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약세=수출 호재’공식 흔들…달러 벌지만 원자재·에너지도 달러로 구매
단기 수혜기업 61.8%→장기 19.9%…고환율 지속될수록 생산비용 부담 확대
해외생산 확대·환율 변동성까지 겹쳐…‘환율 효과’ 기업별 차별화
2026년 하반기 세계 경제는 겉으로 보면 예상보다 강하다. 미국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알파벳·아마존·메타 등 빅테크의 막대한 AI 투자가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전력, 건설투자를 동시에 끌어올리며 경제 성장을 떠받치고 있다. 한국 역시 AI 메모리 호황을 등에 업은 반도체 수출이 빠르게 증가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뿐 아니라 전체 수출과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고 있다. 그러나 숫자 아래에서는 다른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국가부채는 사상 처음 40조달러를 넘어섰고 장기 국채금리는 높은 수준을 이어가고 있다. 정부가 막대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국채를 쏟아내는 동시에 빅테크들도 AI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천문학적인 자금을 조달하면서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자금 수요가 동시에 커지고 있다. 소비 증가세가 둔화하는 가운데 물가와 금리는 쉽게 내려가지 않고 고유가와 지정학적 위험도 경제에 부담을 주고 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착시’가 나타난다. 반도체 수출과 대기업 실적은 강하지만 중소기업과 내수업종, 비IT 산업에서는 경기 회복을 체감하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크다. 반도체라는 특정 산업이 한국 경제 전체의 숫자를 끌어올리면서 업종과 기업 규모에 따른 격차가 확대되는 ‘K자형 성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원화 약세 역시 과거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과거에는 ‘원화 약세=수출기업 호재’라는 공식이 통했지만 해외 생산 확대와 중국 기업의 경쟁력 향상, 원자재 수입가격 상승 등으로 고환율의 수출 증대 효과는 과거보다 약해지고 있다. 미디어펜은 AI와 반도체가 만들어낸 호황의 숫자 뒤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부채·장기금리·소비·환율·산업 양극화라는 경제의 균열을 들여다본다. 글 싣는 순서는 ①반도체가 끌어올린 한국경제…수출 호황에도 왜 ‘온도차’ 날까 ②AI가 가린 미국경제의 균열…40조달러 빚과 빅테크가 벌이는 ‘돈 쟁탈전’ ③원·달러 1400원이 뉴노멀?…원화 약세인데 수출기업은 왜 못 웃나 ④‘싼 원화’ 시대는 끝났다…‘비싸도 팔리는 한국’ 어떻게 만들까 순으로 게재한다. [편집자주]

[기획-잘나가는 한국경제, 진짜 강해졌나]
③원·달러 1400원이 뉴노멀?…원화 약세인데 수출기업은 왜 못 웃나

[미디어펜=김태균 편집국장]한국 경제에는 오랫동안 익숙한 공식이 있었다. ‘원화 약세는 수출기업에 호재다.’ 달러로 받은 수출대금을 원화로 바꾸면 기업이 손에 쥐는 돈이 늘어난다. 환율이 1달러당 1200원일 때 미국에서 100달러어치를 팔면 원화 매출은 12만원이다. 환율이 1400원이 되면 같은 제품을 팔아도 14만원이다. 그래서 과거 원·달러 환율 상승은 자동차와 전자, 조선 등 한국 대표 수출기업에 호재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최근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한국무역협회가 기업 수출입·재무자료와 산업연관표를 결합해 분석한 결과 환율 상승으로 단기적으로 영업이익률이 개선되는 수출기업 비중은 61.8%였다. 하지만 환율 상승이 국내 물가와 생산비용으로 전이되는 장기 효과까지 반영하고 기업이 비용 상승분을 판매가격에 충분히 전가하지 못한다고 가정하면 수익성이 좋아지는 기업 비중은 19.9%로 급감했다.

10곳 가운데 6곳 이상이 누리던 환율 효과가 시간이 지나면 약 2곳에만 남는 셈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한국 기업은 달러를 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달러를 쓰기도 하기 때문이다.

   
▲ 고환율 시대가 한국에 던지는 진짜 질문은 환율 전망이 아니다. ‘환율의 도움 없이도 세계시장에서 팔 수 있는가’이다. /사진=연합뉴스

달러로 벌지만 달러로 산다…고환율의 두 얼굴

한국은 에너지와 핵심 원자재 상당 부분을 해외에서 수입한다. 원유와 천연가스, 철광석, 구리, 곡물은 물론 제조업에 필요한 각종 장비와 소재·부품 역시 해외에서 들어온다. 상당 부분이 달러로 결제된다. 환율이 오르면 달러 수출대금을 원화로 환산했을 때 매출은 늘지만 원자재를 사오는 비용도 동시에 증가한다.

특히 수입 원재료 비중이 높은 기업은 환율 상승의 수혜가 원가 상승으로 상당 부분 사라질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영향은 더 넓어진다. 원화 약세 → 수입가격 상승 → 기업 생산비용 상승 → 제품가격 상승 → 소비자물가 상승이라는 경로가 만들어진다. 다른 기업이 생산한 제품을 중간재로 사용하는 기업의 비용도 다시 올라간다. 

한국무역협회가 단기와 장기의 환율 효과를 따로 분석한 이유다. 환율 상승 초기에는 수출대금을 원화로 환산하면서 얻는 효과가 바로 나타난다. 그러나 고환율이 장기간 이어지면 수입가격과 물가 상승이라는 비용이 경제 곳곳으로 퍼진다. 결국 환율 효과를 갉아먹는다.

한국 기업도 달라졌다…미국서 만들어 미국서 판다

기업의 생산구조 변화도 환율 공식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과거 한국 수출기업의 전형적인 모습은 한국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어 해외에 판매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자동차와 전자, 배터리 등 주요 기업들이 미국과 유럽, 인도, 동남아시아 등에 생산기지를 구축했다. 현지에서 생산해 현지에서 판매하면 매출과 비용이 같은 통화로 발생하는 경우가 늘어난다. 달러 매출이 늘어나는 대신 현지 공장 인건비와 부품비용 역시 달러로 지출된다.
이른바 ‘자연 헤지’ 효과다. 따라서 이제는 단순히 원·달러 환율이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기업의 실적이 좋아진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기업별 해외생산 비중과 수입 원재료 비중, 결제통화, 환헤지 비율을 함께 봐야 한다. 환율의 변동성 자체도 부담이다. 수개월 뒤 받을 수출대금과 지급해야 할 수입대금의 원화 가치가 크게 움직이면 기업의 사업계획과 원가관리도 어려워진다.

대기업은 선물환과 통화스와프 등 다양한 금융수단을 활용할 수 있지만 전문인력과 거래 여력이 부족한 중소·중견기업은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한국무역협회가 외환시장 안정과 함께 무역금융 확대, 선물환·환변동보험 등 환헤지 지원 강화를 주문하는 이유다.

결국 문제는 1400원이 아니다…‘환율 없이 팔 수 있나’

그렇다면 원·달러 환율 1400원은 한국경제에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답은 간단하지 않다. 달러 매출이 많고 원화 비용 비중이 높은 기업에는 분명 도움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수입 원재료 비중이 높거나 달러 부채가 많은 기업에는 부담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환율의 절대적인 숫자 하나가 아니다. 높은 환율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 기업의 비용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그리고 환율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따라서 ‘원화 약세=수출기업 호재’라는 오래된 공식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원화 약세가 일부 수출기업에 단기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고환율이 장기화하면 원가와 물가 상승을 통해 그 효과가 상당 부분 사라질 수 있다. 여기서 더 근본적인 질문이 생긴다. 한국 기업의 수출경쟁력이 원화 가치가 떨어져야 생기는 것이라면 과연 그 경쟁력은 얼마나 강한 것일까.

원화가 1400원이어야 팔리는 제품과 원화가 1200원이어도 팔리는 제품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강한지는 분명하다. 결국 고환율 시대가 한국에 던지는 진짜 질문은 환율 전망이 아니다. ‘환율의 도움 없이도 세계시장에서 팔 수 있는가’이다.
[미디어펜=김태균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