했고, 오늘 처음 공개하게 됐습니다."

   
▲ 내부에서 바라본 드라이빙 시뮬레이터의 모습./사진=현대차그룹 제공


정필영 현대차·기아 주행성능컨셉개발팀 책임연구원의 소개는 현대차·기아 연구개발(R&D)이 어디까지 진화했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남양기술연구소는 실제 차량을 제작하기 전 가상공간에서 먼저 주행 성능을 검증하고, 설계 데이터만으로 부품을 제작하며, 차체 없이 전기·전자 시스템을 시험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지난 1일 경기 화성 현대차·기아 남양기술연구소에서 열린 미디어 랩투어에서는 드라이빙 시뮬레이터와 디지털 측정 센터(DMC), 적층 제조 솔루션 센터(AMSC), 노바랩(NOVA Lab) 등 R&D 디지털 전환의 핵심 시설이 공개됐다. 연구소 곳곳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줄여 개발 기간을 단축하고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디지털 기반 연구개발이 한창이었다.

◆ 현실을 그대로 옮긴 가상 도로…실차 없이 주행 성능 검증

드라이빙 시뮬레이터 스튜디오에서는 주행 성능 시연이 진행되고 있었다. 연구원이 운전석에 오르자 거대한 모션 플랫폼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270도 곡면 스크린에는 실제 도로를 달리는 듯한 화면이 펼쳐졌다. 가속 페달을 밟을수록 화면 속 도로는 빠르게 흘러갔고, 스티어링 휠을 돌릴 때마다 콕핏은 차량 움직임에 맞춰 기울었다. 가속과 감속, 코너를 도는 순간에는 차체 쏠림과 노면에서 전달되는 진동까지 구현됐다.

시연이 끝난 뒤 둘러본 연구실 중앙에는 제네시스 G80 기반 콕핏이 설치된 대형 모션 플랫폼이 자리하고 있었다. 상단에는 4K 해상도와 240Hz 주사율을 지원하는 프로젝터 9대가 설치돼 있었고, 운전석을 둘러싼 곡면 스크린이 가상 주행 환경을 구현했다.

   
▲ 드라이빙 시뮬레이터./사진=현대차그룹 제공


콕핏은 경량화를 위해 카본 소재를 적용했지만 스티어링 휠과 시트, 페달, 실내 트림 등 운전자가 직접 조작하는 부분은 양산 부품을 그대로 사용했다. 실제 차량과 최대한 같은 환경에서 운전자 평가를 진행하기 위해서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도로를 구현하는 방식이었다. 현대차·기아는 남양기술연구소 주행시험장을 라이다(LiDAR)로 1㎜ 단위까지 스캔해 노면의 경사와 요철, 과속방지턱, 아스팔트 질감 등을 가상공간에 그대로 옮겼다. 차량이 달리는 위치 주변 데이터만 실시간으로 불러오는 '지형 서버(Terrain Server)' 기술을 적용해 방대한 데이터를 효율적으로 구현한 것도 특징이다.

정 책임연구원은 "가상환경에서 승차감과 핸들링을 동시에 구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기술"이라며 "정밀 노면 데이터와 차량 모델, 모션 플랫폼을 실시간으로 연동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개발 효율도 크게 높아졌다. 그는 "예전에는 1차 테스트를 진행하는 데 한 달에서 두 달 정도가 걸렸지만 지금은 약 3일이면 가능하다"며 "실차를 제작하기 전부터 다양한 조건을 반복 검증할 수 있어 개발 기간은 줄이고 완성도는 높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현대차·기아는 드라이빙 시뮬레이터를 양산차뿐 아니라 현대 N과 제네시스 마그마 등 고성능 차량 개발에도 활용하고 있다. 앞으로는 해외 시험장과 서킷 데이터를 구축해 글로벌 연구거점 간 공동 개발에도 적용 범위를 넓혀갈 계획이다.

◆ 보이지 않는 오차까지 데이터로 관리…품질도 디지털로 검증

차량 품질을 데이터로 관리하는 디지털 측정 센터(DMC)도 공개됐다. 차량 외관의 틈새나 단차는 단순한 마감 문제가 아니라 소음, 누수, 조립성 문제와도 연결된다. DMC는 외관 품질, NVH, 수밀, 기능 및 조립성 등 4대 항목을 중심으로 차체와 부품의 치수 품질을 검증한다.

연구실 안에서는 자율주행 운반 로봇(AMR)이 측정 대상을 옮기고 있었고, 로봇 암에 장착된 광학식 3D 스캐너는 차체를 쉼 없이 스캔하며 형상을 측정했다.

바디 스트럭처 측정실에는 센서가 차체에 직접 접촉해 좌표값을 읽는 3차원 측정장비(CMM)가 설치돼 있었다. 차량 한 대당 약 1000개의 측정 포인트를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약 600개의 평가 항목을 산출한다. 이렇게 구축된 품질 기준은 양산 공장으로 그대로 이관돼 연구개발 단계와 동일한 기준으로 생산 품질을 관리한다.

   
▲ 접촉식 측정 장비로 수치 측정을 하는 모습./사진=현대차그룹 제공


후드와 도어, 테일게이트 등 무빙 부품은 로봇 암에 장착된 3D 스캐너가 자동으로 형상을 측정했다. 작업자가 직접 측정하는 대신 AMR이 측정 대상을 이송하고 장비가 자동으로 형상을 읽어 들이는 구조였다.

완성차 복합 측정실에서는 실제 차체와 동일한 형상의 총합검사구에 부품을 장착한 뒤 조립 전후 품질을 비교했다. 완성차에서 문제가 발견되더라도 바디와 무빙 부품, 의장 부품 등 어느 공정에서 오차가 발생했는지 데이터를 기반으로 추적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어진 무빙 부품 검증 공간에서는 도어를 여닫는 순간 발생하는 미세한 변형까지 측정하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초고속 카메라와 각종 센서가 사람 눈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움직임까지 기록했고, 이렇게 축적된 데이터는 최적 조립 상태를 찾는 'DATA-FIT'과 품질 개선 방향을 도출하는 'DATA-AUDIT'에 활용된다.

◆ 금형 없이 부품 제작…3D프린팅 활용 영역 확대

적층 제조 솔루션 센터(AMSC)에서는 3D프린팅으로 불리는 적층 제조 기술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존 절삭 가공이 재료를 깎아내는 방식이라면, 적층 제조는 금속이나 수지를 한 층씩 쌓아 원하는 형상을 만드는 방식이다. 금형 없이 설계 데이터만으로 부품을 제작할 수 있어 시제품 제작과 선행 검증에 유리하다.

AMSC에는 액상 레진을 자외선으로 경화하는 DLP와 SLA 장비, 금속 와이어를 녹여 적층하는 WAAM(Wire Arc Additive Manufacturing), 금속 분말을 레이저로 녹여 쌓는 LPBF(Laser Powder Bed Fusion) 장비 등이 구축돼 있었다. 부품의 크기와 형상, 소재 특성에 따라 각각 다른 공법을 적용해 시제품 제작부터 양산 지원까지 활용 범위를 넓히고 있다.

   
▲ WAAM 장비가 금속을 적층하는 모습./사진=현대차그룹 제공


적층 제조 기술은 더 이상 연구용 시제품 제작에만 머물지 않았다. 폴리머 광중합셀에서는 기존에 해외에서 수입해 사용하던 생산라인용 변속기 지그 노즐을 자체 제작한 사례가 소개됐다. 수백만원에 달하는 부품을 내부에서 직접 제작하면서 비용을 절감했고, 공급 기간도 크게 줄였다는 설명이다.

헤리티지 차량 복원에도 적층 제조 기술이 활용되고 있었다. 전시장 한편에는 포니 사이드실 부품이 놓여 있었다. 단종으로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부품을 3D 스캔한 뒤 적층 제조로 형상을 복원하고 후가공과 도장까지 마친 결과물이다. 연구진은 "부품을 구할 수 없는 차량도 디지털 데이터를 활용하면 복원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금속 적층 분야에서는 알루미늄 모터 하우징, 티타늄 임펠러, 모터스포츠용 경량 부품 등이 전시됐다. 특히 안티 롤 바 블레이드, 댐퍼 브래킷, 브레이크 덕트 레일 등 경량화와 고강성이 동시에 필요한 부품 제작에 적층 제조가 활용되고 있다. 필요한 부품을 필요한 시점에 소량 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단종 부품 공급이나 맞춤형 부품 제작에도 활용 가능성이 크다.

◆ 차체 없이 수백 개 제어기 검증…SDV 시대 준비하는 노바랩

R&D 디지털 전환 현장의 또 다른 축은 SDV 시대를 대비한 핵심 검증 시설인 노바랩이었다. 연구실 중앙에는 일반적인 시험 차량 대신 배선과 제어기, 각종 전장 부품만 연결한 '와이어카(Wire Car)'가 놓여 있었다. 차체는 없지만 차량의 전기·전자 시스템은 실제 차량과 같은 환경으로 구성됐다. 실차를 제작하기 전 기능과 통신, 진단을 검증하기 위한 시험 플랫폼이다.

현대차·기아는 SDV 전환과 함께 차량 구조가 기능별 제어기 중심에서 고성능 차량용 컴퓨터(HPVC)와 존 컨트롤러 기반으로 바뀌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원 체계도 기존 12V에서 48V 중심으로, 차량 통신 역시 CAN에서 고속 이더넷 기반으로 전환되면서 검증 과정도 한층 복잡해졌다.

노바랩에서는 이러한 변화에 맞춰 차량 기능과 제어기 간 연동, 통신 상태를 실차 제작 이전 단계부터 반복적으로 검증한다.

   
▲ 와이어카를 활용해 차량 기능과 제어기 검증을 하는 연구원의 모습./사진=현대차그룹 제공


현장에서는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 검증 과정도 시연됐다. 전방 카메라에는 실제 도로를 주행하는 것과 같은 영상이 입력됐고, 레이더 타깃 시뮬레이터는 주변 차량과 장애물이 있는 것처럼 신호를 생성했다. 화면 속 차량은 앞차를 인식해 속도를 줄였다가 다시 설정 속도로 복귀했고, 후측방 차량이 접근하자 사이드미러 경고등이 점등됐다. 이어 방향지시등을 켜자 경고음과 함께 후측방 충돌 경고 기능이 작동했다.

이어진 두 번째 시나리오에서는 차로 유지 보조(LKA)와 전방 충돌방지 보조(FCA)가 시연됐다. 차량이 차선을 벗어나려 하자 스스로 차선을 유지했고, 전방 차량과의 거리가 좁혀지자 충돌 방지 기능이 단계적으로 작동했다. 실제 도로에서는 반복 시험이 쉽지 않은 상황도 가상 환경에서는 안전하게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이 연구진의 설명이다.

노바랩에서는 주행 보조 기능뿐 아니라 공조와 시트, 램프 등 기본 기능도 자동화 검증 시스템으로 반복 시험한다. 이상이 발견되면 원인을 분석해 개발 부문으로 전달하고, 개선된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를 다시 동일한 조건에서 검증하는 방식이다.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시험은 자동화해 개발 효율도 높였다.

현대차·기아는 신차 한 대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와이어카 단계에서만 평균 150~200건의 문제를 찾아 개선한다고 설명했다. 차량이 완성된 이후 문제를 수정하는 것보다 개발 초기 단계에서 오류를 걸러내는 것이 시간과 비용을 줄이고 완성도를 높이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날 둘러본 네 곳의 연구 시설은 역할은 서로 달랐지만 지향점은 분명했다. 실차 제작 이전부터 가상공간에서 반복 검증하고, 데이터를 기반으로 품질을 관리하며, 필요한 부품은 즉시 제작하고, 차량의 두뇌 역할을 하는 소프트웨어까지 사전에 철저히 검증하는 디지털 생태계 구축이다. 

자동차 개발의 패러다임이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와 데이터로 빠르게 이동하는 가운데 남양기술연구소는 미래 모빌리티 시대를 선점하기 위한 현대차·기아의 R&D 혁신이 디지털을 중심으로 완벽히 체질 개선을 이뤄내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미디어펜=김연지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