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대한 붉은색 논쟁…고뇌하는 연극 '레드'
연극 '레드'의 대사 일부다. 사실 '레드'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도 니체의 처녀작 '비극의 탄생'을 읽는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너무 어려우니까 우선은 '레드'에서 언급되는 내용들을 중심으로 요점만 정리해 보자.
니체는 비극(悲劇)의 기원을 태양의 신 아폴론과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공생에서 찾았다. 통제와 절제와 이성의 신 아폴론, 그리고 과잉과 흐트러짐과 감성의 상징 디오니소스. 이 둘의 에너지는 우리 주변에서 끊임없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움직인다. 그 움직임의 이름이 바로 '삶'이다. 여기까지만 알고 가도 '레드'를 이해하기가 한결 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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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시컴퍼니 | ||
'레드'는 러시아 출신의 미국 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와 그의 조수인 켄의 2인극이다. 나오는 사람이 둘 밖에 없는데도 무대의 분위기는 연신 팽팽하다. 총 다섯 개의 막으로 구성된 작품 내내 두 사람은 서로를 들볶고 헐뜯으며 긴장 관계를 이어가기 때문이다.
처음엔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던 켄은 극이 진행될수록 마크 로스코를 코너로 몰아붙인다. 켄의 눈에 로스코는 거대한 모순을 품고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텅 빈 캔버스에 지옥의 문 같은 사각형 하나를 그리기 위해 몇 달을 고뇌하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 마크 로스코. 하지만 동시에 그는 대기업 씨그램이 신축하는 건물 레스토랑을 장식하기 위해 연작을 준비하는 자본주의적(?) 행보를 보인다.
자연광이라고는 한 줌도 들어오지 않는 작업실 안에서 두 사람은 치열하게 예술에 대해 논쟁한다. 관객들은 미학과 강의실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유명 작가 존 로건(John Logan)이 쓴 이 작품은 2010년 개최된 제64회 토니상 시상식에서 무려 6개의 트로피를 가져갔다.
마크 로스코 역할은 두 명의 배우가 번갈아 소화하고 있다. 강신일과 한명구다. 두 남자가 연기하는 마크 로스코는 똑같은 대사를 소화하지만 완전히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둘 중에서 외적으로 리얼한 쪽은 한명구다. 실제 마크 로스코가 저렇지 않았을까 싶은 냉소와 예민함을 무대에서 그대로 재현한다. 덜 친절하고 덜 유머러스하다. 대사를 일방적으로 뱉는다. 켄의 말을 강압적으로 막아버리고 가벼운 손찌검을 하기도 한다. 관객들을 향해 '강의'를 할 때만 조금 친절해진다. 아폴론의 세계에 발을 디딘 채 디오니소스가 있는 쪽으로 점프하려는 느낌이다.
TV나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보다 익숙한 강신일이 연기하는 로스코는 좀 더 '한국적'이다. 문장 끝에 "이눔아"를 붙이는, 된장찌개 같은 푸근함이 있는 마크 로스코다. 그는 청중들이 웃을 수 있는 틈을 주며, 덩어리를 만들어 대사를 날린다. 디오니소스의 세계에 등을 댄 채 아폴론 방향으로 팔을 벌리고 선 느낌이다.
둘 중에서 누구의 무대를 택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결은 극적으로 달라진다. 어느 쪽이든 매력적인 대사가 연신 이어지며 귀를 잡아당기는 매력이 있다. 2011년 한국에서 초연된 '레드'가 객석 점유율 90% 이상을 기록하며 매년 돌아오는 이유도 대사 자체가 주는 흡입력에 있다.
"런던에 내셔널 갤러리에 가면 램브란트가 그린 '벨사살의 만찬'이라는 그림이 있어. 바빌론의 왕 벨사살은 만찬을 베풀고 신을 모독해. 그래서 신의 손이 나타나 경고의 의미로 벽에 히브리어로 몇 자 적어. 메네 메네 테켈 우바르신(Mene Mene Tekel Upharsin). 왕을 저울에 달아봤더니, 부족하더라. 블랙이 나한테 그래. 너에겐 뭐가 그렇지?"
적어도 이 연극은 부족하지 않다. 공연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7월 10일까지 이어진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 ▶다른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