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선언' 승부수…창립일 삼성전자 반도체서 미래 로봇 잇는다
입력 2026-10-30 15:05:44 | 수정 2026-10-30 15:12:52
조우현 기자 | sweetwork@mediapen.com
1983년 ‘도쿄선언’서 글로벌 패권까지…우려 딛고 일군 반도체 신화
자원 빈국 구한 이병철·이건희 결기…대한민국 경제 최후 보루로
자원 빈국 구한 이병철·이건희 결기…대한민국 경제 최후 보루로
[미디어펜=조우현 기자]삼성전자의 달력에서 11월 1일은 특별하다. 원래 뿌리는 1969년 1월 13일 출범한 삼성전자공업이지만, 오늘날 삼성전자는 1988년 11월 1일을 진짜 창립일로 기념한다. 흑백 TV 조립회사에 머물지 않고 반도체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의 승부수였다.
가전 중심이던 삼성전자가 만성 적자의 삼성반도체통신을 품어 안은 이 결단은 단순한 일화를 넘어 대한민국 산업사의 결정적 장면으로 꼽힌다. 기술 패권 경쟁의 한복판에 선 지금, 이 기념일의 유래가 남긴 함의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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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년 5월 21일 삼성반도체통신 기흥 반도체 2라인 준공식에서 고 이병철 선대회장(오른쪽에서 다섯 번째)과 당시 고 이건희 삼성그룹 부회장(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제막 줄을 당기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제공 | ||
◆ “3년 내 파산” 비웃음 딛고…73세 창업주의 사활을 건 승부수
30일 재계에 따르면 1983년 2월 8일, 73세의 호암 이병철 창업회장은 일본 도쿄에서 전격적으로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했다. 이른바 ‘2·8 도쿄선언’이다. 당시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2000달러 안팎에 불과했고, 국내 전자산업은 단순 조립 하청 수준에 머물던 시절이었다.
미국과 일본의 주요 외신과 반도체 기업들은 일제히 조롱을 쏟아냈다. “TV나 만들던 후발주자가 최첨단 반도체에 뛰어든다”, “3년 안에 망할 과대망상”이라는 의심이 팽배했다. 내부에서도 천문학적인 투자비 탓에 그룹 전체가 공멸할 수 있다는 반대가 극심했다.
하지만 이병철 창업회장의 시선은 눈앞의 단기 손익이 아닌 대한민국의 50년 뒤 미래를 향해 있었다. “자원이 없는 좁은 국토에서 살아남을 길은 두뇌를 활용한 첨단 고부가가치 기술뿐”이라는 사업보국의 일념이었다.
이병철 회장의 결단 아래 삼성은 기흥 공장 착공 6개월 만에 라인을 완공했고, 선언 6개월 만인 그해 11월 세계 세 번째로 64K D램 개발에 성공하며 기적의 서막을 열었다.
◆ 1974년 사재 털어 씨앗 뿌린 이건희…초격차로 일군 세계 제패
도쿄선언에 앞서 반도체의 싹을 틔운 것은 이건희 선대회장의 집념이었다. 1974년 파산 위기에 처한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려 했을 때, 그룹 내부에선 “TV도 제대로 못 만드는데 무슨 반도체냐”며 만류했다.
그러자 이건희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지분 50%를 전격 인수했다. “반도체야말로 미래 산업의 쌀”이라는 확신 하나로 던진 승부수였다. 이 회사는 훗날 삼성반도체, 삼성반도체통신을 거쳐 1988년 오늘날의 삼성전자로 흡수됐다.
두 회장의 의지가 결합되자 시너지는 폭발적이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글로벌 반도체 불황기 속에서 이건희 선대회장은 오히려 대규모 설비 투자를 선제 감행하는 ‘역발상 투자’를 밀어붙였다.
남들이 적자에 허덕이며 투자를 줄일 때 라인을 먼저 깔고 격차를 벌리는 전략은 삼성을 상징하는 ‘초격차’의 근간이 됐다. 1992년 세계 최초 64M D램 개발로 글로벌 1위에 오른 삼성전자는 30년 넘게 세계 메모리 시장 왕좌를 지켰다. 오너의 결단과 통찰력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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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이 2004년 반도체 30년 기념물에 서명을 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제공 | ||
◆ 대한민국을 지켜낸 방파제이자 안보 자산
오늘날 반도체는 단순한 수출 품목을 넘어 한국 경제를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다.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국가적 고비마다 반도체는 최전선에서 외화를 벌어들이며 경제 회복의 든든한 방파제 역할을 해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석유화학, 철강, 배터리 등 주요 제조업 전반이 글로벌 공급과잉과 경기 둔화로 고전하는 상황에서, 사실상 반도체가 홀로 버텨내며 국가 수출과 성장의 버팀목 역할을 다하고 있다.
만약 1974년 사재를 털었던 집념과 1983년 도쿄선언, 1988년 명운을 건 합병 승부수가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 산업 지형도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란 평가가 지배적이다. 중후장대 제조업의 뒤를 잇는 고부가가치 먹거리를 찾지 못한 채 조립 하청 국가로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나아가 오늘날의 반도체는 국가의 지정학적 헤게모니를 지키는 핵심 안보 자산이자 방패로 기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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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6월 1일 오후 서울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2026년도 제36회 삼성호암상 시상식'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 ||
◆ 다시 마주한 대전환기…선대 결기 잇는 이재용의 ‘미래 승부수’
AI 혁명과 기술 패권 경쟁이 전개되는 2026년 오늘,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또 한 번 거대한 문명사적 전환기를 지나고 있다. 이병철 창업회장이 불모지에서 씨앗을 뿌리고 이건희 선대회장이 합병 결단으로 1위 신화를 썼듯, 이제 시선은 이재용 회장에게 쏠린다.
기술 격차가 좁혀지고 산업 패러다임이 격변하는 지금, 이 회장 역시 반도체 초격차 복원을 넘어 휴머노이드 로봇과 AI 등 차세대 미래 먹거리 발굴에 방점을 찍고 있다.
AI 반도체를 대규모로 소비할 차세대 디바이스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구상이다. 선대 회장들이 가전에 안주하지 않고 반도체에 운명을 던졌듯, ‘뉴 삼성’의 미래 역시 기존 성공 방식을 깨는 파격적 변신에 달렸다는 판단에서다.
삼성전자가 또 한 번의 11월 1일을 맞는 지금, 선대의 담대한 기업가 정신을 이어 미래를 선점하려는 이재용 회장의 결단이 어떤 결실로 이어질지 산업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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