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실적 달리는 첨단 반도체…호황 속에서 돌아보는 선대회장 통찰
''타이밍'서 '지능과 소프트웨어'로…AI 대전환기 맞은 한국 산업 나침반
[미디어펜=조우현 기자]고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의 서거 6주기를 앞두고 그가 생전 강조했던 "업(業)의 개념과 본질을 파악하라"는 화두에 재계의 시선이 쏠린다. 글로벌 AI 붐을 탄 반도체 산업이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리며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그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사업이 격변기를 맞을 때마다 근원을 꿰뚫어 보고 체질 개선을 이끌었던 그의 선견지명이 AI라는 문명사적 대전환기 속에서 다시금 빛을 발하고 있다는 평가다. 단순히 숫자로 드러나는 호황을 넘어, 다음 10년을 지탱할 경쟁력의 뿌리를 점검해야 할 시점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 고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이 2005년 구미사업장을 찾아 직원들을 격려하고 있다./사진=삼성전자 제공


◆ "카드업은 외상 술장사"…위기 때마다 빛난 '업의 개념'

이 선대회장은 "업의 개념 파악 여부에 따라 사업의 성패가 좌우된다"고 확신했다. 선배들이 해오던 관성과 관행에 맞춰 일 처리를 하던 조직에 던져진 그의 질문들은 늘 기존의 상식을 깨부쉈다.

2002년 무분별한 카드 발급으로 수많은 신용불량자가 양산되며 이른바 '카드 대란'이 터졌을 때가 대표적이다. 당시 금융권 전체가 패닉에 빠졌을 때 이 선대회장은 "카드업은 본질적으로 물(=술)장사와 같다"는 직설적인 진단을 내렸다.

카드업의 본질은 외상 술장사이고, 외상장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외상값을 잘 받아내는 채권 관리'라는 분석이었다. 삼성이 대대적인 채권 관리에 돌입해 신용카드 위기를 선제적으로 돌파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그의 '업의 본질론'은 그룹 내 전 사업군을 관통했다. 백화점업의 본질은 유통이 아닌 '부동산업'으로 규정했다. 부동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도 둘째도 '위치(입지)'이듯, 백화점 성패는 목 좋은 입지를 선점하는 데 달려 있다는 판단이었다.

호텔신라 사장이 호텔업을 단순히 "서비스업"이라고 답했을 때 "호텔업의 본질은 장치산업"이라고 되물었던 일화도 유명하다. 호텔 방 하나에는 침구와 어메니티 등 1300여 개의 비품이 들어가며, 이 비품과 인프라의 질적 수준이 호텔의 성패를 가른다는 설비·장치적 본질을 짚은 것이다.

나아가 그는 전통적인 내연기관 자동차 역시 향후 화석연료를 대체해 전기나 수소를 동력으로 쓰고 자율주행으로 진화하면, '기계장치산업'에서 '전기·전자·전장산업'으로 업의 본질이 통째로 바뀔 것이라는 예측까지 일찌감치 내놓기도 했다.

   
▲ 고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이 2004년 반도체 30년 기념물에 서명을 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제공


◆ 전자산업은 '타이밍'…AI 시대, '지능과 소프트웨어'로 본질 확장

이 선대회장이 30년 초격차 메모리 신화의 초석을 놓을 때 정의했던 전자·반도체 산업의 본질은 바로 '타이밍(시간) 산업'이었다.

누가 먼저 제품을 개발해 시장에 출시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는 통찰이었다. 경쟁사보다 반 박자 빠른 과감한 선제 투자, 적기에 공장을 짓고 수율을 끌어올려 대량 양산하는 속도전이 승부를 결정지었다. 

16메가 D램 개발 당시 리스크를 감수하고 '스택(적층)' 방식을 결단하며 글로벌 1위로 도약했던 배경에도 타이밍이라는 본질을 꿰뚫은 선구안이 있었다.

그러나 AI 혁명이 도래한 2026년 오늘,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 전자산업의 본질은 또 한 번 거대한 질적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하드웨어를 미세화하고 적기에 출시하는 '타이밍과 양산'의 시대를 넘어, 거대언어모델(LLM)과 복잡한 신경망을 최적화하는 '지능과 소프트웨어 아키텍처'로 본질의 무게중심이 이동한 것이다.

글로벌 AI 가속기 시장을 장악한 엔비디아의 핵심 경쟁력이 단순 칩 제조 성능에 머물지 않고 20년간 구축한 소프트웨어 생태계 '쿠다(CUDA)'에 있다는 사실은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제조업의 외형을 띠고 있지만, 실상은 알고리즘과 지적 자산이 부가가치를 결정짓는 시대로 진입한 셈이다.

   
▲ 지난 2011년 7월 29일 선진제품 비교전시회에 참관한 고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 모습. /사진=삼성전자


◆ 호황의 한가운데서 다시 묻는 '업의 본질'

이 선대회장은 1990년대 후반 하드웨어 제조 신화의 정점에서도 안주하지 않았다. "앞으로 세상은 소프트웨어와 지적 자산이 지배한다", "단순히 물건을 잘 만드는 조립 마인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며 끝없이 체질 개선을 주문했다. 

"1명의 천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인재관 역시 대규모 양산 인력이 아닌, 전체 판을 설계하는 소수의 소프트웨어 아키텍트가 핵심이 되는 시대를 내다본 진단이었다.

그가 자동차 산업의 전장화를 내다봤듯, 오늘날 반도체 역시 단순 부품 제조를 넘어선 시스템과 알고리즘의 영역으로 진화 중이다. 현재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압도적인 수율과 제조 기술로 글로벌 AI 생태계에서 대체 불가능한 핵심 파트너로서 사상 최고 수준의 실적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이 선대회장이 늘 실적이 가장 좋을 때 "자만하지 말고 업의 개념을 다시 세우라"고 주문했듯, 역대급 호황을 누리는 지금이야말로 다음 10년을 지탱할 본질적 경쟁력을 점검해야 할 적기라는 진단이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서거 6주기를 맞아 재조명되는 이건희의 유산은 과거의 성공에 대한 찬사가 아니다"라며 "AI라는 새로운 패러다임 앞에서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업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다시 묻고, 탄탄한 하드웨어 역량 위에 독자적인 소프트웨어와 지적 자산을 쌓아 올려야 한다는 그의 묵직한 선견지명"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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