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보다 머리로 승부하는 '지장', 대가야 정복시 총사령관
   
▲ 울릉도와 독도는 신라 장군 이사부의 공으로 우리나라 땅이 됐다. 울릉도 도동항 [사진=미디어펜]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나라 땅으로 만든 주인공은 가수 정광태의 가요 '독도는 우리 땅'에 나오는 신라 장군 이사부(夫)다.

이사부는 거칠부(居柒夫)와 더불어 삼국통일 이전 시기, '신라의 전성기'를 이끈 진흥왕 대의 대표적인 신라 장수다.

두 사람 모두 성은 김씨로 신라 왕족의 일원이다. 이름에 공통적으로 붙은 '부'(父)자는 실제 이름이 아니라, '대장부' 또는 '대부'의 의미로 추정된다.

이사부의 이름이 처음 사서에 등장한 것은 신라 지증왕 때다.

지증왕은 나라 이름을 처음 신라라고 확정하고, 왕(王)이라고 처음 자칭했으며, 소를 이용하는 농경을 처음 시작하는 등, 신라를 크게 도약시킨 군주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지증왕 6년 신라가 지방행정구역으로 주, 군, 현을 처음 설치했고 이사부는 실직주의 군주로 임명됐다고 적혀 있다.

실직주는 지금의 울진, 삼척 일대인데, 원삼국시대에는 '실직'국이 있던 곳이다. 군주라는 명칭이 처음 쓰인 예이다.

이사부는 아마도 그런 다음 아슬라주(지금의 강릉)의 군주로 옮겼던 것 같다.

아슬라는 원삼국시대 때 '예'국이 있던 곳이다.

예국은 춘천 일대의 '맥'국과 함께 한때 '예맥'(濊貊)이라고 해서, 우리 민족의 다른 이름으로까지 불렸던 나라다. 지금은 우리 민족의 조상 중 한 종족 정도로 추정된다.

예맥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말갈족(만주에 사는 만주족의 전신과는 다른 종족)인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백제와 신라 초기에 두 나라와 자주 충돌을 빚은 나라들인데, 그 본거지가 각각 강릉과 춘천이었다면, 기록에 신빙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본격적인 강국으로 성장하던 신라는 각 방향으로 뻗어나갔고, 그 한 갈래는 동해안을 따라 북진, 지증왕 때 울진과 삼척에 이어 강릉에까지 진출했고, 그 주역이 바로 당시 '약관' 20대의 청년 장수 이사부였던 것이다. 

그는 바로 다른 곳이 아닌 우산국(國), 즉 울릉도를 공격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지증왕 13년(512) 아슬라주 군주 이사부는 우산국 사람들이 미련하고 사나워서 힘으로 항복 받기 어려우니, 꾀를 써서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해안으로 다가가 “너희들이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들을 풀어 놓아서 밟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우산국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즉시 항복했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3가지를 시사한다.

전설상에는 우산국이 대마도 왕과 결혼했다는 얘기가 있어, 이는 신라땅을 침범한 것이므로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했다는 설이 있으나, 필자는 울릉도와 대마도는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그것보다는 '미련하고 사납다'는 표현에 주목, 농사지을 땅이 적고 물산이 부족한 울릉도 사람들이 신라 땅을 노략질하는 해적 활동을 했기 때문에, 굳이 이 먼 섬까지 군대를 보낸 것으로 해석한다.

둘째는 한반도에 산 적이 없는 사자를 신라인들이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신라가 광범위한 해상활동을 통해 서역에 관한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신라의 고분에서 고대 로마제국의 유리그릇이 발굴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이사부는 힘보다 머리를 쓸 줄 아는 지장(智將)이라는 점이다.

진흥왕 11년(550), 백제는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고,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물고 물리는 상황, 진흥왕은 두 나라 군사가 지친 틈을 이용하리라 생각, 이사부에게 명령하였다. 그가 출동하여 두 개의 성을 빼앗았고, 성을 증축하고 군사들을 남겨 두어 지키게 하였다.

뒤늦게야 고구려가 군사를 보내 금현성을 쳤으나 그들은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갔고, 도리어 이사부가 이들을 추격하여 크게 이겼다.

여기서도 이사부의 지략이 빛을 발한다.

이사부의 마지막 전공은 가야연맹 중 마지막 남은 대가야(大伽倻)를 정복한 것이다. 이 싸움에서는 당시 나이가 16세에 불과한 화랑 사다함이 큰 공을 세운 것은 국사교과서에서도 실려 있다.

그런데 지증왕과 진흥왕때 맹활약한 이사부가 그 중간, 법흥왕때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는 점은 역사의 의문점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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