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연구진, 갤럭시 AI 베트남어 모델 개발 참여
ASR·번역·음성합성까지…한국·인도 연구진 공동개발
‘현지화 연구소’ 넘어 글로벌 AI 개발 네트워크로
인공지능(AI)과 소프트웨어가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면서 국내 기업의 글로벌 연구개발(R&D) 전략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 해외 연구소가 한국에서 개발한 제품을 현지 시장에 맞게 바꾸는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해외 연구진이 글로벌 제품에 들어가는 핵심 기술을 직접 개발하는 단계로 진화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인도와 베트남, LG전자는 베트남, 현대자동차그룹은 인도에서 현지 연구인력과 대학을 글로벌 R&D망에 편입시키고 있다. 미디어펜은 ‘글로벌 두뇌전쟁’을 통해 한국 기업의 해외 R&D 전략과 세계 기술인재 확보 경쟁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미디어펜=김태균 편집국장]삼성전자의 갤럭시 스마트폰에 탑재된 인공지능(AI)이 베트남 사람의 말을 듣고 이해해 실시간으로 통역할 수 있는 배경에는 베트남 현지 연구진이 있다. 삼성전자 베트남 연구개발센터(Samsung R&D Institute Vietnam·SRV) 연구진은 갤럭시 AI의 베트남어 언어모델 개발에 직접 참여했다. 단순히 한국에서 개발된 AI를 베트남어로 번역한 것이 아니다.

베트남 연구진은 한국과 인도 연구진 등과 협력해 베트남어 데이터를 구축하고 자동음성인식(ASR), 신경망 기계번역(NMT), 음성합성(TTS) 등 갤럭시 AI 언어기능의 핵심 개발 과정에 참여했다.

그 결과 베트남어는 2024년 갤럭시 S24 시리즈와 함께 공개된 갤럭시 AI에서 최초 지원된 13개 언어 가운데 하나가 됐다. 해외 R&D센터가 현지 소비자를 지원하는 조직에서 글로벌 제품의 핵심 기능을 직접 만드는 조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 삼성전자는 2022년 말 하노이에 대규모 R&D센터를 준공했다. 회사는 이곳을 동남아시아의 주요 연구개발 거점으로 육성하고 있다. 연구영역도 모바일 소프트웨어를 넘어 AI, IoT, 빅데이터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AI 생성 이미지

'마·마·마'를 어떻게 구별할까…베트남 연구진이 AI 가르쳤다

AI가 베트남어를 이해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베트남어에는 6개의 성조가 있다. 같은 철자의 단어라도 어떤 높낮이와 억양으로 발음하느냐에 따라 뜻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삼성전자가 공개한 사례가 'ma', 'mả', 'má'다. 철자와 소리는 비슷하지만 성조에 따라 각각 귀신, 무덤, 어머니라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사람에게는 자연스럽지만 AI에는 난제다. 베트남 연구진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AI가 음성의 미세한 차이를 구별할 수 있도록 학습 데이터를 정교하게 다듬었다.

갤럭시 AI의 언어기능은 크게 세 단계로 작동한다. 먼저 사람이 하는 말을 AI가 문자로 바꾸는 자동음성인식(ASR)이 필요하다. 이어 인식된 문장을 다른 언어로 바꾸는 신경망 기계번역(NMT)을 거친다. 마지막으로 번역된 문장을 다시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려주는 음성합성(TTS)이 작동한다.

통화 중 사용하는 '실시간 통역(Live Translate)'을 예로 들면 사용자가 한국어로 이야기했을 때 스마트폰이 이를 인식하고 베트남어로 번역한 뒤 상대방에게 베트남어 음성으로 전달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이 거의 실시간으로 이뤄져야 자연스러운 통화가 가능하다.

삼성전자에 따르면 SRV 연구진은 베트남어의 성조를 보다 정확하게 구별하기 위해 약 20밀리초(ms) 단위의 짧은 음성 프레임을 구분하는 모델을 개발하는 등 언어 특성에 맞는 기술을 적용했다. AI가 베트남어를 배운 것이 아니라 베트남 연구진이 AI에게 베트남어를 가르친 셈이다.

한국·인도·베트남 연구진 연결…AI도 '글로벌 공동개발'

중요한 대목은 개발 방식이다. 베트남 연구진만 독립적으로 베트남어 AI를 만든 것이 아니다. 삼성전자에 따르면 SRV 연구진은 갤럭시 AI 프로젝트 과정에서 한국과 인도의 연구진과 협력했다.

베트남 연구진 일부는 한국과 인도에서 AI 모델 구조와 알고리즘, 학습 방법, 데이터 구축 기술 등을 공유받았다. 반대로 현지 연구진은 베트남어의 성조와 표현, 문화적 특성을 글로벌 AI 모델에 반영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본사가 기술을 개발한 뒤 해외 연구소에 내려보내는 일방향 방식과는 다르다.

한국의 핵심 기술과 인도의 AI 개발 역량, 베트남 연구진의 언어·문화 데이터가 하나의 프로젝트에서 결합되는 구조다. 삼성전자의 글로벌 R&D 네트워크가 하나의 거대한 연구소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이 방식은 AI 시대에 더욱 중요해질 가능성이 크다.

AI가 세계 시장에서 사용되려면 영어와 한국어뿐 아니라 베트남어·태국어·힌디어·아랍어 등 각 지역의 언어와 문화적 맥락까지 이해해야 한다. 이를 한국 연구진만으로 개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결국 현지 언어와 문화를 가장 잘 이해하는 연구진이 AI 개발 과정에 직접 들어올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는 실제로 브라질·중국·인도·인도네시아·일본·요르단·폴란드·베트남 등 세계 각국 R&D 조직을 활용해 갤럭시 AI 언어모델을 개발했다. 각 연구소가 서로 다른 언어를 맡으면서도 기술과 경험을 공유하는 글로벌 공동개발 구조다.

'생산기지 베트남'에서 '두뇌기지 베트남'으로

베트남에서 삼성전자의 존재는 오랫동안 스마트폰 생산공장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삼성의 베트남 전략에서 R&D의 비중도 커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2022년 말 하노이에 대규모 R&D센터를 준공했다. 회사는 이곳을 동남아시아의 주요 연구개발 거점으로 육성하고 있다. 연구영역도 모바일 소프트웨어를 넘어 AI, IoT, 빅데이터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2026년에는 현지 기술인재 육성 범위에 반도체까지 추가했다. 삼성 베트남은 올해 삼성 이노베이션 캠퍼스(Samsung Innovation Campus·SIC)에 처음으로 반도체 교육과정을 도입하고 AI·IoT·빅데이터와 함께 약 2200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첨단기술 교육을 추진하고 있다.

8월에는 타이응우옌 정보통신기술대학교에 첨단기술 인재개발센터도 열었다. 베트남을 단순히 값싼 생산인력을 확보하는 곳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기술인력을 확보할 수 있는 R&D 생태계로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다.

삼성전자의 글로벌 R&D 전략도 이를 통해 한단계 변화하고 있다. 1편에서 살펴본 인도 벵갈루루 연구소가 AI·통신·멀티미디어 등 글로벌 갤럭시 기술을 개발하는 대형 R&D 거점이라면 베트남 연구소는 현지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글로벌 AI 제품에 연결하는 역할을 보여준다.

두 연구소의 역할은 다르지만 방향은 같다. '한국에서 개발하고 해외에서 생산하는 삼성'에서 '세계의 연구진이 함께 개발하는 삼성'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갤럭시 AI가 베트남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것은 작은 기능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기능 뒤에는 한국과 인도, 베트남 연구진이 동시에 움직이는 글로벌 R&D 네트워크가 있다.

AI 시대 기업의 경쟁력이 어느 나라에 공장을 몇 개 가지고 있느냐뿐 아니라 세계 곳곳의 '두뇌'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연결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미디어펜=김태균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