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 봉쇄 현실화…정유업계, 공급망·가격규제 ‘이중 덫’ 직면
수정 2026-07-23 15:27:34
입력 2026-07-23 15:27:43
김동하 기자 | rlacogk@mediapen.com
흔들리는 얀부항 밸류체인…아시아 원유 수급 '빨간불'
정부 '최고가격제 강화' 만지작…수익성 벼랑 끝 정유사
정유업계 '송유관 우회' 사활…중동 의존 탈피 속도전
정부 '최고가격제 강화' 만지작…수익성 벼랑 끝 정유사
정유업계 '송유관 우회' 사활…중동 의존 탈피 속도전
[미디어펜=김동하 기자] 예멘 후티 반군이 홍해 해상 봉쇄를 선언하고 무전 경고 등 실력 행사에 나서며 글로벌 원유 공급망이 마비될 위기에 처했다. 글로벌 원유 공급의 25%가 차질을 빚으면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위협하는 가운데 중동산 원유 의존도가 높은 국내 정유업계는 물류비 폭등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정부의 '석유 최고가격제' 검토까지 더해지며 정유사들은 원가 상승과 내수 가격 통제라는 이중 덫에 빠지며 수익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3일 업계에 따르면 후티 반군은 바브엘만데브 해협 인근 해상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적국의 선박 항행을 금지하며 불응 시 표적이 될 것이란 내용의 경고 무전을 전송한 것으로 파악됐다.
국제해운회의소(ICS)와 해상보안업체 넵튠 P2P 그룹 등이 해당 무전 내용을 공식 확인하면서 시장의 긴장감은 고조된 상황이다. 봉쇄 선언 이후 사우디산 원유를 실은 일부 유조선들은 회항하는 등 물류 적체 징후가 관찰되고 있으며, 글로벌 해상 위험 평가 기관들은 이를 실제적인 군사적 위협으로 평가하고 운항 주의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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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멘 후티 반군이 홍해 해상 봉쇄를 선언하면서 국내 정유업계가 물류비 폭등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HD현대중공업이 건조한 VLCC./사진=HD현대중공업 제공 | ||
◆ 호르무즈 이어 홍해까지 차단 우려…아시아 원유 수급 불안 고조
지정학적 리스크가 불거진 바브엘만데브 해협은 국내 정유업계의 원유 조달 밸류체인에서 핵심적인 요충지로 꼽혀왔다. 그동안 정유사들은 호르무즈 해협 통행이 불안해질 경우 사우디아라비아의 동서 관통 파이프라인을 거쳐 홍해 연안 얀부항으로 원유를 보낸 뒤 이 해협을 통과시켜 국내로 들여오는 대체 경로를 활용해 왔다.
글로벌 에너지 컨설팅업체 리스타드 에너지의 분석 자료를 보면 사우디 얀부항에서 수출되는 원유 및 연료 물동량 중 하루 평균 약 250만 배럴이 이 해협을 통해 남쪽 아시아 시장으로 향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후티 반군의 타깃이 사우디 관련 선박과 홍해 노선에 집중될 조짐을 보이면서 이 우회로를 주요 공급망으로 삼던 한국,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이 가장 먼저 수급 불안정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해운 데이터업체 케이플러의 분석에 의하면 현재 해당 해협의 일일 통행량은 평시 수준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지만 후티 반군의 무전 경고 이후 유조선들이 북쪽 수에즈 운하 방향으로 뱃머리를 돌리는 등 물류 교란이 가시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흑해 지역에서도 우크라이나의 무인기 타격으로 카스피해 송유관 컨소시엄(CPC) 파이프라인 운영에 일부 차질이 빚어지는 등 전 세계 에너지 밸류체인이 동시다발적인 충격을 받는 양상이다.
이처럼 원유 주요 수송로의 리스크가 부각되자 국제유가는 즉각적인 오름세를 나타냈다. 브렌트유와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가격은 일제히 상승하며 약 5주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향후 중동의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지 않는다면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재차 돌파할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점쳐진다.
만약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통과하지 못하고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수송해야 할 경우 기존 항로 대비 운항 기간이 최대 4주 이상 늘어날 수 있다. 이로 인해 해상 운임과 유조선 연료비 부담이 급증하게 된다. 이는 국내 정유사의 원가 상승 압력을 키우는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 최고가격제 강화 검토에 긴장감…마진 축소 우려
글로벌 물류비 상승이라는 외부 충격에 더해, 물가를 관리하려는 정부의 시장 개입 가능성은 정유사들의 경영 불확실성을 키우는 변수로 떠올랐다. 최근 정부는 중동발 공급망 악화에 따른 국내 물가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석유 최고가격제 강화'를 신중히 검토할 필요성이 있음을 시사했다.
정유사의 핵심 수익 지표인 정제마진은 도입 원가와 최종 석유제품 판매 가격의 차이에서 결정되는데, 원가 인상분이 제품 판매 가격에 제때 반영되지 못하고 상한선 규제에 묶일 경우 정유사들의 수익 방어에 빨간불이 켜질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이러한 규제 검토 움직임은 기업의 수익성 확보라는 민간의 논리와 국가적 물가 안정 및 서민 경제 보호라는 공공의 논리가 맞부딪히는 구조적 갈등 양상을 띤다.
정유사 입장에서는 글로벌 밸류체인 불안으로 인한 비용 상승분을 제품 가격에 어느 정도 반영해야만 실적 방어와 미래 친환경 설비 투자를 이어갈 여력을 확보할 수 있다. 반면 정부는 국제유가 상승이 국내 제조업 전반과 민간 소비에 미칠 부정적인 파급력을 차단하기 위해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정유업계의 선제적인 물가 안정 동참을 요구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산업통상자원부 차원에서는 9월 물량을 미리 확보해 당장의 국가 원유 수급 자체에는 큰 차질이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지만 중장기적인 시장 구조 왜곡에 대한 업계 안팎의 우려는 여전하다. 아시아 최대 석유 소비국인 중국의 경우 이번 사태를 계기로 러시아 등 대안 공급처와의 밀착을 한층 강화하며 독자적인 공급망 구축에 나선 것으로 파악된다.
글로벌 에너지 역학 구조가 격변하는 상황에서 국내 정유사들이 내수 시장의 강력한 가격 규제에 발이 묶인다면, 장기적인 밸류체인 경쟁력 강화나 미래 에너지 전환을 위한 재원 마련이 상대적으로 더뎌질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 정유업계 우회로 확보 총력…공급망 다변화가 생존 열쇠
대내외적 압박이 거세지면서 국내 정유업계는 지정학적 리스크를 피하고 원유 수급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선제적인 비상 경영 체제에 돌입했다. 특히 사우디 얀부항 노선을 통한 원유 도입 비중이 있어 리스크 노출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알려진 HD현대오일뱅크는 발 빠른 대체 밸류체인 마련에 착수했다.
HD현대오일뱅크는 원유 수송용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을 임대 과정에서 피격 위협이 도사리는 홍해 경로를 제외한다는 방침이다. 대신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거나 이집트 수메드(SUMED) 송유관을 이용하는 조건을 긴급하게 포함시키며 우회 수송로 확보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이로 인해 운송 시간이 다소 늘어나고 추가 물류비용이 발생하겠지만, 후티 반군의 직접적인 피격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공장 가동에 필요한 원유 물량을 안정적으로 가져오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기업 차원의 전략적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에쓰오일 등 다른 정유사들 역시 밸류체인 전반의 리스크 매니지먼트를 강화하며 생존 전략 모색에 힘을 쏟고 있다. 특정 해협이나 중동 지역에 편중된 원유 도입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미주나 아프리카 등으로 원유 도입선을 넓히는 공급망 다변화 방안을 현업 부서에서 적극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미국과 이란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홍해 해상 위협이 장기화될 경우 글로벌 물류비 상승 체계가 일시적 현상이 아닌 구조적 비용 문제로 굳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정유사들이 막대한 비용을 감수하며 원유 수송로를 우회하고 공급망 재구축에 사활을 거는 상황에서 최고가격제 등 시장 통제 성격의 단기적 규제가 현실화될 경우 국내 정유 밸류체인이 훼손되고 나아가 국가적 에너지 안보 기반마저 약화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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