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명으로 출발한 베트남 車 SW R&D, 1250명 이상으로 확대
인포테인먼트·텔레매틱스·디지털 클러스터 등 글로벌 프로젝트 수행
‘값싼 생산기지’ 베트남에서 미래차 소프트웨어 개발 거점으로
인공지능(AI)과 소프트웨어가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면서 국내 기업의 글로벌 연구개발(R&D) 전략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 해외 연구소가 한국에서 개발한 제품을 현지 시장에 맞게 바꾸는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해외 연구진이 글로벌 제품에 들어가는 핵심 기술을 직접 개발하는 단계로 진화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인도와 베트남, LG전자는 베트남, 현대자동차그룹은 인도에서 현지 연구인력과 대학을 글로벌 R&D망에 편입시키고 있다. 미디어펜은 ‘글로벌 두뇌전쟁’을 통해 한국 기업의 해외 R&D 전략과 세계 기술인재 확보 경쟁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미디어펜=김태균 편집국장] 베트남 하노이의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만드는 프로그램은 베트남에서 판매되는 자동차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세계 각국을 달리는 자동차에 들어갈 인포테인먼트와 텔레매틱스, 디지털 클러스터 등 차량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한다. LG전자가 베트남에서 운영하는 차량용 소프트웨어 연구개발(R&D) 조직 이야기다.

2016년 약 30명으로 출발한 LG전자의 베트남 자동차 소프트웨어 R&D 인력은 1250명 이상으로 확대됐다. 단순 계산으로 40배 이상 늘어난 규모다.

베트남을 저비용 생산기지로 활용하는 것을 넘어 글로벌 자동차 전장사업을 뒷받침하는 소프트웨어 개발기지로 활용하고 있다는 의미다. 자동차 산업의 경쟁축이 엔진과 기계장치에서 전장과 소프트웨어로 이동하면서 LG전자의 글로벌 R&D 전략도 함께 변화하고 있다.

   
▲ 베트남은 젊은 인구와 공학·IT 인력을 갖추고 있어 글로벌 기술기업들의 소프트웨어 개발 거점으로 성장하고 있다. LG전자 역시 현지 대학 등과 협력하며 자동차 소프트웨어 인력 확보와 육성에 나서고 있다. /AI 생성 이미지

30명에서 1250명으로…LG가 베트남서 키운 '자동차 두뇌'

LG전자가 베트남 자동차 소프트웨어 R&D 조직을 처음 만든 것은 2016년이다. 출발은 크지 않았다. 약 30명의 연구인력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자동차에서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이 커지고 LG전자의 전장사업이 확대되면서 조직도 빠르게 성장했다.

현재 관련 R&D 인력은 1250명을 넘어섰다. 연구인력 증가 폭만 놓고 보면 LG전자가 베트남을 자동차 소프트웨어 분야의 주요 해외 R&D 거점으로 키우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담당하는 분야도 다양하다. 차량 내부에서 내비게이션·음악·영상 등을 제공하는 인포테인먼트 시스템부터 차량과 외부 통신망을 연결하는 텔레매틱스, 운전자 앞에서 속도와 주행정보 등을 표시하는 디지털 클러스터 등에 필요한 소프트웨어 개발에 참여한다.

중요한 것은 개발 대상이다. 베트남 내수용 자동차에만 적용되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완성차 업체를 대상으로 한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쉽게 말하면 베트남 연구진이 만든 코드가 세계 각국에서 판매되는 자동차에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다.

LG전자의 베트남 R&D 조직이 현지 지원센터를 넘어 글로벌 전장사업의 개발 조직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는 의미다.

자동차도 스마트폰처럼…'코드'가 차의 성능 결정한다

LG전자가 베트남에서 자동차 소프트웨어 인력을 대폭 늘린 배경에는 자동차 산업의 근본적인 변화가 있다. 과거 자동차의 경쟁력은 엔진과 변속기 같은 기계장치가 좌우했다. 하지만 전기차와 커넥티드카 시대에 들어서면서 자동차는 거대한 전자기기로 바뀌고 있다.

자동차 안에는 수많은 전자제어장치와 디스플레이, 통신장비가 들어간다. 내비게이션과 음악을 제공하는 인포테인먼트뿐 아니라 차량의 각종 기능을 제어하고 외부 네트워크와 연결하는 과정에서도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

최근 자동차 업계가 주목하는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SDV·Software Defined Vehicle)가 대표적이다. SDV는 차량을 출고한 뒤에도 스마트폰처럼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해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거나 성능을 개선할 수 있는 자동차를 의미한다. 자동차가 기계제품에서 소프트웨어 플랫폼으로 변하는 셈이다.

이에 따라 자동차 기업뿐 아니라 부품회사에도 대규모 소프트웨어 개발인력이 필요해졌다. LG전자가 베트남의 IT 인재에 주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장사업이 확대될수록 필요한 소프트웨어의 양과 복잡성이 크게 증가하고, 이를 한국의 연구인력만으로 모두 개발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LG전자는 한국을 중심으로 베트남을 비롯한 해외 연구조직을 연결해 글로벌 전장 R&D 역량을 확대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가전회사 LG의 변신…베트남 R&D가 전장 성장 받친다

LG전자의 베트남 R&D 확대는 회사 자체의 사업구조 변화와도 맞물려 있다. 과거 LG전자를 대표하는 제품은 TV와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등 가전제품이었다.
하지만 최근 LG전자는 자동차 전장사업을 미래 성장동력 가운데 하나로 키우고 있다.

LG전자의 차량용 인포테인먼트 사업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의 차량용 조명기업 ZKW, 캐나다 마그나와 설립한 전기차 파워트레인 합작법인 LG마그나 이파워트레인 등이 전장사업의 주요 축을 이루고 있다.

전장사업의 특징은 글로벌 완성차 업체와 오랜 기간 공동으로 제품을 개발해야 한다는 점이다. 자동차 한 대에 적용되는 전자장비와 소프트웨어가 복잡해질수록 개발해야 하는 코드와 검증 작업도 늘어난다. 결국 충분한 소프트웨어 연구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수주 경쟁력과 직결될 수밖에 없다.

베트남 R&D 조직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이유다. 특히 베트남은 젊은 인구와 공학·IT 인력을 갖추고 있어 글로벌 기술기업들의 소프트웨어 개발 거점으로 성장하고 있다. LG전자 역시 현지 대학 등과 협력하며 자동차 소프트웨어 인력 확보와 육성에 나서고 있다. 단순히 필요한 개발자를 채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장기적으로 현지 기술인력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전략이다.

삼성은 AI, LG는 자동차 SW…베트남 '두뇌기지' 경쟁

흥미로운 점은 같은 베트남에서도 한국 기업들이 서로 다른 분야의 R&D 생태계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삼성전자는 베트남 연구진을 갤럭시 AI 개발에 투입했다. 베트남 연구진은 자동음성인식(ASR), 신경망 기계번역(NMT), 음성합성(TTS) 등에 필요한 베트남어 AI 모델 개발에 참여했다. 

LG전자는 자동차다. 베트남의 소프트웨어 연구인력을 글로벌 전장 프로젝트에 투입해 인포테인먼트·텔레매틱스·디지털 클러스터 등을 개발하고 있다. 같은 베트남의 기술인력을 두고 삼성전자는 모바일·AI, LG전자는 자동차 소프트웨어라는 서로 다른 글로벌 R&D망을 구축하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변화는 한국 기업의 베트남 전략 자체가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 한국 기업에 베트남은 상대적으로 낮은 생산비용과 풍부한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는 제조기지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이제는 다르다. 공장 옆에 연구소가 들어서고 현지 엔지니어들이 글로벌 제품 개발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Made in Vietnam'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Developed with Vietnam'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LG전자의 사례는 이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30명으로 출발한 자동차 소프트웨어 조직이 1250명 이상으로 커진 것은 단순한 인력 증가가 아니다.

자동차 산업에서 소프트웨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한국 기업이 필요한 기술인재를 확보하는 방식도 한국 중심에서 글로벌 네트워크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는 의미다.

삼성전자가 인도와 베트남에서 갤럭시의 AI와 통신 기술을 개발하고 LG전자가 베트남에서 미래 자동차의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시대다. 한국 기업들의 해외 진출 경쟁도 이제 공장을 어디에 짓느냐를 넘어 세계의 '두뇌'를 어디에서 확보하고 어떻게 연결하느냐의 경쟁으로 이동하고 있다.
[미디어펜=김태균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