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의 골프칼럼니스트인 방민준 전 한국일보 논설실장의 맛깔스럽고 동양적 선(禪)철학이 담긴 칼럼을 독자들에게 배달합니다. 칼럼에 개재된 수묵화나 수채화는 필자가 직접 그린 것들로 칼럼의 운치를 더해줍니다. 주1회 선보이는 <방민준의 골프탐험>을 통해 골프의 진수와 바람직한 마음가짐, 선의 경지를 터득하기 바랍니다. [편집자주]

   
▲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
방민준의 골프탐험(54)- 챔피언의 시나리오는 캐디가 쓴다

골프는 철저하게 자신과 외로운 싸움을 벌여야 하는 운동이라고들 말한다. 3~4명이 한 조를 이뤄 플레이하지만 동반자로부터는 도움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골프가 결코 혼자서 하는 운동은 아니다. 캐디라는 협조자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캐디 없이 라운드 할 수도 있지만 이 경우 평소의 기량을 발휘하겠다는 기대는 접어야 한다. 캐디 없이 혼자서 플레이한다고 가정해보자. 결코 자신의 핸디캡대로 플레이할 수 없다. 거리나 방향, 그린의 빠르기, 코스 곳곳에 도사린 함정 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 최소한 5타 이상, 많게는 10여타를 더 치게 된다.

피 마르는 우승경쟁을 벌여야 하는 프로골퍼들에게 캐디의 중요성은 주말골퍼들이 체험하는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매순간 긴장과 공포, 좌절, 낙담, 분노, 자만, 흥분 등 인간이 겪는 모든 감정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프로선수들이 스스로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때 그를 지켜주고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끄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캐디다.

조던 스피스(21)에게 마이클 그렐러(37)라는 무명의 캐디가 없었다면 과연 마스터스에서 새로운 신화를 쓸 수 있었을까. 부질없는 가정이긴 하지만 나는 ‘No!’라고 말할 것이다.

조던 스피스의 플레이를 지켜보면서 그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은 다름 아닌 캐디 마이클 그렐러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조던 스피스는 시간만 나면 옆에 다가온 캐디에게 편한 얼굴로 말을 건네고 큰 형님 같은 캐디는 매우 인자하고 자상한 얼굴로 스피스가 샷을 위해 볼로 다가설 때가지 성실하게 조언을 해주었다. 스피스나 그랠러 모두 아무런 긴장감 없이 동네 숲길을 산책할 때처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그렇게 인상적일 수 없었다.

물론 자폐증을 앓는 동생 엘리(14)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엘리에게 우승컵을 안겨주겠다는 간절한 열망이 스피스에게 강력한 동기를 부여했지만 그 아름다운 동기를 짊어진 채 평정심을 유지하며 흐트러짐 없이 위대한 게임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곁에 마이클 그렐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마스터스 사상 다섯 번째, 1976년 레이먼드 플로이드(73·미국) 이후 39년 만에 역전을 허용하지 않은 전 라운드 선두를 지키며, 1997년 타이거 우즈(40)가 세운 최소타(270타) 타이기록으로, 같은 해 우즈가 우승할 때 세운 최연소기록(만 21세 3개월)에 이은 역대 두 번째 어린 나이(21세 8개월)로 우승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이클 그렐러가 캐디백을 짊어졌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마이클 그렐러는 사실 캐디로 치면 초보다. 노스웨스턴대학 골프선수 출신이니 문외한은 아니지만 10년간 초등학교 수학 과학 교사로 일하다 조던 스피스의 캐디로 전업한 지 2년이 갓 넘었다.

   
▲ 선수와 어떤 심리적 벽도 없는 상태에서 선수가 흥분에 휩싸이려 할 때 냉정함을, 좌절에 빠질 때 용기를, 자만에 빠질 때 겸손을, 성급하게 덤비려 할 때 신중함을, 불안할 때 편안함을, 조바심에 빠질 때 인내심을 갖도록 눈빛과 표정과 말로 이끌어주는 캐디야말로 챔피언을 탄생시키는 주인공이다. /삽화=방민준
3년 전만 해도 그는 마스터스 관람 제비뽑기에 당첨돼 로리 매킬로이를 따라다녔다. 2006년 집 근처에서 열린 미국 아마추어 퍼블릭링크스 챔피언십에 구경 갔다가 우연히 캐디를 구하지 못한 한 선수의 무료 캐디를 자청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인연이 돼 2011년 미국 주니어아마추어대회에서 스피스의 백을 지고 우승을 합작했다. 스피스가 프로로 전향하자 그렐러와 유치원 교사인 부인과 함께 스피스의 투어에 동행하며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주위에선 많은 전문캐디를 추천했지만 스피스는 마이클 그렐러를 고집했다.
“늘 내 곁을 지켜줄 친구가 필요했고 그렐러가 그런 존재였다.”
“스피스에게 조용히 영향을 주려고 했다.”는 그렐러는 스피스에게 꼭 필요한 친절하고 유능한 최고의 캐디였던 것이다.

마스터스를 창시한 바비 존스와 함께 1930년대 미국 골프계를 풍미한 진 사라센이 1928년 US오픈을 석권하고 디 오픈(브리티시 오픈)에 참가했다. 미국인 최초의 디 오픈 우승이라는 영광을 안고 싶었으나 험난하기로 유명한 로열 조지스 코스에서 같은 미국의 월터 헤이건에서 2타 차로 패배했다.
진 사라센은 영국의 캐디 스키프 다니엘즈의 말을 딱 한번 안 들은 것이 패배의 원인임을 뒤늦게 깨달았으나 이미 경기는 끝난 뒤였다. 헤어질 때 다니엘즈는 그에게 “내 생전에 꼭 당신을 우승 시키겠다.”고 약속했다.

4년 후 디 오픈에 다시 출전한 사라센은 다니엘즈를 캐디로 모셨다. 70세의 노구에 시력도 나쁘고 병중에 있던 다니엘즈는 사라젠의 청을 외면할 수 없었다. 사라센은 다니엘즈를 캐디가 아닌 대 스승으로 모시고 완벽한 신뢰 속에 그의 지시와 조언대로 플레이해서 대망의 타이틀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시상식 때 사라센은 승리의 절반은 다니엘즈 몫이라며 동석을 요청했으나 전례가 없고 경기규칙에도 어긋난다고 해서 다니엘즈는 먼발치에서 시상식을 구경했다. 사라센은 우승자의 상징인 녹색 재킷을 받자 그대로 다니엘즈에게 달려가 입혀주었다. 이로써 진 사라센은 4대 메이저대회인 마스터스와 US오픈, 디 오픈, PGA챔피언십을 모두 석권한 최초의 커리어 그랜드 슬래머가 되었다. 다니엘즈는 사라센과의 약속을 지키고 두 달 후 조용히 눈을 감았다.

6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PGA투어와 챔피언스투어를 넘나들며 노익장을 과시하는 톰 왓슨에게는 알피 파일스라는 전설적인 캐디가 있었다. 잉글랜드 바크데일 근처의 작은 마을 사포크 로드 출신으로 여덟 살 때부터 캐디 일을 해온 그는 캐디백을 질질 끌어야 할 정도의 작달막한 키에도 톰 왓슨을 도와 1975, 1977, 1980년 등 세 번씩이나 디 오픈 우승이라는 위업을 일궈냈다.

이에 앞서 그는 1968년 카누스티에서 열린 디 오픈에서 게리 플레이어의 백을 메고 집요하게 인내심을 요구해 우승시키기도 했다.
마지막 라운드 후반, 게리 플레이어가 녹초가 되어 집중력을 잃고 헤매자 그는 플레이어 앞을 막고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지금 세계 최고의 타이틀을 자네로부터 멀리 하려고 기를 쓰고 있어. 이제 겨우 7홀인데 자네는 싸움에서 진 개처럼 3등이라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어. 차라리, 여기에서 때려치우고 샤워라도 하는 것이 어때?”
“그렇게 심한 질책을 받아 본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나는 스스로 한심해서, 알피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의 질책을 듣고 혼신을 다해 나머지 홀에 도전할 수 있었다. 그 우승은 알피와 내가 합작으로 얻어낸 것이다.”
게리 플레이어의 술회다.

훌륭한 캐디는 골프 외적인 중요한 징후까지 놓치지 않는다.
14년간이나 미국의 대 선박회사 사장의 골프를 뒷바라지 해온 한 캐디가 어느 날 홀 아웃 한 사장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제 넘는 말 같지만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아보시지 않겠습니까?”
사장이 놀라서 이유를 묻자 캐디가 대답했다.
“사장님 몸이 이상한 것 같습니다. 겨우 1주일 만에 거리가 줄어 오늘은 모든 클럽을 하나씩 길게 드렸습니다. 어딘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장은 다음 날 바로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간 기능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의사는 그대로 방치했으면 위험할 뻔했다고 말했다.

핸디캡은 14지만 퍼팅에는 자신이 있던 한 코미디언이 홈 코스를 찾아 친한 캐디와 한 라운드를 돌았다.
18홀을 끝내고 캐디가 말했다.
“눈 검사를 받는 게 좋겠는데요. 퍼팅라인이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설마 그럴 리가….’라고 생각하면서도 안과를 찾았다. 검사결과 녹내장 초기라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선수와 어떤 심리적 벽도 없는 상태에서 선수가 흥분에 휩싸이려 할 때 냉정함을, 좌절에 빠질 때 용기를, 자만에 빠질 때 겸손을, 성급하게 덤비려 할 때 신중함을, 불안할 때 편안함을, 조바심에 빠질 때 인내심을 갖도록 눈빛과 표정과 말로 이끌어주는 캐디야말로 챔피언을 탄생시키는 주인공이다.
골프의 역사는 챔피언이 쓰지만 챔피언의 시나리오는 캐디가 쓴다.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