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베일 벗은 '호프', 칸이 열광했던 명확한 이유
수정 2026-07-07 09:04:20
입력 2026-07-07 09:04:23
이석원 부장 | che112582@gmail.com
미스터리 지우고 ‘미친 속도감의 액션’으로 채운 나홍진의 SF 블록버스터
황정민·조인성·정호연의 사투와 할리우드 스타들의 모션 캡처, ‘장르물 신기원’
황정민·조인성·정호연의 사투와 할리우드 스타들의 모션 캡처, ‘장르물 신기원’
[미디어펜=이석원 문화미디어 전문기자] 대한민국 장르 영화의 최전선에서 인간 본성의 심연과 날 것의 공포를 탐구해 온 나홍진 감독이 영화 '곡성'(2016) 이후 정확히 10년 만에 메가폰을 잡은 신작 '호프(HOPE)'가 마침내 국내 언론에 그 압도적인 실체를 드러냈다.
지난 5월 제79회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돼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던 이 작품은 6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열린 국내 첫 언론 시사회와 기자 간담회를 통해 베일을 벗었다.
이날 스크린이 꺼진 뒤 극장을 채운 것은 나홍진이 구축한 거대한 시각적 충격과 서스펜스였다. 베일을 벗은 '호프'는 왜 까다로운 칸의 평단이 그토록 이 영화에 열광했는지를 스크린 위의 폭발적인 에너지로 명확하게 증명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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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일 서울 강남구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열린 '호프'의 언론 시사회 후 가진 나홍진 감독(맨 오른쪽)과 정호연(왼쪽), 조인성(가운데), 그리고 황정민의 기자 간담회 모습./사진=연합뉴스 | ||
영화 '호프'는 비무장지대(DMZ) 인근에 위치한 가상의 한적한 항구 마을인 '호포항'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느 날, 마을의 길 한복판에서 기이하게 습격당한 거대한 소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마을은 술렁이기 시작한다. 소를 해친 주범이 호랑이일지도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 속에, 호포항 출장소장 범석(황정민 분)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마을 청년 성기(조인성 분)를 위시한 무리는 숲속으로 호랑이 사냥을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이들이 맞닥뜨린 것은 단순한 맹수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범석의 눈앞에는 무참히 초토화된 마을과 함께, 인류의 상식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정체불명의 미지의 괴생명체(외계인)가 모습을 드러내며 아비규환의 디스토피아로 변모한다.
이러한 설정은 나홍진 감독의 전작 '곡성'을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곡성'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외지인의 유입으로부터 시작되어 마을 전체를 의심과 기이한 역병으로 물들였다면, '호프' 역시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가 남긴 흔적으로부터 공포를 확산시킨다는 점에서 전작과 궤를 같이한다. 낯선 현상 앞에서 사람들이 통제할 수 없는 공포에 질려 눈이 뒤집히는 모습은 나홍진 감독이 오랜 시간 보여준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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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홍진 감독이 6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열린 영화 '호프' 시사회 및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
그러나 '호프'는 '곡성'의 변주에 머무르지 않고 과감한 진화를 선택했다. '곡성'의 주인공들이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 현상 앞에 의심을 반복하다가 결국 절망하며 파멸해 갔던 것과 달리, '호프'의 평범한 시골 사람들은 눈앞의 거대한 위협 앞에 무력하게 무릎 꿇지 않는다. 그들은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도 스스로의 손에 총을 쥐여 주고 외계인을 향해 거친 생존 본능을 발산하며 맞받아친다. 미스터리와 오컬트의 눅눅함을 지워낸 자리에 가차 없고 역동적인 '액션'과 'SF'의 외피를 전면에 채워 넣은 것이다.
대사를 지우고 온몸으로 느끼는 비주얼…나홍진의 새로운 영화 문법
나홍진 감독은 언론 시사회 직후 이어진 기자 간담회에서 '곡성'과 이번 신작의 본질적인 차별점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적 문법의 변화를 꼽았다. 나 감독은 "이 영화는 전작에 비해 폭력의 수위가 매우 낮은 영화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접근했다"고 자평하며, 영화의 전달 방식을 텍스트(대사)와 액션(비주얼·사운드)으로 나눈다면 '곡성'은 전자의 비중이 컸지만 '호프'는 단연 후자의 비중이 압도적인 영화라고 정의했다. 즉, 대사라는 텍스트를 최소화하고, 거친 액션과 시청각적 자극을 통해서 관객이 스토리를 느끼게 해야 하는 영화라는 설명이다.
나 감독은 극 중 조인성이 연기한 마을 청년 성기가 외계인에게 격렬하게 추격당하는 극한의 위기 상황을 예로 들었다. 일반적인 영화라면 인물이 처한 공포와 생존 의지를 전달하기 위해 "나는 정말 살고 싶다"는 식의 대사를 쏟아내겠지만, '호프'에서는 그러한 직접적인 대사를 과감히 생략했다. 대신 거친 숨소리, 요동치는 카메라 워킹, 그리고 인물의 처절한 몸짓이라는 '액션'만으로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생존 의지를 관객의 뇌리에 직접 꽂아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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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호프'에서 무대가 된 호포항의 출장소장 범석 역을 맡은 황정민./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이먼 제공 | ||
영화는 괴생명체의 실체가 완전히 스크린 전면에 드러나기 전까지 음산한 괴성과 부서진 건물, 피투성이가 된 채 널브러진 시체 등 파편화된 단서들만을 노출하며 긴장감을 서서히 조여온다. 그리고 관객의 호기심이 극에 달했을 때, 시골 마을이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과 외계 생명체라는 가장 이질적인 요소를 충돌시키며 발생하는 기묘한 서스펜스를 폭발시킨다.
이 와중에 뜬금없는 상황에서 실소와 킬킬거림을 유발하는 나홍진 특유의 엇박자 블랙 유머는 2시간 36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영화의 독창적인 개성과 색깔을 더하는 훌륭한 양념 역할을 해낸다.
트래킹 촬영이 만든 미친 속도감·황정민·조인성·정호연의 전천후 사투
나홍진 표 SF 블록버스터의 외피를 완성한 것은 단연 대한민국 대표 배우들의 처절하고도 강도 높은 고강도 액션이다. '호프'는 초반부 호포항 출장소장 범석(황정민 분)과 순경 성애(정호연 분)가 이끄는 마을 안의 카체이싱 액션으로 강렬한 포문을 열고, 후반부에는 마을 청년 성기(조인성 분)를 중심으로 한 숲속의 맹렬한 사투로 이어지는 유기적이고 짜임새 있는 흥행 구조를 취한다.
영화 속 액션의 백미는 피사체와 같은 속도로 움직이며 촬영하는 '트래킹 촬영' 기법의 적극적인 활용이다. 경찰차를 타고 외계인을 격렬하게 추격하는 범석과 성애의 모습, 그리고 말을 탄 채 외계인들 사이를 뚫고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성기의 질주를 카메라가 같은 속도로 바짝 추적하면서 관객은 현장의 한복판에 팽팽하게 내던져진 듯한 압도적인 속도감과 스릴을 만끽하게 된다. 건물을 순식간에 종잇장처럼 부수고 인간을 저 멀리 날려 보내는 압도적인 파괴력의 외계인에 맞서는 인간들의 타격감 넘치는 액션은 장르적 쾌감을 선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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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을 청년 성기 역의 조인성은 "어렵게 찍은 만큼 '참 위대한 장면'이 나왔다고 술회했다./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이먼 제공 | ||
특히 배우 조인성은 달리는 말과 차량 위에서 중심을 잡으며 사냥용 총을 난사하고, 괴생명체와 날 것 그대로의 육탄전을 벌이며 여러 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등 필모그래피 사상 가장 거칠고 고난도인 액션 시퀀스를 소화해 냈다. 조인성은 간담회에서 "마지막 액션 시퀀스가 육체적으로 특히 가장 어려웠다"고 털어놓으면서도, "어렵게 찍은 만큼 개인적으로 '참 위대한 장면이 나왔다'고 생각할 정도로 화면이 뿌듯하게 잘 나왔고,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며 작품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글로벌 스타로 도약해 이번 작품으로 나홍진 사단에 합류한 정호연의 활약 역시 눈부시다. 정호연은 거친 경찰차 운전대를 잡고 화려한 드리프트 액션을 대역 없이 상당 부분 직접 선보이는가 하면, 외계인에 맞서 싸우는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도 결정적인 타격을 날리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반면, 극 중 외계인과 가장 먼저 조우하며 관객의 시선을 여는 황정민은 무소불위의 강력한 영웅의 모습이 아닌, 예상치 못한 초자연적 존재 앞에 시종일관 놀람과 짜증, 두려움을 오가는 지극히 서민적이고 소심한 출장소장의 얼굴을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주연 배우들의 스크린 밖 활약 못지않게 극의 몰입도를 높인 것은 외계인 역할을 소화한 할리우드 배우들의 숨은 헌신이다. 마이클 패스벤더와 알리시아 비칸데르, 그리고 테일러 러셀 등 할리우드 탑스타들이 대거 참여한 '호프'는 이들이 직접 센서를 부착하고 연기하는 모션 캡처와 페이셜 캡처 기술을 적극 도입했다.
비록 배우 본연의 아름다운 비주얼은 정교한 외계인의 외양 뒤로 가려졌지만, 그들이 내뿜는 독창적인 아우라와 가상의 외계어로 구사하는 내밀한 감정 연기는 극의 이질적이면서도 장엄한 분위기를 한층 배가시킨다.
칸 상영 이후에도 멈추지 않은 장인의 가위질…가치 증명할 하반기 구원투수
영화 '호프'는 지난 5월 칸 영화제 월드 프리미어 상영 당시, 압도적인 연출력과 흡입력 있는 서스펜스에 대해서는 전 세계 평단의 만장일치 찬사를 받았으나, 일부 대목에서 컴퓨터그래픽(CG)의 마무리가 다소 어색해 몰입을 방해한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나홍진 감독은 이러한 피드백을 가벼이 넘기지 않고, 국내 개봉을 불과 열흘도 남겨두지 않은 시사회가 끝난 시점까지도 작품의 완성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집요한 고민과 가위질을 멈추지 않는 장인 정신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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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스타의 자리에서 '호프'에 합류한 정호연의 활약도 눈부셨다./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이먼 제공 | ||
나 감독은 칸 영화제 최초 상영 이후 곧바로 대대적인 후반 편집 작업에 착수했다. 극의 전체적인 뼈대나 내용상의 큰 변화를 주지 않는 선에서 컴퓨터그래픽의 밀도와 디테일을 비약적으로 업그레이드했다. 동시에 서사의 늘어지는 호흡을 과감하게 덜어내며 영화의 전체 상영 시간을 기존 2시간 40분에서 2시간 36분으로 4분가량 단축시켜 극의 텐션을 더욱 팽팽하게 당겼다.
나 감독은 이에 대해 "이 영화를 후반 작업실에서 몇천 번은 돌려본 것 같다. 마지막으로 관객들과 만나는 극장에 걸리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내 스스로에게 미련과 후회가 남지 않는 완벽한 결과물을 내놓고 싶었다"고 밝혀 연출자로서의 무서운 집념을 드러냈다.
물론 '호프'가 지닌 장르적 특성이 모든 대중에게 친절한 것은 아니다. 영화는 외계 생명체가 왜 하필 DMZ 인근의 작은 시골 마을인 호포항에 불시착하게 되었는지,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과 기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친절한 설명이나 뻔한 설정을 과감히 생략한다. 전작 '곡성'이 남겼던 서사의 거대한 모호함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외계인을 둘러싼 플롯의 많은 부분은 관객의 상상력과 몫으로 남겨둔 채 끝을 맺는다.
특히 영화의 결말부는 모든 사건이 깔끔하게 매듭지어지는 닫힌 결말이라기보다는, 거대한 폭풍우가 몰아치기 직전 또 다른 거대한 서사의 시작을 알리는 듯한 강렬한 인상을 풍기며 관객들의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표와 긴 여운을 동시에 남긴다.
올해 상반기 국내 극장가는 1690만 관객을 동원한 '왕과 사는 남자'라는 초대형 흥행작의 탄생으로 외형적인 매출 급증을 기록했으나, 대작들의 잇따른 부진과 특정 작품으로의 관객 쏠림 현상이라는 숙제를 떠안고 하반기를 맞이했다. 이러한 시점에서 마침내 베일을 벗은 나홍진 감독의 '호프'는 웰메이드 장르물이 줄 수 있는 스크린 본연의 미학을 완벽히 구현해 내며 하반기 극장가 전체를 구원할 가장 강력한 카드로 주목받고 있다.
거장의 집요한 연출력과 배우들의 목숨을 건 열연, 그리고 할리우드의 기술력이 결합해 한국 영화 장르물의 새로운 신기원을 선포한 SF 블록버스터 '호프'는 오는 7월 15일 국내 관객들을 먼저 찾아와 극장가 점령에 나선 뒤, 오는 9월 북미 시장에서 글로벌 흥행 질주를 이어갈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