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무법인 더보상 공도원 변호사./사진=더보상 제공
자살 산재 사건에서 승소했다는 소식을 유족에게 전하는 순간은 오랜 기간 소송을 대리해 온 담당 변호사에게도 각별하다. 고인의 업무와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받기까지 유족이 겪어 온 시간과 어려움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산재보험은 지급됐는데, 민영보험사로부터 보험금은 지급되지 않는다”라는 문의를 받는 경우가 있다. 유족 입장에서는 이같은 상황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이미 법원에서 업무와 사망 간 상당인과관계를 인정받아 산재보험을 지급받았는데, 민영보험에서는 다른 판단을 한다고 하니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실제로 산재보험과 민영보험은 근로자의 자살을 판단하는 법적 기준이 서로 다르다. 사건을 수행한 변호사로서도 오랜 소송 절차 끝에 산재를 인정받은 유족에게 다시 한 번 다른 기준에 따른 판단을 설명해야 할 때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어렵게 하나의 문턱을 넘었는데 또 다른 문턱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은 원칙적으로 근로자의 고의나 자해행위로 인한 사망을 업무상 재해로 보지 아니한다. 다만 정상적인 인식능력이나 행위선택능력이 뚜렷하게 낮아진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했고, 그와 같은 상태가 업무상의 사유에서 비롯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이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한다.

구체적으로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 제36조에서 업무상 사유로 발생한 정신질환으로 치료를 받던 사람이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한 경우뿐만 아니라, 그 밖에 업무상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했다는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경우도 업무상 재해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산재보험의 특징은 업무와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가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하게 증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법원은 업무와 자살 사이의 인과관계가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하게 증명돼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근로자가 극심한 업무상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정신적 고통으로 우울증세가 악화되고 그 결과 정상적인 인식능력이나 행위선택능력, 정신적 억제력이 현저히 저하돼 자살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면, 근로자의 업무내용과 업무상 스트레스의 정도, 정신적 상태, 자살에 이르게 된 경위 등 여러 사정을 종합해 규범적인 관점에서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

따라서 산재 사건에서 정신건강의학과 의무기록이나 의학적 감정 소견은 물론 중요한 판단자료가 되지만, 업무가 자살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의학적 소견이 명확하게 제시돼야만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산재보험에서 중요한 것은 업무상의 사유가 근로자의 정신적 상태를 악화시키고, 그 결과 자살에 이르게 했다고 규범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지 여부이다.

반면 민영보험에서 자살을 판단하는 기준은 조금 다르다. 일반적으로 보험약관에서 피보험자가 고의로 자신을 해친 경우를 보험금 지급의 면책사유로 정하면서, 정신질환 등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해친 경우에만 그 면책의 예외로 두고 있다.

따라서 보험금 청구에서는 업무와 자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는 지가 아니라, 자살 당시 피보험자가 정신질환 등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는 지가 핵심 쟁점이 된다.

우리 법원은 피보험자가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사망에 이르렀는지 여부를 단순히 정신질환의 진단 여부만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사망자의 나이와 성행, 신체적·정신적 상태, 정신질환의 발병 시기와 진행 경과 및 정도, 자살에 즈음한 구체적인 증상, 주변 상황과 당시의 행태, 자살의 시기와 장소, 동기, 경위와 방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이를 판단한다.

이러한 산재보험과 민영보험의 차이는 최근 하급심 판결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최근 2024가단5247658 판결에서 앞선 산재 소송에서 고인의 자살과 업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됐다는 사정만으로 보험계약상 보험금 지급요건이 충족되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구체적으로 법원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서 위험으로 담보하는 '업무상 재해'라 함은 '업무상의 사유로 인한 근로자의 부상·질병·신체장해 또는 사망'을 말하는 것으로서 업무상의 사유와 사망 등의 결과가 인과관계가 있는 지가 주된 판단대상이 될 뿐, 그 업무상 재해가 '우발적인 외래의 사고'로 인한 것임을 요구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근로자의 기초질병이나 기존질병이 반복된 업무로 인한 피로의 누적으로 유발·악화되어 근로자의 부상·질병·신체상해 등이 발병하였더라도 근로자의 질병 등과 반복된 업무와의 인과관계가 있으므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의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는 것이지만 보험계약에서 담보되는 '재해'는 '우발적인 외래의 사고'로 인한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산업재해보상보험법 등에 따라 업무상 재해 판정을 받았다고 하여, 보험계약에서의 '사고의 우발성, 외래성' 및 장해라는 결과와 사이의 인과관계 등에 대한 입증이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라고 판단했다.

결국 이러한 판단기준의 차이는 유족과 소송 대리인이 실제 사건에서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 지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산재 사건에서는 고인이 어떠한 업무를 담당했는지, 업무량이나 책임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직장 내 갈등이나 업무상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였는지, 그러한 사정이 고인의 정신상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 지를 중심으로 증거를 수집해 제출하게 된다. 업무자료와 이메일, 인사자료, 동료들의 진술, 가족과 나눈 대화, 정신건강의학과 의무기록 등이 그 과정에서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반면 민영보험금 청구에서는 같은 자료를 보더라도 입증 방향을 달리해야 한다. 고인이 자살에 이르기까지 업무상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는 증명이 충분하지 않고, 자살 당시 고인의 정신상태가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는지를 증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자살에 가까운 시기의 의무기록과 투약내역, 구체적인 언행과 행동의 변화, 가족이나 동료에게 남긴 말, 문자메시지나 메모, 자살의 경위와 방법 등을 보다 면밀하게 수집해 정리할 필요가 있다.

결국 같은 자살이라고 하더라도 산재보험 사건과 민영보험 사건에서 입증의 방향과 증거계획은 같을 수 없다. 산재보험에서는 업무와 사망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민영보험에서는 자살 당시 자유로운 의사결정 능력의 상실 여부를 각각 중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 죽음을 두고 서로 다른 결론이 내려질 수 있다는 사실은 유족의 입장에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어느 한쪽의 판단이 잘못됐다기보다 산재보험과 민영보험이 보호하는 위험과 그 판단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로 인하여 자살 사건의 경우 초기의 대응이 중요하다. 산재가 인정된 뒤에 그 자료 만으로 보험금 지급까지 당연히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고인의 당시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문자메시지나 메모, 회사 내부 자료가 사라지거나 주변 사람들의 기억도 희미해질 수 있다.

따라서 근로자의 자살과 관련된 사건에서는 오로지 산재 신청만을 염두에 두기보다 고인이 가입한 보험의 내용과 향후 민영보험 보험금 청구 가능성까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관련 자료가 남아 있는 사건 초기부터 산재와 민영보험이 각각 무엇을 요구하는 지를 구분하고, 그 판단기준에 맞추어 증거를 확보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어렵게 하나의 문턱을 넘은 유족이 또 다른 절차에서 처음부터 다시 고인의 죽음을 설명해야 하는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다.
[미디어펜=문수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