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도원 변호사(법무법인 더보상)
[미디어펜=편집국] 보험금과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과정에서 흔히 마주치는 법률적 쟁점 중 하나가 ‘소멸시효’다. 소멸시효란 권리자가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음에도 일정한 기간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상태가 계속될 때 그 권리를 소멸시키는 제도다. 일정한 기간 계속된 법률관계를 유지하고, 시간의 경과로 증거보전이 어려워지는 문제를 해소해 이른바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법의 보호에서 제외하려는 데 그 취지가 있다.

보험회사에 보험금을 청구하는 경우에는 상법이 적용된다. 상법 제662조는 보험금청구권을 3년 간 행사하지 않으면 시효의 완성으로 소멸한다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이 3년은 언제부터 계산해야 하는가. 이를 소멸시효의 ‘기산점’이라 한다.

   
▲ 공도원 변호사(법무법인 더보상)/사진=더보상 제공


보험금청구권의 소멸시효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원칙적으로 보험사고가 발생한 때부터 진행된다. 그러나 보험사고의 발생 여부가 객관적으로 분명하지 않아 보험금청구권자가 과실 없이 그 발생을 알 수 없었던 경우까지 보험사고 발생일부터 시효가 진행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보험금청구권자에게 지나치게 가혹하고, 사회정의와 형평의 이념에도 반한다.

이에 대법원은 객관적으로 보험사고의 발생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보험금청구권자가 보험사고의 발생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던 때부터 소멸시효가 진행한다고 판단한다(대법원 2021. 2. 4. 선고 2017다281367 판결 등 참조).

특히 피보험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에는 사망일에 보험사고의 발생 여부를 객관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때가 적지 않다. 일반적으로 상해사망보험에서는 피보험자가 고의로 자신을 해친 경우를 보험금 지급의 면책사유로 정하고 있다. 다만 피보험자가 정신질환 등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사망에 이르렀고, 그 직접적인 원인행위가 외래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면 보험사고에 해당할 수 있다.

문제는 유족들 역시 피보험자의 사망 사실은 알고 있더라도, 사망 당시 피보험자가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였는지, 그러한 상태에 이르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객관적으로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최근 서울중앙지방법원과 서울고등법원은 군 복무 중 성추행과 2차 가해를 겪은 뒤 사망한 군인의 유족이 보험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보험금 청구 사건에서 소멸시효의 기산점을 판단했다. 해당 소송에서 보험회사는 피보험자가 사망한 날부터 보험금청구권의 소멸시효가 기산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유족들이 피보험자의 사망 당시 성추행 및 2차 가해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피보험자가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사망에 이르렀다는 사실까지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유족들이 순직 결정을 통보받은 시점에 이르러서야 보험사고의 발생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다고 보아, 그때부터 보험금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진행한다고 판단했다. 결국 법원은 보험회사의 소멸시효 항변을 배척하고 유족들의 보험금 청구를 인용했다.

그렇다면 보험회사에 대한 보험금 청구가 아니라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경우는 어떨까.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에는 상법이 아니라 민법이 적용된다. 민법 제766조 제1항은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은 피해자나 그 법정대리인이 그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부터 3년 간 행사하지 않으면 시효로 인해 소멸한다고 규정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의 의미다. 대법원은 이를 단순히 손해가 발생한 사실을 알게 된 날이 아니라, 손해의 발생, 위법한 가해행위의 존재, 가해행위와 손해 발생 사이의 상당인과관계 등 불법행위의 요건사실을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인식한 때라고 본다. 그 인식 시점 역시 개별 사건의 객관적 사정과 손해배상청구가 사실상 가능하게 된 상황을 고려해 합리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는 산업재해로 직업병을 얻은 근로자가 사업주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경우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근로자가 장기간 유해물질에 노출되어 직업병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질병이 업무로 인해 발생한 것인지는 의학적·전문적 판단을 거쳐야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폐암과 같은 직업성 질병은 최초 진단 당시에는 해당 질병과 업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구체적으로 인식하기 어려울 수 있다.

최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학교 급식실에서 근무하며 조리흄 등에 노출된 조리사들이 폐암을 진단받은 뒤 지방자치단체 등을 상대로 위자료를 청구한 사건에서 소멸시효의 기산점을 판단했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26. 9. 8. 선고 2025가단64626 판결). 당시 피고 지방자치단체는 일부 원고들이 폐암을 진단받은 날부터 3년이 지난 뒤 소송을 제기했으므로 손해배상청구권이 이미 소멸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해당 원고들이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로부터 업무상질병으로 판정받기 전에는 업무와 손해 발생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인식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업무상질병 판정을 받은 시점을 단기소멸시효의 기산점으로 보아 지방자치단체의 소멸시효 항변을 배척했다.

앞서 살펴본 사건들은 각각 보험금청구권과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에 관한 것으로, 적용되는 법률과 판단 기준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모두 사고나 질병의 발생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사정만으로 곧바로 소멸시효가 진행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만 보험사고에 관한 객관적 인식이 어려웠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산업재해를 뒤늦게 승인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언제나 그 시점부터 소멸시효가 진행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기산점은 개별 사건에서 권리자가 언제 관련 사실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 판단할 문제다.

소멸시효는 법적 안정성을 위한 중요한 제도다. 그러나 피해자가 권리를 행사하는 데 필요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알기 어려웠던 경우와,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음에도 오랫동안 행사하지 않은 경우를 동일하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사고나 질병이 발생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보험금이나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반대로 관련 사실이 모두 밝혀질 때까지 기다려도 소멸시효에 문제가 없으리라고 안이하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 소멸시효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가 아니라, 그 시간이 언제부터 흐르기 시작했는 지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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